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Sep 27. 2024

프라하 셋째 날(1) 바츨라프에서 하벨까지


숙소에서 나와 공화국광장, 즉 나메스티 레푸블리키로 간다. 첫날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프라하 중앙역에 내려 호텔로 갈 때 지나간 곳이다. 밤마다 나와 현지인이 즐겨 찾는 간식을 맛본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를 잠시 스치듯 지나가는 여행객은 잘 안 가는 곳이지만 공화국광장은 제법 볼 게 많은 곳이다. 프라하의 대표적 쇼핑몰인 코트바백화점과 팔라디움이 있고, 괜찮은 식당도 꽤 많다. 현지식당이 귀찮으면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음식을 사 먹어도 된다.



공화국 광장에서 시민회관과 히베르니아 극장 사이를 지난다. 나 프르지코프예 거리로 들어가기 직전에 관광객에게는 익숙한 화약탑이 나온다. 화약탑은 과거 구시가지를 에워싼 성벽의 여러 출입문 중 하나였다.


구시가지 성벽은 13세기 몽골 침략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오늘날 유대인 지구의 아네슈카 수도원 인근에서 시작했고, 레볼루차니 거리~나 프르지코프예 거리~나로드니 거리를 거쳐 블타바 강변을 따라 가다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지도를 보면 오늘 날 레기온 다리~화약탑~슈테파니쿠프 다리~블타바 강변을 연결하는 비뚤한 사각형이었다.


성벽에는 출입문이 일곱 개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문은 레볼루차니 거리와 나 프르지코예페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화약탑이다. 지금은 화약탑으로 불리지만 옛날에는 성벽을 드나들던 문이었다.



구시가지를 에워싼 성벽은 19세기에 허물어지고 성벽 주변을 흐르던 해자는 메워졌다. 그 자리에는 도로가 생겼다. ‘나 프르지코프예’라는 이름의 뜻이 ‘해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 거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화약탑에서 5~6분 정도만 걸으면 지하철 1, 2호선이 교차하는 무스테크 역이 나온다. 이 역은 바츨라프광장의 북서쪽 시작점이다. 여기서 시작해 남동쪽 국립박물관까지가 바츨라프광장이다. 


화약탑에서 무스테크 역까지는 ‘해자의 거리’라는 뜻인 나 프르지코프예 거리이고, 무스테크 역에서부터 국립극장까지는 ‘국립 거리’라는 뜻인 나로드니 거리다. 두 거리는 프라하에서 가장 현대적인 냄새를 진하게 맡을 수 있는 곳이다. 



두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 넓은 공간이 하루 종일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에 ‘절대 잠들지 않는 광장’으로도 불리는 바츨라프광장이다. 사실 이곳에 처음 가면 잠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이름은 광장이지만 이곳이 정말 광장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대충 살펴보면 그냥 넓은 ‘대로’로 보일 뿐이다. 다른 광장처럼 둥글거나 정사각형이 아니라 길이 750m, 폭 60m의 긴 장방형이다.  


바츨라프광장은 쇼핑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이리저리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국내외 회사의 지점이나 고급 상점, 호텔, 카지노, 식당, 클럽, 환전소, 노점상 등이 즐비하다. 프라하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붐비는 곳 가운데 하나다. 프라하 중앙역 인근에 있는 곳이니 만큼 프라하 여행의 첫 출발점으로 삼기에도 적당하다. 


바츨라프광장이 생긴 것은 14세기 때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재임 1346~78년)가 구시가지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1348년 신시가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게 계기였다. 이 때문에 시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은 공터가 많이 생겼다.



넓은 공터를 중심으로 주변에 각종 저택은 물론 작업장, 맥주 양조장, 수공예품 가게 등이 주변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말 거래가 많이 이뤄져 처음에는 말 시장이라고 불렀다. 체코어로는 콘스키 트르흐였다. 


