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광장의 무스테크 역에서 국립박물관을 마주보는 자세로 섰을 때 오른쪽으로 가면 나드로니 거리가 시작된다. 정확한 거리 시작점은 버거킹 가게가 있는 르지유나 거리를 지나면 나타나는 융만광장이다.
융만광장에는 의자에 앉은 사람이 펜을 든 모습의 동상이 보인다. 동상 주인공은 19세기 초 민족주의를 이끌었던 시인이자 언어학자였던 요제프 융만이다. 그는 요제프 도브로스키와 함께 현대 체코어의 창시자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체코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프라하 현지 주민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은 융만 동상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동상의 유일한 쓰임새는 동상 주변을 둘러싼 화단 난간에 있다. 현지인은 물론 여행을 하다 지친 외국인 관광객은 모두 화단 난간에 앉아 잠시 쉬면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융만 동상 뒤에는 노란색 건물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상업적 건물 같지만 건물 가운데로 난 출입구로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곳은 14세기에 처음 짓기 시작해 17세기에 완성한 ‘눈의성모마리아교회’다.
‘눈의성모마리아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프라하 최고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하나는 34m에 이르는 천장 높이다. 프라하의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높다. 놀랍게도 처음에는 이보다 더 높게 지으려고 했지만 예산 등의 문제 때문에 규모를 줄인 게 이 정도라고 한다.
눈의성모마리아교회를 처음 지은 사람은 14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였다. 그는 대관식을 거행한 다음날인 1347년 9월 3일 교회 건설을 시작했다. 후세 국왕의 대관식 축하 행사를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규모, 높이에서 프라하성 성비투스대성당에 이어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훌륭한 교회를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 후스 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중단됐다. 교회 공사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7세기 맨발의프란체스코수도회가 루돌프 2세 황제로부터 교회 건물을 넘겨받은 이후였다. 수도회는 기존 교회에 르네상스식 천장을 만들어 붙이고 정면도 새로 건설해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었다.
상업용 건물로 보이는 출입구로 들어가면 아담한 규모의 정원이 나타난다. 큰 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섰고, 나무 아래에는 편하게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였다. 정면으로는 교회가 나타난다. 교회 출입문 바로 앞에는 머리에 별 다섯 개가 빛나는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이 보인다. 교회 정문 위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가 붙었다. 성모 마리아의 파란색 옷이 황금색 배경과 대조를 이뤄 눈에 띈다.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다. 안에 들어가 보면 아담하다는 느낌이 든다. 천장은 프라하 성 구왕궁에 있는 브와디스와프 홀과 똑같은 양식이다.
교회를 잠시 둘러보고 나와 왼쪽 건물 아래 통로로 지나간다. 이곳은 맨발의프란체스코수도원 정원으로 사용됐던 ‘프란체스코정원’이다. 바츨라프광장 쪽에서도 들어올 수 있지만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려면 교회 쪽에서 들어가는 게 좋다. 정원이 생긴 것은 카를 4세가 교회를 만들기 시작한 직후인 1348년이었다.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다 1950년대에 대중에게 개방됐는데, 바츨라프광장과 융만광장을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정원을 통로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정원은 조용하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평화로워진다. 주변에 각종 나무와 꽃이 심어져 정원 바깥과 분리된 덕에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한마디로 분주한 바츨라프광장 한쪽에 숨은 ‘도시의 오아시스’다.
교회 출입구로 다시 나와 교회 앞을 지나는 융그만노바 거리로 걸어간다. 융그만노바 거리는 ‘융만 거리’라는 뜻이다.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첫 번째 골목인 하르바토바 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이곳으로 가는 것은 프란츠 카프카를 만나기 위해서다. 물론 그는 1924년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카프카를 만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만나려는 카프카는 그의 인생, 작품만큼이나 신비한 조각이다. 21세기 체코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는 다빗 체르니가 만든 ‘프란츠 카프카-회전하는 머리’다.
하르바토바 거리 끝부분에는 조그마한 광장이 있다. 콰드리오 쇼핑센터를 장식하는 도시 공원이다. ‘프란츠 카프카-회전하는 머리’는 이 광장에 서 있다. 작품은 대리석 같은 돌을 깎아 만든 게 아니다. 대형 철판 42개를 엮어 프란츠 카프카의 머리처럼 만든 철강 작품이다.
