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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24. 2024

프라하 둘째 날(11) 성비투스대성당의 진실


프라하성 제2정원 동쪽 건물 아래를 지나간다. 곧바로 고딕 양식의 첨탑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얼마나 높은지 아무리 고개를 들어 올려도 끝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다. 첨탑은 마치 프라하의 수호자인 것처럼 높은 하늘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세월의 때가 짙게 덮여 대성당 외벽은 검게 변했지만 그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엄숙하고 경건하다. 



웅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주는 첨탑이 서 있는 이곳은 성비투스(체코어로 비타)대성당이다. 이곳은 체코인에게는 단순한 성당이 아니다. 그들이 가장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성소이며, 체코의 영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체코인이 이곳을 얼마나 신성시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19세기 중엽 프라하에서 벌어진 국립극장 건립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체코어로 된 오페라만 공연할 수 있는 전용시설을 만들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자는 게 건립 운동 취지였다. 국립극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부지를 어디로 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국립극장건설위원회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기준은 딱 하나였다. ‘프라하성 성비투스대성당 첨탑이 보이는 장소’였다. 


국립극장 부지 선정 기준을 성비투스대성당으로 정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곳은 프라하성뿐 아니라 프라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코인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뭉치게 하는 성소였다. 



성비투스대성당이 체코인에게 소중한 장소가 된 것은 체코의 수호성인 세 사람의 유해가 모셔진 성소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바로 성 비투스, 성 바츨라프, 성 비오테쉬다. 체코를 지켜 주는 역할을 맡은 성인을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모신 곳이니 당연히 가장 중요한 성소일 수밖에 없다. 세 성인의 유해를 모신 곳이어서 정식 명칭도 ‘성 비투스‧바츨라프‧비오테쉬 대성당’이다. 


성 바츨라프는 925년 프라하성에 대성당의 원형이었던 성비투스로툰다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동프랑크 국왕 하인리히에게서 성 비투스 팔뼈를 기증받았는데, 이 뼈를 안치하기 위해 만든 게 성비투스로툰다였다. 성 비오테쉬는 보헤미아 역사상 두 번째 주교였다. 그는 프러시아로 선교하러 가다 엘베 계곡에서 살해당했다. 


오늘날의 대성당은 14세기 카를 4세 황제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그는 새 대성당을 왕의 대관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했고, 나중에는 왕의 무덤과 귀중한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프라하성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건물 외관을 살펴보고 정원을 둘러보는 것은 무료다. 다만 건물 내부에 들어가서 구석구석까지 상세하게 관람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성비투스대성당도 마찬가지다. 입구까지만 공짜일 뿐 신도석 너머 안쪽까지 둘러보려면 통합입장권을 사야 한다. 입장권은 대성당 맞은편 신왕궁에 있는 매표소에서 사면 된다. 비싸다고 할 수도 있고 비싸지 않다고 할 수도 있는 가격이다. 


성비투스대성당 공사를 총괄한 인물은 당시 23세에 불과했던 체코 출신의 페테르 팔러지였다. 오늘날 대성당의 모습은 그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팔러지가 계획한 대성당 건설의 주제는 ‘신의 도시’였다. 신도석에서 차근히 살펴보면 무엇보다 대성당 내부의 규모와 아름다움이 기대를 뛰어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팔러지가 왜 건축 주제를 ‘신의 도시’로 정했고, 그것이 얼마나 잘 이뤄졌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비투스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청동 문이다. 사실 이곳은 처음에는 대성당의 주 출입구가 아니라 서쪽 출입구였다. 주 출입구는 구왕궁을 마주보는 쪽에 서 있는 ‘황금의 문’이다. 1370년에 만든 문이었는데, 너무 낡아 손상될 위험이 있어 지금은 중요한 행사 때말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성당 입구 앞에서 어린이들의 신난 목소리가 들린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이 20여 명이 하늘 높이 까마득히 솟은 첨탑을 보느라 고개를 한껏 젖히고는 인솔교사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보니 체코 초등학교에서 견학을 나온 모양이다. 외국에 여행을 갈 때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늘 부럽기 짝이 없다. 어릴 때부터 수시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그 안에 전시된 뛰어난 예술품을 보고 자라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대성당에 들어가면 신도석 가운데 복도에 묘한 자세의 조각상이 가장 먼저 보인다. 사제복을 입은 사내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습이다. 기단에는 라틴어로 ‘SANCTUS ADALBERTUS’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 조각상은 성비투스대성당에 묻힌 세 성인 중 한 명인 성 보이테쉬의 무덤이다. 원래 이름은 보이테쉬였지만 나중에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스승 ‘막덴부르크의 아달베르트’의 이름을 따 ‘프라하의 아달베르트’로 개명했다.



