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프라하성에서 가장 좁으면서 가장 이색적인 공간에 갈 차례다. 체코어로 ‘즐라타 울리츠카’, 영어로 ‘골든 레인’, 우리말로 황금소로로 번역되는 곳이다. 이름에 소로가 붙었으니 얼마나 작고 좁은 곳인지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황금소로로 가는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구왕궁에서 나와 성이르지(조지)성당을 둘러본 뒤 가장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는 곳으로 따라가면 된다.
차단기를 제치고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환상적인 장면이 나타난다. 작고 낡았지만 아주 밝은 색깔의 집들이 성벽 아래 골목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마치 동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나오는 조그마한 집을 여러 채 늘어놓은 것 같다.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총각 난쟁이가 금세라도 문을 벌컥 열고 나와 두 손을 벌리면서 환하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설 공주가 굽는 맛있는 빵 냄새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잠시 둘러보기만 해도 머릿속에서 동화가 툭툭 튀어나오게 만들 것처럼 신기하고 독특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봇물이 터진 듯 관광객이 끊임없이 밀려든다. 워낙 독특한 공간인 데다 유명한 이야깃거리가 흘러넘치는 덕분에 인기는 늘 폭발적이다. 특히 어린이들이 여기를 좋아한다. 인기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의 집처럼 건물이 낮고 작아서 창문을 통해 안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어른도 나이를 까먹고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동화의 무대처럼 보이는 장소인 만큼 이곳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진다. 프라하 사람들은 이곳에 도깨비나 요정이 살아왔다고 믿는다. 황금소로는 프라하성이 만들어지기 전 이교도였던 슬라브 족이 살던 때부터 도깨비, 요정의 터전이었다.
황금소로를 걷다 보면 낮에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도깨비, 요정이 관광객이 찾지 않는 밤이 되는 골목길로 몰려나와 시끌벅적하게 소동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좁은 공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여기보다 넓고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공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황금소로가 자리를 잡은 공간은 16세기 말 프라하성 북쪽에 성벽을 보강한 덕분에 생겨났다. 성을 지키던 궁수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에게 이곳에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빨간 제복을 입어 ‘빨간 궁수’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황제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대신 국가에서 집을 지어주지는 않았고 궁수들이 직접 공사비를 내야 했다. 문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니 궁수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인 모양이다.
황금소로의 집들은 너무 작아서 평범한 사람보다는 난장이에게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작게 지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집을 지을 때 궁수는 모두 24명이었다. 이들이 가족과 함께 살 집을 다 짓기에는 황금소로의 부지가 너무 좁았다. 그래서 궁수들은 마치 난장이나 요정이 사는 곳처럼 집을 작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적 필요성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성에 황제나 왕이 살지 않게 되자 황금소로에 살던 시종이나 시녀도 사라졌다. 그들이 살던 집에는 도시에서 거처를 구하지 못한 빈민이 세를 얻어 들어왔다. 시내에서 먼데다 집이 낡고 좁아 집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돈이 궁했던 유명 예술인도 더러 올라가 살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는 1929년 이곳에서 거주했다. 그가 살던 집은 허물어져 없어졌다. 12번 집은 독일 나치의 눈을 피해 수천 개의 체코 영화를 구해낸 역사학자 요제프 카즈다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카즈다 집의 복도에는 영화 필름이 수북이 쌓여 있다.
21세기 현대 문학의 거장인 프란츠 카프카와 그의 여동생 오틀라도 이곳에서 잠시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소설집 <시골의사>에 실린 단편 작품 대부분과 다른 단편 ‘성’을 여기에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카프카가 살았던 집은 아직도 잘 보존돼 있다. 지금은 카프카 관련 서적을 포함해 각종 책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이용된다. 집의 번호는 ‘22’다. 이곳이 카프카와 관련성을 가졌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아주 친절한 여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카프카 이야기부터 책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들려준다. 물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책 한 권 정도는 사는 게 좋다. 집에 체코어로 된 카프카 책을 한 권 꽂아두면 두고두고 여행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14번 집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몰락을 예견한 ‘가짜 점쟁이’ 마틸다 프루소바가 살던 곳이었다. 그녀의 집을 포함해 상점으로 이용되지 않는 집의 방은 유리로 가려져 있다. 그래서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프루소바의 집에는 방 한쪽 탁자에 카드 세 벌이 놓여 있다.
황금소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벨벳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정부가 1995년부터 리모델링 작업을 단계적으로 진행한 덕분이었다. 오늘날의 동화 같은 황금소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집 중에서 16세기에 만들어진 원래 모습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은 20번 집이다.