나중에는 1년 내내 시장이 열렸다. 말뿐 아니라 마구류와 무기류, 의류도 팔았다. 물론 시장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지금 무스테크 지하철 역이 있는 곳의 근처에는 풍차가 설치된 연못도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있었고, 분수 세 개가 건설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바츨라프광장은 말시장으로 불렸다. 이름이 바뀐 것은 1848년 3월이었다. 새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인 언론인 겸 작가 카렐 하블리첵 보로브스키였다. 당시에는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 바츨라프 광장에서 수시로 열렸다. 보로브스키는 어느 날 한 모임에서 광장의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10세기에 보헤미아를 다스린 국왕이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성인인 바츨라프의 이름을 붙이자는 것이었다. 모임 참석자들은 그의 제안을 듣고 모두 박수를 쳤다. 체코의 주권과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광장의 이름으로 보헤미아의 수호성인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이 1920년대에는 트라푸슈광장, 트라포광장 또는 트라팔가광장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트라팔가는 영국 런던에 트라팔가광장 이름을 베낀 것이었다. 당시 체코 젊은 세대는 영국과 미국 문화에 심취했다. 영국인들에게 생활은 물론 정신적 중심지인 트라팔가광장처럼 바츨라프광장도 똑같은 역할을 한고 생각해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바츨라프광장이 오늘날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체코를 강타한 민족주의의 거센 돌풍 덕분이었다. 민족주의에 심취한 체코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정신을 담은 ‘4대 건축물’ 건립을 추진하고 나섰다.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 루돌피눔, 장식예술박물관이었다. 4대 건축물 중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1881년 나로드니 거리 끝에 자리를 잡은 국립극장이었다. 그곳에서 출발한 민족주의 건축의 바람은 바츨라프광장으로 옮겨갔다. 바로 국립박물관, 즉 나로드니 무제움이었다.


국립박물관은 긴 대로처럼 펼쳐진 바츨라프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본다 이곳은 자연사 및 체코 역사를 담은 많은 유물을 전시한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주로 주목하는 것은 국립박물관 내부의 전시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다. 



국립박물관은 최대한 웅장하게, 크게 만들어졌다. 폭은 100m, 높이는 70m로 프라하에서 가장 큰 건물 가운데 하나다. 크게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바츨라프광장을 훌륭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는 배경으로 삼자는 게 당시 체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사실 각종 유물을 보관할 방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물관을 얼마나 크게 만들었던지 공간을 다 활용하지 못해 처음에는 빈 방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츨라프광장에는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었다. 1876년에 네 줄로 플라타너스 나무를 심은 게 그늘이 생긴 계기였다. 나무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사하고 말았다. 프라하시청은 1890년대에 인도를 따라 라임 나무를 새로 심었다. 지금은 오동나무 160여 그루가 심어져 있고, 철마다 다른 종류의 꽃을 피우는 꽃밭도 조성됐다.


1913년에는 요제프 바츨라프 미슬벡이 만든 새로운 성바츨라프기마상이 국립박물관 앞에 설치됐다. 조각상에는 성 바츨라프의 어머니인 성 루드밀라, 성 아네슈카, 성 프로코프, 성 아달베르트가 함께 있다. 조각상에는 ‘성 바츨라프, 체코의 왕이시여! 훗날 우리가 죽게 내버려두지 마소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바츨라프기마상은 원래 국립박물관 입구를 장식하는 조각으로 국립박물관 경사로에 설치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갑론을박 끝에 기념물 설치 위치는 바츨라프광장 남쪽 끝인 국립박물관 바로 앞으로 바뀌었다. 체코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건물인 국립박물관 앞에 동상을 세워 바츨라프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게 함으로써 체코를 지키는 수호성인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구시가지광장이 구시가지를 상징하는 곳이라면 바츨라프광장은 신시가지를 상징하는 장소다. 구시가지광장이 외국 관광객의 집결지라면 바츨라프광장은 프라하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구시가지광장이 체코와 프라하의 옛 역사를 담은 장소라면 바츨라프광장은 근현대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체코 독립 선언의 현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0월 28일 바츨라프광장의 성바츨라프동상 앞에서 독립선언문 낭독 행사가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프라하의 봉기’라는 반 나치 무장 투쟁이 벌어진 곳도 여기였다.



바츨라프광장은 체코 현대사의 비극도 담고 있다. 1968년 8월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20만 명과 탱크 2천300대, 전투기 700대가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 위해 체코로 쳐들어갔다. 프라하 시내를 행진한 소련군은 바츨라프광장에 주둔했다. 국립박물관에는 당시 소련군 탱크가 발사한 총탄의 흔적이 남아 았다. 국립박물관 앞에 진주한 소련군 탱크를 담은 사진은 소련의 침공을 상징하는 역사적 자료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여러 역사적 사건 중에서도 체코인의 머리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두 사건은 1969년 얀 팔라흐의 분신자살과 그로부터 20년 뒤인 1989년 벨벳혁명이었다.


