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비투스대성당에서 나와 출입문 안군 벽의 턱에 앉아 잠시 쉰다. 대성당 내부에는 정말 볼 것이 많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붐비고 폐쇄된 공간이다 보니 공기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의 많은 대성당이 다 비슷하다. 그래서 대성당을 한 바퀴 돌면 금세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곳을 관람한 뒤에는 맑은 공기를 쐬면서 잠시 쉬는 게 좋다.
엉덩이를 붙이고 고개를 들어 성당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반아치형 구조물인 플라잉 버트리스, 장식용 기둥, 작은 첨탑이 눈에 띈다. 지붕 아래에는 고딕 양식의 괴물 장식인 가고일(갸르구이)이 눈길을 끈다. 천장에 떨어지는 물이 고이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리게 하는 관개 시설이다.
가고일은 성비투스대성당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고딕 성당에 많이 이용된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가고일을 설치한 것은 ‘어둠의 힘’을 막으려는 뜻에서였다. 대성당에 접근하려는 악마는 성당 벽에 붙어 있는 가고일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게 중세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물론 다른 종교적 목적도 있었다. 성당에 오는 신도들에게 마음에 품은 사악한 생각을 모두 밖에 버리고 오라는 경고를 주는 것이다. 그래야 악으로 오염된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맑은 공기를 10여 분 마시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상쾌한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고 걸음을 옮긴다. 이제 성비투스대성당 정문을 구경하러 갈 차례다. 방금 정문으로 들어가서 대성당을 둘러봐 놓고 정문이라니 무슨 이야기이냐고?
방금 들어간 곳은 사실 성비투스대성당 정문이 아니다. 첨탑이 눈앞에서 올려다 보이는 곳은 대성당 서쪽이다. 대성당을 처음 지었을 째 정문, 즉 주 출입구는 이쪽이 아니었다. 대성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제3정원이 나오는데 대성당 정문은 이쪽에 달려 있다.
정문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제3정원에서 대성당을 바라보면 화려한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문이 보이는데 그것이 정문이다. 황금색으로 빛난다고 해서 문의 이름도 ‘황금의 문’이다. 이 문은 1370년에 만들어 700년 가까이 된 탓에 너무 낡아 손상될 위험이 있어 지금은 중요한 행사 때말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체코어로 ‘즐라타 브라나’인 ‘황금의 문’은 대성당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된 부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 위에는 예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내용을 담은 ‘최후의 심판’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옆에는 보헤미아의 전성기를 열었던 14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와 그의 아내가 무릎을 꿇고 있다. 모자이크는 유리조각 100만 개와 30가지 이상 색깔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황금의 문’ 옆에는 높이가 95m로 대성당에서 가장 높은 ‘남쪽 탑’이 서 있다. 특이하게도 남쪽 탑에는 정면과 측면에 시계 두 개가 붙어 있다. 하나는 ‘시(時)’를, 다른 하나는 ‘분(分)’을 나타낸다.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시침 두 개를 시계 하나에 다는 게 기술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이렇게 나눠 따로 설치한 것이었다.
아래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탑 꼭대기에는 3.5m 크기로 도금한 ‘보헤미아의 사자’ 조각이 붙어 있다. 체코의 국가 문장에도 등장하고 스트라호프수도원 정원에도 서 있는 사자다. 모험을 떠난 보헤미아의 전설적인 왕 브룬츠비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데리고 온 사자다. 전설에 따르면 사자는 새끼 열두 마리를 데리고 비셰흐라트 언덕 지하에서 보물을 지키고 있다. 해마다 여러 차례 자정에 세상으로 나와 체코에 어려움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만약 체코가 위기에 빠지면 사자와 새끼들이 일시에 달려 나와 적을 산산조각 낸다.
체코에는 보헤미아의 사자 외에 바츨라프광장의 바츨라프동상 등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영웅에 얽힌 전설이 많다. 이런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하나다. 체코는 과거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해 큰 고난을 겪었다. 체코인들은 이런 고난에서 나라를 구해줄 영웅을 갈구해 왔다는 게 전설의 진실이다.
남쪽 탑에는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 올라가면 프라하성뿐 아니라 주변 경치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스트라호프수도원에서 바라본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도 있다. 아쉬운 점은 프라하성 입장권과는 별도로 탑 이용권을 사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망이 좋다고 하니 일단 올라가 보기로 한다. 교회의 탑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에서 승강기는 없다. 수백 개 계단을 일일이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힘이 들기는 하지만 전망이 훌륭하고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하니 안 가 볼 수 없다.
1층 안내소 직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성 주변과 시내 풍경은 매우 멋지다. 성미쿨라시교회의 높은 첨탑은 물론 블타바강과 카를교도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두 개의 첨탑, 즉 틴성모마리아교회의 ‘아담과 이브’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찾아갈 이유가 없는 프라하 북부 지역도 한눈에 들어온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은 물론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길도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은 햇살이 눈부신 낮이라서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너무 밝아 일부 방향의 촬영을 방해하지만 오전에 올라올 경우 정말 선명하고 맑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전망대에서는 프라하성 내부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방금 올라온 제3정원과 구왕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딕식 건축물의 특징인 플라잉-버트레스의 구조와 성이르지(성 조지)교회가 블타바강을 배경으로 우뚝 선 모습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아래에서는 까마득하게 보이던 성비투스대성당 첨탑의 끝부분도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눈앞에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프라하성에서 가장 넓은 공터인 제3정원이다. 성비투스대성당을 관람하고 나온 관광객은 이곳에서 대성당의 전경을 눈이나 사진에 담으려고 분주히 오간다.