신도석 왼쪽 구석에는 아주 인자한 할아버지 표정을 한 노인의 사진과 흉상이 서 있다. 1969년 바티칸교황청에서 세상을 떠난 체코 추기경 요제프 베란이다. 그는 종교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신념이 굳은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전체주의와 독재에 맞서 저항한 인물이었다. 어떤 위협을 받아도 입을 다물고 굴종하기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도들에게 “우리는 종교적 신념에서만 진실해서는 안 됩니다. 조국에 대해서도 진실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했다.


베란은 곧은 신념 때문에 1940년대 독일 나치의 체코 점령기에는 뮌헨 다차우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목숨을 잃을 위기를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대주교가 된 그는 체코 공산정권 시절에는 16년 동안 가택연금과 수감을 반복했다. 그는 결국 1965년 자진출국 형식을 빌려 체코에서 사실상 강제추방을 당했다. 


베란은 체코를 떠난 지 53년, 세상을 떠난 지 49년 만인 2018년 유해로 귀국했다. 성비투스대성당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프라하 시내의 모든 성당과 교회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귀국을 축하하는 뜻을 담은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유해는 성비투스대성당에 안치됐다.



성비투스대성당에서는 1989년 반공산주의 벨벳 혁명을 주도한 반체제 작가이자 정치인이었으며 체코공화국 초대 및 2대 대통령으로 봉사했던 바츨라프 하벨의 장례식도 열렸다. 그는 2011년 1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하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체코 국민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주요 도시에 차려진 조문 시설에는 민주화의 영웅을 애도하는 국민이 줄을 이었고, 많은 집의 창문에는 하벨의 사진이 내걸리기도 했다. 프라하 성 앞에서는 매일 밤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하벨의 장례식은 닷새 뒤 프라하성 성비투스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됐다. 이른 아침부터 전국의 모든 성당과 교회에서 민주화 지도자를 잃은 슬픔을 담은 추모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벨의 장례 행렬이 프라하 시내를 행진할 때 전국에서 모인 체코 국민 수만 명이 뒤를 따라 걸었다. 장례식이 열렸던 성비투스대성당 밖에도 수만 명이 운집해 민주화의 길을 연 첫 대통령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베란의 흉상 맞은편, 그러니까 대성당에 들어가서 오른쪽에는 다른 조각상이 보인다. 목을 옆으로 떨군 채 축 늘어진 여성의 모습이다. 그녀는 성비투스대성당을 세운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 성 루드밀라다. 프라하 지도층 중에서는 가장 먼저 남편과 함께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도가 됐고, 오늘날 프라하성 자리에 보헤미아의 첫 교회였던 성모마리아교회를 세운 보헤미아 공국의 지도자 보이보쉬 공작의 부인이었다. 프라하, 더 나아가 체코의 기독교 역사는 그녀와 보이보쉬에게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성 루드밀라는 체코에서는 가장 먼저 성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요제프 베란 추기경과 성 루드밀라의 조각상을 살펴본 뒤 개표소를 지나 본격적인 성비투스대성당 탐구를 시작한다. 여기에 들어가면 곧바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보다는 입구 쪽 신도석 끝자리에 앉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유를 갖고 내부 디자인과 구성, 색감, 소리 그리고 냄새를 골고루 둘러보고 들어보고 맡아보면 독특한 별미를 느낄 수 있다. 대성당의 벽, 기둥, 천장, 창에 숨어 있는 비밀과 전설이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신도석에서 차근히 살펴보면 무엇보다 대성당 내부의 규모와 아름다움이 기대를 뛰어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대성당 길이는 124m, 폭은 60m에 이른다. 천장 높이도 33m나 된다. 어떻게 보면 내부가 외관보다 더 웅장하다고 평가해도 무리는 아니다. 



대성당 내부의 기둥은 성베드로대성당이나 쾰른대성당, 밀라노대성당처럼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중부 유럽에서는 처음 ‘네트 볼팅(그물 아치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독특한 형태의 천장은 또 얼마나 장관인가! 