카프카가 특별하다고 묘사했던 골목은 이제 책과 음악, 공예품을 파는 가게로 변했다. 입장료를 받아도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다투는 인기 있는 장소가 됐다. 상점으로 바뀐 집은 정말 작아서 쇼핑하기에 너무 불편하다. 사람으로 붐벼 발 디딜 틈도 없는 곳이다. 그래도 여기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황금소로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에는 세 개의 탑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황금소로는 세 탑 사이에 끼어 있는 골목길인 셈이다. 입구 쪽에 있는 것은 ‘비야 비에슈’, 즉 하얀 탑이다. 반대쪽 끝부분에 있는 것은 ‘달리보르카’, 즉 달리보르 탑과 성의 출구인 ‘체르나 비에슈’, 즉 검은 탑이다. 셋 중에서 프라하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달리보르 탑이다. 각종 고문 도구가 전시돼 있는 이 탑에는 중세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전설이 담겨 있다.
황금소로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달리보르 탑을 지나가야 한다. 그래서 싫더라도 각종 고문 도구나 고문실을 볼 수밖에 없다. 이곳이 달리보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악독한 성주를 살해한 의로운 기사 달리보르 덕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다.
달리보르 탑은 원래는 성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포탑이었다. 나중에 죄수, 반역자를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달리보르카 탑의 입구는 해골과 강철 케이지로 장식돼 있다. 안에 있는 방에는 중세 시대 고문 도구가 비치돼 있다. 이것들은 실제 과거에 존재했던 게 아니라 최근 가져다 놓은 것이다.
지금 달리보르카 탑에 들어가면 과거 감방을 수리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아주 좁아서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지만 과거 고문실 및 감방으로 사용될 때보다는 훨씬 넓다고 한다. 당시 감방은 얼마나 작았던지 눕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죄수에게는 탑의 지하에 갇히는 더 잔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 벽의 두께는 320cm나 됐다. 거기에 들어가고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마루에 있는 구멍뿐이었다. 대들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죄수는 그곳에 갇혀 굶어죽곤 했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 결과 탑의 지하에서 해골이 발견됐다. 지금도 그 지하 감방을 볼 수 있다.
달리보르 탑을 끝으로 프라하성에서 나가야 할 시간이다. 황금소로에서 나와 로비코비츠궁전을 지난다. 이 궁전은 프라하성 출구 부분인 유일주스카 거리에 있는 건물이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면 길게 늘어선 궁전의 가운데 부분에 있는 아주 연한 초록색 건물이다.
로비코비츠궁전은 18세기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가 말년을 보낸 장소다. 이곳에는 당시 ‘귀족 여성을 위한 왕립 재단’ 본부가 있었다. 여러 이유로 가난해진 프라하 귀족 여성이 정부 지원을 받아 이곳에 모여 살았다. 24세 이상 귀족 여성 30명이 궁전 1~2층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유일주스카 거리 끝에는 출구인 체르나 베즈, 즉 검은 탑이 보인다. 이곳을 나가면 프라하성의 끝이다. 대부분 관람객은 네루도바거리로 올라와서 이곳을 통해 내려간다. 내리막길은 계단으로 만들어져 지친 다리로도 걷는 게 힘들지 않다.
계단을 걷기 전에 오른쪽 전망대에서는 시원한 프라하 전경을 볼 수 있다. 흐라드차니광장 그리고 성비투스대성당의 남쪽 탑 전망대에서 본 전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풍경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2012년에 출간한 <프라하의 겨울-기억과 전쟁의 사적 이야기>라는 책에 이곳에서 바라본 풍광을 기록했다. 그녀는 체코 프라하 출신 유대인이었다. 열한 살 때 외교관이었던 유대인 아버지가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온 가족을 데리고 망명을 가는 바람에 미국인이 됐다.
‘프라하 언덕에는 1천 년 역사를 가진 성이 있다. 창문 밖으로는 도금한 쿠폴라와 바로크식 탑, 슬레이트 지붕, 신비한 첨탑의 숲이 보인다. 넓게 굽이치는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돌다리도 보인다.’
검은 탑 앞의 샛길 전망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올브라이트가 묘사한 풍경을 이해할 수 있다. 블타바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프라하 시내는 그녀가 설명한 모습 그대로다.
정식 명칭이 ‘옛 성 샛길’인 시내 방향 샛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까만 동상이다. 20세기 중반 체코 최고 가수이자 작곡자였으며 민족주의자였던 카렐 헤슬러의 동상이다. 그는 ‘프라하는 누구의 땅인가’ ‘황금의 조국’ ‘자유는 자유’ ‘체코의 노래’ 등을 불렀다.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자 그는 비판 목소리를 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애국적이고 반독일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이 때문에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돼 강제수용소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카렐 헤슬러의 생애는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됐다. 물론 공산정권 시대가 아니라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민주정부 시대였다. 그를 기념하자는 목소리는 21세기 들어서도 높아졌고, 결국 2009년 샛길에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귀착됐다. 이곳에 그의 동상을 건설한 것은 그의 노래 중에 ‘옛 성 샛길을 따라’라는 서정적인 곡이 있기 때문이다.