제3정원을 사이에 놓고 대성당 건너편에는 길쭉한 건축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체코어로는 스타리 크랄로프스키 팔락, 즉 구왕궁이다. 성비투스대성당이 체코 종교의 중심지라면 구왕궁은 세속의 중심지다. 대성당은 세상의 지배자인 신이 사는 성전이고 구왕궁은 체코의 지도자인 왕이 사는 궁전이다.
그런데 대성당을 둘러본 뒤 구왕궁으로 시선을 돌리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평범하게 보여 큰 감흥을 얻지 못한다. 자칫하면 “애걔!”하며 탄식할지도 모른다. 미리 알고 가지 않으면 ‘이곳은 무엇이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아예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구왕궁이 돋보이지 않는 것은 대성당의 높은 첨탑이 발휘하는 광채가 워낙 눈부신 탓이다. 성 안에서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이나 카를교 등에서 프라하성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은 첨탑 두 개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대성당이다. 그곳을 빙 둘러싸고 있는 궁전은 그냥 성벽처럼 보일 뿐이다.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궁전, 독일 뮌헨 님펜부르크궁전, 스페인 마드리드 팔라시오레알, 오스트리아 빈 쇤브룬궁전 등 유럽의 유명한 궁전은 공통적으로 넓은 정원을 가진 단정한 형태의 건축물로 이뤄져 있다. 궁전 부지 안에 뾰족한 첨탑이나 종탑이 서 있는 대형 교회나 성당을 두고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이하게도 프라하성에만 왕궁과 대성당이 마주 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프라하성 구왕궁을 쉽게 또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대성당을 등지고 서서 구왕궁을 자세히 차분하게 살펴보면 꽤 아름답고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넓은 정원만 없을 뿐이지 건물 자체는 유럽의 어느 궁전과 비교해보아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유럽의 여러 궁전들처럼 대성당과 별개의 장소에 별도로 지었다면 엄청날 정도로 웅장하게 보이는 건물이다.
구왕궁은 건설 당시에는 보헤미아에서 가장 넓은 세속적 공간이었다는 브와디스와프 홀 외에 모든 성인의 교회, 옛 의회, 루드비히 동 등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도 1층에는 프라하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카를 4세가 살던 공간이 보존돼 있으며, 그 아래에는 12세기 국왕 소비에스와프의 옥좌가 설치됐던 방이 남아 있다.
구왕궁은 20세기 들어 체코가 독립한 뒤로는 체코 대통령의 집무실로 변했다. 1918년 제1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선포됐을 때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민족주의자 토마슈 마사릭이 이곳을 집무실로 골랐다.
제3정원 쪽에 있는 입구를 통해 구왕궁으로 들어간다. 가장 먼저 브와디스와프 홀이 나타난다. 길이가 62m, 폭이 16m에 이를 정도로 넓고 웅장한 공간이다. 아치 모양인 천장 높이는 최고 13m다. 큼지막해서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은 윗부분이 둥근 르네상스식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중세에는 프라하에서 가장 넓은 실내 공간이었다. 그래서 국왕 대관식, 축하연 등 각종 파티가 열렸다. 심지어 기사가 말을 타고 창 실력을 겨루는 실내 마상대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사정은 20세기 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은 각종 국가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사용됐다. 공산정권 때에는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이 열렸다. 1998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취임식을 연 곳도 여기였다.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의 상업적 이벤트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019년 루이비통은 1550만 코루나(약 9억 원)를 내고 홀을 빌려 신제품 전시회를 열었다.
브와디스와프 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루드비히 동이 나온다. 이곳은 보헤미아와 프라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17세기 이른바 ‘창문 투척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 가톨릭을 신봉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몰아내기로 작정하고 황제의 이름으로 보헤미아를 통치할 대표단을 프라하성에 보냈다. 황제의 통치는 그동안 보장됐던 자치권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한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은 대표단을 루드비히 동으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사건 때문에 30년 전쟁이 시작됐고, 전쟁에서 패한 보헤미아는 가톨릭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보헤미아 인구의 75~80%가 프로테스탄트였는데, 대다수는 종교를 버리고 보헤미아에서 살기보다는 다른 나라로 탈출하는 걸 선택했다. 사회를 움직이던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체코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지금도 체코 인구는 고작 1천만 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보헤미아는 이후 인재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유럽의 선진국이었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전통 귀족은 몰락하고 체코어도 퇴색했다. 대신 독일어를 사용하는 귀족과 독일인이 득세했다. 체코가 19세기 말까지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백산전투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체코인은 역사의 쇠퇴기였던 17~18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프라하성 구왕궁에 가면 루도비히 동의 한 창문 앞에 안내판이 선 걸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관광객들은 안내판을 읽은 뒤 창문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곳은 1618년 창문 투척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실제로 가서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로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