내부를 꼼꼼히 둘러본 뒤 이번에는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린다.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대성당의 창에 붙어 미묘하고 정교한 색채를 발산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대성당에서 창은 심미적인 면뿐 아니라 종교적 상징이라는 측면도 고려해 만든다. 대성당의 창은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창의 바깥은 평범한 인간이 사는 세상이고, 안쪽의 대성당은 그곳과 분리된 성지 즉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그러므로 성당 내부를 환히 밝히는 빛은 자연 상태의 햇빛이 아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한번 걸러진 신성한 ‘신의 빛’이다. 대성당에 있는 연약한 인간은 창을 통해 정화된 ‘신의 빛’을 바라봄으로써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도석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선다. 이번에는 대성당 곳곳을 둘러보며 안쪽으로 들어간다. 대성당의 가장 안쪽 부분은 대제단이다. 바로 앞에는 어린 천사들이 철문을 지키는 하얀 대리석 성단소가 있다. 미사를 올릴 때 성직자와 합창대가 앉는 자리다. 


철문 뒤에 보이는 관은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는 최초로 보헤미아 국왕 자리를 차지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부부의 것이다. 철문 아래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옛 보헤미아 국왕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이 묻혔던 왕족 영묘가 나온다. 


성비투스대성당에 묻힌 왕족은 20여 명에 이른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보면 합스부르크 왕가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13세기 루돌프 1세, 신성로마제국 수도를 프라하로 정해 도시의 전성기를 열었던 14세기 카를 4세, 15세기 후스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게으른 왕’ 바츨라프 4세, 프라하를 두 번째 전성기로 이끈 17세기 황제 루돌프 2세 등이다. 



영묘 양쪽의 트리포리움 갤러리에는 아주 독특한 석재 흉상이 줄지어 서 있다. 조각 중 11개는 왕족 구성원이며 3개는 프라하 대주교다. 여기에 특이한 사람의 조각도 있다. 아라스의 매튜와 페테르 팔러지 등 대성당 공사에 참여한 건축가 일곱 명이다. 대성당 내부에 이들의 흉상이 세워졌다는 것은 19세기에는 예술가의 위상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에는 건축가 등 예술가는 수공예인, 때로는 하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대제단 바로 인근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은색 관이 보인다. 1736년 엘라흐 피셔가 설계해 만든 성 네포무츠키의 관이다. 날개 달린 네 천사가 든 관 위에는 성 네포무츠키가 서 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 네포무츠키는 카를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 황제에 의해 살해당한 사제였다. 황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라는 황제의 요구를 무시한 게 죽음을 당한 이유였다. 황제는 그의 혀를 뽑은 뒤 카를교 위에서 블타바강으로 집어던져 죽여 버렸다.



화려한 성 네포무츠키의 관을 만들게 된 것은 ‘네포무츠키의 혀’ 때문이다. 관을 자세히 보면 천사들이 은으로 만든 거울을 든걸 볼 수 있다. 거울은 분홍색 물질을 비춘다. 이것이 바로 ‘네포무츠키의 혀’라는 것이다. 물론 원본은 아니다. 진짜는 무덤 맞은편 진홍색 방의 은색 상자에 보관돼 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성 네포묵은 황후의 고해성사를 지키려다 혀를 잘리고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혀의 순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혀가 잘렸다면서 어떻게 혀가 남아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기적을 원하면서 믿는 대로만 보려고 했던 교회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1729년 교황청은 네포무츠키를 성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시성식은 프라하에서 열렸다. 행사 도중 신부들이 네포무츠키 시신을 하얀 식탁보 위에 놓고 뼈를 깨끗이 닦았다. 정확히 낮 12시 무렵 성당 종이 울릴 때였다. 신부들은 해골에서 특이한 분홍색 조각을 발견했다. 누군가 “혀 같다‘고 소리를 쳤다. 참석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혀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네포무츠키가 죽고 350년이 지났는데도 조각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내렸던 것이다. 



체코인들은 성 네포무츠키 유해에서 발견한 혀를 진짜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민 모금운동을 벌여 혀를 모시는 은제 관을 제작한 것이었다. 1960년대 체코 과학자 에마누엘 브르첵이 여기에 의문을 품고 혀의 세포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엉뚱한 결론이 내려졌다. 혀가 아니라 뇌 세포이며, 피가 흘러내린 것처럼 보인 것은 무산소 상태에서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성당들의 특징은 여러 예배당이 주 신도석을 에워싸는 형태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제단은 성당의 가운데 지점에 자리를 잡게 된다. 성비투스대성당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대제단은 예배당 20개에 둘러싸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여러 예배당 중에서 체코인에게는 가장 성스럽고, 관광객에게는 가장 인기 높은 장소는 성바츨라프예배당이다. 이곳은 성비투스대성당의 중심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체코인에게는 ‘영혼의 아버지’인 성 바츨라프의 무덤 위에 만든 예배당이기 때문이다. 예배당 벽은 성 바츨라프의 생애를 담은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벽화 중에서 목을 삐딱하게 기울이고 앞으로 돌출한 인물이 바로 성 바츨라프다. 



