이제 프라하성으로 갈 시간이다. 노비 스비에트 골목길 끝에 나무 담장이 보인다. 담장 한쪽에 작은 작은 문이 있는데 군인 한 명이 문을 지키고 있다. 담장 너머는 물이 말라 버린 개울과 숲이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곳이 어디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군인에게 물어본다. 다행히 군인도 짧은 영어를 할 줄 안다.
“여기로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이죠.”
“저기는 어딘가요?”
“성 주변을 에워싼 해자입니다. 사슴해자라고 불리지요.”
군인의 설명을 듣고 머리를 탁 쳤다. 그렇구나, 여기가 바로 프라하 성의 사슴해자로구나. 과거 보헤미아 왕들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깊게 파서 해자를 만들어 물을 흘려보냈다. 지금은 성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 해자에 물을 가둘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물이 마른 개울처럼 보인다. 이곳을 사슴해자라고 부르는 것은 17~18세기에 물을 뺀 해자에서 사슴을 키운 데서 연유한다.
이처럼 대충 설명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상세한 내용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곳에 사슴이 살게 된 이유도 황당하고 사슴이 사라지게 된 이유도 황당하다. 시작은 재미였고 결말은 식량이었다. 사슴이 처음 사슴해자에 풀리게 된 것은 극심한 우울증과 조현병에 시달렸던 루돌프 2세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했던 그는 이곳에 사슴을 풀어놓은 뒤 혼자 재미 삼아 사냥을 즐겼다. 사슴이 사라진 것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프랑스군이 프라하를 점령했을 때였다. 프랑스군은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슴해자의 사슴을 모두 사냥했다. 이후에는 이곳에 단 한 마리의 사슴도 살지 않게 됐다.
사슴해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학살 만행이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프라하에서 저항운동에 나섰던 체코인 21명을 붙잡아 1945년 5월 8일 이곳에서 총살했다. 독일군이 전쟁에서 패하고 체코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군인에게 미소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고 문 너머의 계단을 이용해 해자로 내려간다. 이곳에는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보기 힘들다. 산책하러 나온 현지인 서넛만 느긋하게 가을 햇살을 즐길 뿐이다.
해자는 꽤 넓고 깊다. 물이 없어서 그렇지 물을 가두면 어지간해서는 해자를 넘어가기 어려워 보인다. 이곳에 내려오기 전에는 어떻게 해자에서 사슴을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사슴을 풀어놓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프라하성이 있는 언덕 동쪽과 남쪽은 낭떠러지이고, 북쪽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개울을 더 깊이 더 넓게 파서 만든 게 해자였다. 유일한 통로는 서쪽이었는데 이곳에는 성벽을 만들어 적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성벽을 허물고 주거지로 조성한 게 방금 지나온 노비 스비에트를 포함한 흐라드차니다.
프라하성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띤다. 해자에서 올려다보면 성이 완벽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가려 일부분만 보이는 것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해자에는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충분히 드리운다. 주변과 거의 완벽히 차단되다시피 한 공간이어서 새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곳곳에 너른 공터도 많아 햇살을 받고 싶으면 바닥에 드러누우면 된다. 왜 현지인이 이곳에 산책하러 오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해자에서 올라가면 프라하성 뒷문으로 연결되는 프라슈니 브리지로 연결된다. 뒷문을 통해 성에 입장할 수도 있지만 정면으로 가고 싶다면 뒷문 바로 오른쪽에 있는 작은 길로 가면 된다. ‘카페-레스토랑’ 안내판을 따라가면 제4정원이 나온다. 이곳에 해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카페, 레스토랑을 지나가면 뒷문의 측면이나 정면으로 갈 수 있다.
이제 프라하성 정문으로 돌아가서 성 안으로 들어간다. 정문에서는 경비병이 보초를 서고 있다. 평소에는 아무나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특별한 행사가 열릴 때면 방금 지나온 제4정원에서 검색을 받아야 한다.
총 인원 900명인 프라하성 경비대는 창설된 지 100년을 넘었다. 종전에는 없던 경비대가 생긴 것은 1918년 제1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탄생 직후였다. 토마슈 가릭 마사릭 초대 대통령이 프라하성 구왕궁을 대통령 집무실로 삼았기 때문에 경비대가 탄생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 중세에도 프라하성을 지키던 근위대가 있었는데, 대개 스위스에서 온 용병이었다. 1918년에 용병 근위대는 없어지고 체코 청년이 참여하는 경비대가 만들어졌다.
경비대는 1930~1940년대 독일의 체코 점령기와 이후 공산정권 시기에는 폐지됐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이 민주정부의 새 지도자로 취임했을 때 부활했다.
프라하성 경비대 유니폼은 꽤 멋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적 의상 전문가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1984년 체코 출신 밀로슈 포르만 감독이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의 의상을 담당해 아카데미상 최우수의상상을 받은 테오도르 피슈테크의 작품이다.
경비병이 지키는 문의 두 기둥 위에는 험악한 표정으로 싸우는 거인 조각상이 있다. 두 조각상 제목은 ‘타이탄의 대결’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검투사를 소재로 한 조각이다.
말을 걸면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할 수는 없지만 경비대 옆에서 사진은 찍어도 된다.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사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추억이 될 수 있는 사진이다.
경비병이 지키는 문을 지나면 제1정원이 나타나고 긴 건물 사이에 문이 하나 보인다. 문의 이름은 ‘마티아스문’이다. 루돌프 2세 황제가 만들기 시작했지만, 후임인 마티아스 황제가 완성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제1정원은 원래 프라하성과 흐라드차니를 가르는 해자가 있던 곳이었는데, 해자를 메워 정원으로 바꾼 것이었다. 제1정원 뒤를 가로막는 긴 건물은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만든 신왕궁 서쪽 부분이다.
마티아스문을 지나면 다시 정원이 나타난다. 아기자기한 분수가 가운데에 선 이곳은 제2정원이다. 이곳을 사방으로 둘러싼 건물 전체가 신왕궁이다. 이름은 신왕궁이지만 사실 이곳은 프라하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프라하성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곳을 중심으로 건설됐다는 이야기다.
신왕궁 서쪽, 즉 마티아스문이 달린 건물의 맞은편에 있는 동쪽 건물 지하에는 오래된 교회 유적이 있다. 서쪽 건물과 거의 일직선으로 뻗은 곳이다. 이름은 성모마리아교회였다. 프라하에서 최초로 생긴 교회였다.
9세기 말 보헤미아 공국 지도자 보쉬보이 공작과 그의 부인 성 루드밀라는 보헤미아 지도자 중에서는 처음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된 뒤 교회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보헤미아 공국 수도였던 레비 흐라데츠에, 다른 하나는 당시 오피슈 언덕이라고 불렸던 프라하 블타바강 서쪽 언덕에 건설했다.
두 사람은 오피슈 언덕에 교회를 만든 뒤 주변에 목책을 쌓아 성처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프라하성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성모마리아교회는 프라하성의 출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교회 앞에 웅장한 성비투스대성당이 생겼지만 성모마리아교회는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13세기 말 기록을 끝으로 교회 이야기는 사라졌고, 지금은 신왕궁 지하에 흔적만 남았다.
제2정원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다. 분수를 만든 조각가 예로님 콜의 이름을 붙여 ‘콜 분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의 이름을 붙여 ‘레오폴트 분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다지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분수는 아니지만 프라하성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조각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분수 앞에서 온갖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