얀 팔라흐는 카를대학교 예술학부 학생이었다. 그는 소련의 침공 이듬해인 1969년 1월 16일 오후 2시 30분 바츨라프광장의 국립박물관 앞 분수대에서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가 원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였다.



얀 팔라흐는 체코인의 마음에 영원한 민주주의 투사로 새겨졌다. 그가 분신해 쓰러졌던 바츨라프광장의 국립박물관 앞에는 십자가 모양 기념비가 바닥에 새겨졌다. 광장 중간 지점에는 그의 얼굴을 담은 석판이 설치됐다. 석판 앞에는 프라하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싱싱한 꽃이 1년 내내 향기를 흩날린다.


바츨라프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광장 중간에 자리를 잠은 멜란트리히 건물이다. 1898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출판사로 이용됐다. 공산 정권 시절에는 공산당 기관지나 각종 선전문을 인쇄하는 시설로 활용됐다. 


이곳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벨벳혁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9년 11월 23일 시위 덕분이었다. 이날 바츨라프광장에 반정부 시위대 30만 명이 모였다. 이날 멜란트리히 건물 발코니에 시위대가 기다리던 인물이 연설자로 나섰다. 반체제 작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이었다. 여러 차례 수감당하거나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난에 시달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그가 대중 앞에서 연설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직접 연설하는 모습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시민 포럼’ 대표로 연설한 하벨은 ‘시민 포럼 선언’을 낭독했다. 이 선언을 통해 시민 포럼은 공산정권과 협상할 수 있으며 공산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닷새 뒤인 11월 28일 공산당의 구스타프 후삭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40년 간 이어진 공산당 일당독재는 막을 내렸다. 한 달 뒤인 12월 29일 공산당원 일색이던 국회는 프라하성에서 선거를 실시해 하벨을 공산당 집권 이래 첫 비공산당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마침내 프라하에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공산정권이 몰락하고 자본주의의 바람이 불어오자 바츨라프광장은 교통량 증가, 관광객 증가, 광고시설 증가, 건물 재건축 증가라는 새로운 현상에 시달리게 됐다. 대부분 건물은 원래의 모양을 간직한 채 새로 지어졌지만, 완전히 현대식으로 변모한 건물도 상당수였다. 이 때문에 건축계는 물론 프라하 곳곳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해마다 가을이나 겨울에 프라하 여행을 떠나면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시작해 1989년에 완성된 체코 민주화의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벨벳혁명 기념행사와 하벨 전 대통령 추모행사가 연이어 펼쳐진다. 


먼저 체코의 국경일인 11월 17일에는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의 36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전국적인 축제다. 프라하에서는 매년 수만 명이 바츨라프광장에 모여 혁명의 기억을 되새긴다. 혁명 초창기에 전투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나로드니 거리에 있는 ‘벨벳혁명 기념물’ 앞에서는 기념식이 거행된다. 2016년부터는 해마다 바츨라프광장에서 ‘자유 축제’가 열린다. 다양한 문화 축제와 음악 콘서트가 펼쳐지는 행사다. 



벨벳혁명 기념행사가 끝나고 한 달 뒤에는 하벨 추모행사가 열린다. 그는 두 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조국에 민주화를 기틀을 다진 뒤 2011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바츨라프광장을 비롯해 프라하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사람들은 하벨과 관련된 장소라면 어디든 꽃, 심장 모양 장식을 가져다놓고 촛불을 밝힌다.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는 하벨이 생전에 남긴 책에서 철학적 의미를 가진 문구를 뽑아내 읽는 낭송 이벤트다. 많은 사람이 바츨라프광장에 모여 전문 낭송가가 들려주는 하벨의 명문을 들으면서 그를 추모한다. 


하벨 추모행사가 끝나면 이제 어둡고 슬펐던 과거의 시간은 지나가고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이 다가온다. 바츨라프광장과 구시가지광장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차려진다. 자원봉사자들과 정치인들이 두 광장에서 나눠주는 따뜻한 소고기 죽 한 그릇과 함께 프라하의 아름다운 겨울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죽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곧 다가올 프라하의 새 봄을 기다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