성바츨라프예배당이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방’이 숨겨져 있어서다. 이 방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관식의 보물’이 보관돼 있다. 보헤미아의 왕관, 보주, 홀, 대관식의 옷, 황금으로 만든 성유물함 십자가, 성 바츨라프의 칼과 모자다.


비밀의 방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일부 관계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관광객은 아무리 찾아도 문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문에는 열쇠 구멍이 7개 있다. 열쇠는 체코의 최고 지도자 7명이 하나씩 나눠 갖고 있다. 대통령, 국무총리, 상원 의장, 하원 의장, 프라하 대주교, 성 비투스 대성당 주임사제, 프라하 시장이다.


평소에는 ‘대관식의 보물’ 진품을 볼 수 없다. 체코의 중요한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한 번씩 1월에 며칠 동안만 전시된다. 20세기 이후 120년 동안 개방 행사는 불과 아홉 번 열렸다. 가장 최근의 경우 2022년에 개최됐다. 보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체코 국민과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최소한 3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 다음에 언제 열릴지는 미리 알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생전에 관람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영 볼 기회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헤미아의 왕관이다. 체코의 전성기를 열었던 황제 카를 4세가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1347년에 만든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오래 된 왕관이다. 보헤미아 왕이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의 대관식은 체코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카를 4세는 왕관을 만들자마자 평소에 숭배했던 성 바츨라프에게 바친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이 왕관에는 ‘성 바츨라프의 왕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때부터 체코인들은 ‘왕관은 법적으로는 국가 소유이지만 영적으로는 성 바츨라프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카를 4세는 절대로 왕관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면서 영원한 유언 같은 명령도 남겼다. 왕관은 물론 모든 대관식용 보물은 오직 보헤미아 왕의 대관식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한마디 때문에 ‘왕관에는 성 바츨라프의 저주가 걸려 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왕관을 쓸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억지로 왕관을 머리에 얹을 경우 1년 이내에 죽는다는 것이다. 보헤미아 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저주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체코인은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체코를 점령했다. 점령군 사령관은 ‘철의 심장을 가진 사내’라는 영화의 주제가 됐던 ‘학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그와 여러 독일군 장성이 성바츨라프예배당에서 보헤미아 왕관을 살펴보는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하이드리히는 사진을 찍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1942년 6월 체코 저항군에게 암살당했다. 체코인들은 그가 보헤미아 왕관을 쓰고 비밀 대관식을 거행하는 바람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관 꼭대기에는 가시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질 때 머리에 썼던 가시나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왕관은 24K 순금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첨정석 44개, 에메랄드 30개, 사파이어 19개, 진주 20개, 루비 1개 등이 장식돼 있다. 총 무게는 2.475㎏이다. 왕관을 꾸미고 있는 보석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다. 당시의 수공예 기술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때 동서간 무역이 어떻게 이뤄졌으며,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역사적 증거물이다.


프라하의 여러 관광명소와 마찬가지로 성바츨라프예배당에도 유령이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는 성소에 유령이라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프라하에 유령이 나타나는 교회, 성당은 한두 곳이 아니다. 성비투스대성당의 유령은 다행히 성질이 고약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유령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일러주고 나라의 운명을 미리 알려주는 유령이다. 어떻게 보면 대성당을 지키는 집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20세기 말 벨벳혁명으로 체코에서 공산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직후 성비투스대성당은 소유권 분쟁에 휩싸였다. 


이곳은 원래 교회의 재산이었지만 공산정권은 체코 교회 1인자였던 요제프 베란 대주교를 가택연금한 뒤 전국의 모든 교회 건물 소유권을 국가로 이전했다. 억압의 시대에는 말도 못 하던 교회는 1992년 새 정부를 상대로 대성당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렇게 시작한 소송은 2010년까지 18년간 이어졌다.


14년 뒤인 2006년 지방법원은 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듬해 대법원은 거꾸로 국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교회는 헌법 소원을 제기하고 국제인권재판소에도 제소하기로 했다. 국내 문제가 국제적으로 비화되는 걸 창피하게 생각한 각계에서 중재에 나섰다. 압박에 못 이긴 바츨라프 클라우스 대통령과 도미니카 듀카 대주교는 결국 법적 분쟁을 이어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소유권은 현재처럼 국가가 갖기로 했다. 대신 ‘비밀의 방’ 열쇠를 가진 7명이 참가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대성당 관리, 이용 문제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길었던 대성당 소유권 분쟁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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