동상 앞에 잠시 서서 유튜브에 ‘옛 성 샛길을 따라’라는 노래를 ‘po starých zámeckých schodech’라는 체코어로 입력한다.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기타 같은 체코 전통악기 ‘허디 거디’를 연주하는 가수가 나타난다. 그리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옛 성 계단을 따라/ 돌계단을 따라/ 매일 저녁 처녀는 걷는다네/ 소년의 손을 잡고/ 내 가슴은 뛴다네’
프라하성에서 내려와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휴식처는 지하철 말로스트란스카역 안뜰이다. 한쪽 모퉁이에 벤치가 나란히 놓였다. 맞은편에는 붉은 지붕에 미색 벽 건물이 보인다. 전날 돌아본 발트슈타인궁전의 일부분이다. 원래는 궁전에서 승마장으로 쓰였던 곳인데 벨벳혁명 이후 체코 상원 건물 중 일부로 바뀌었다. 그러다 2000년 상원이 무상 임대 계약을 맺어 국립미술관에 무기한으로 빌려줬다.
벤치에 앉아 음료수와 과일을 꺼낸 뒤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니 ‘무하 전시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미 너무 지쳐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다. 그냥 벤치에서 건물 외벽만 바라보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긴 여행을 이어 갈 수 없다. 말로스트란스케역 안뜰에서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쉰다. 그만큼 지쳤다는 이야기다. 많이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뒤에는 푹 쉬어야 한다. 한참 뒤에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마지막 행선지는 발트슈타인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프카박물관이다. 지쳤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건물만 살펴보고 정원에 있는 조각만 둘러보기로 했다.
카프카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프라하에서 그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의 작품에 담긴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때 시간이 부족하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카프카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도는 데에는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니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정은 아니다.
카프카박물관은 카프카의 인생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그의 개인사는 물론 인간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일기, 사진 그리고 이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의 유대인 뿌리에서부터 지적 생활, 그리고 여성 관계와 여행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문학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카프카의 작품을 완벽하게 분석하거나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게 사실이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카프카박물관에서는 ‘변신’에 담겨 있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등골을 써늘하게 만드는 박물관의 어두운 분위기는 카프카의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카프카박물관을 찾은 관광객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는 모습의 두 남자다. ‘바바리 맨’ 같은 성 추행범이 아니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두 남자는 현대 체코의 최고 조각가로 평가받는 다빗 체르니의 조각 작품이다.
제목도 특이한 모습에 어울리게 ‘오줌 싸는 사람들’이다. 체르니의 조각상은 두 남자가 성기를 붙잡고 서로를 향해 오줌을 갈겨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얼마나 독특하고 재미있는 조각상인지 관광객들은 조각상을 보고 깔깔 웃거나 연거푸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바쁘다. 한 아이가 앞으로 나가더니 갑자기 조각상의 ‘고추’를 붙잡고 흔든다. 이 모습을 보고 관광객들은 다시 깔깔, 낄낄 웃는다.
두 남자의 발아래에는 체코 지도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있다. 두 남자의 몸에는 기계장치가 설치돼 있어 엉덩이와 성기를 움직일 수 있다. 관광객이 SNS를 통해 문자를 보내면 기계를 움직여 오줌으로 연못에 글자를 쓸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연못이 체코 지도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오줌을 싼다는 것은 모욕을 준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국의 지도에 오줌을 싸는 조각을 만들 수 있을까? 국가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체르니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해석은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서 내려진 것이었다.
오줌을 싸는 두 남자는 ‘진절머리 나는 체코의 현대 정치인과 자산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자유화의 물결이 밀려왔을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땅과 자산을 불려 부자가 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체코라는 땅 모양 연못에 오줌을 싸는 사람 모양의 조각상을 만든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이런 정치인과 자산가들을 비판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체르니는 여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아 이 해석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오줌을 싸는 두 남자를 보고 있는데 한 꼬마가 앞으로 나가더니 두 조각 중 한 조각의 '고추'를 덥석 잡는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는 것도 아랑곳않고 꼬마는 '고추'를 이리저리 쓰다듬는다. 그에게는 '고추'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추'를 쓰다듬는 게 무슨 행동인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신기하게 생긴 장난감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에 따라 나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같은 물건이 주는 의미는 다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