‘프란츠 카프카-회전하는 머리’가 만들어진 것은 2014년 10월이었다. 카프카의 대형 두상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회전하는 머리’라고 불리지만, 카프카의 대표적 소설 ‘변신(metamorphosis)’에서 착안해 ‘METALmorphosis’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각 높이는 기단까지 포함해서 10.6m이며 총무게는 39t이다. 조각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판 42개로 구성됐다. 가장 가벼운 판은 190kg, 가장 무거운 판은 520kg이다. 판 42개의 총무게는 24t이다. 제작비 3천만 코루나는 콰드리오 쇼핑센터를 만든 CPI부동산그룹이 지원했다.
강철판 42개는 중앙 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회전한다. 1분마다 6번 움직인다. 그래서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모양이 계속 바뀐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무중력 상태에 빠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려는 게 체르니의 의도였다.
카프카의 두상은 예술과 현대기술의 연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층층이 쌓인 판이 제각각 회전하기 때문에 두상은 때로는 이상한 모양처럼 보인다. 카프카와 그의 작품의 난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판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세상일이라는 것은 무상한 데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카프카의 두상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쇼핑센터의 홍보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프란츠 카프카-회전하는 머리’가 회전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본 뒤 이번에는 나로드니 거리로 나간다. 아까 들어온 하르바토바 거리를 따라 계속 가면 건물이 앞을 가린다. 그 건물 아래 통로로 지나가면 큰 길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나로드니 거리다.
바츨라프광장 무스테크 역에서 시작해 블타바강의 레기이 다리까지 이어지는 거리다. 이 거리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의 모습은 구시가지나 말라 스트라나와는 꽤 다르다. 상당히 화려하면서 힘이 넘치는 역동적인 거리라는 게 느껴진다.
나로드니 거리는 19세기 말에 생긴 거리다. 프라하는 이 무렵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허물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처럼 도시 팽창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벽 주변에 있던 해자를 메워 거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나로드니 거리와 나 프르지코프예 거리였다.
새로 생긴 거리와 그 주변의 빈 공간은 프라하의 건축가들에게는 훌륭한 건물을 세울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19세기부터 네오 르네상스와 네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이 거리를 가득 메운 것은 이런 이유였다. 물론 아르 누보 양식의 저택도 많이 만들어졌다.
나로드니 거리가 ‘국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던 19세기 이곳에 국립극장이 생긴 덕분이었다. 체코 지식인들은 프랑스혁명 발생 이후인 19세기 중반부터 민족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체코어를 되살리는 게 그들의 첫 목표였다. 이를 위해 체코어로 된 연극과 오페라를 공연하고 체코 문화를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국립극장을 짓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국립극장 건설비는 국민 모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은 금화 320만 개에 이르렀다. 국립극장 건설 부지는 나로드니 거리의 끝부분이면서 레기이 다리 앞의 블타바강변 지역으로 정했다.
1868년에 열린 국립극장 초석 설치 행사를 시작으로 이어진 건설 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13년 뒤인 1881년 6월 11일이었다. 하지만 개관 두 달 만에 불이 나 국립극장은 잿더미로 변했다. 체코인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공사를 새로 시작했고, 복구공사는 2년여 만에 끝났고, 국립극장은 1883년 11월 18일 개관했다. 개관 및 재개관 기념작은 국민 작곡가 베드리지흐 스메타나의 ‘리부셰’였다.
국립극장은 체코인에게 국립극장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이곳은 민족적 자각이 낳은 성과물이었으며 체코가 독립과 밝은 미래로 나아가려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초석이었다. 또 급성장하는 부르주아의 부와 자신감을 보여주는 건축물이기도 했다.
국립극장 건설 덕분에 나로드니 거리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었다. 국립극장에서 시작해 나로드니 거리를 거쳐 바츨라프 광장까지 이어지는 구역은 체코 민족주의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이 됐다. 체코 음악을 공연하는 국립극장이 건설되자 나로드니 거리는 체코인이 가장 자주 찾은 상업구역으로 성장했다.
나로드니 거리는 20세기에는 벨벳혁명의 시발점이었다. 1989년 11월 17일 ‘국제학생의날’을 맞아 프라하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 1만 5천여 명은 나로드니 거리에서 평화 행진을 펼쳤다. 그런데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경찰이 국립극장 인근 미쿨란드스카 골목으로 학생들을 몰아넣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에 분노한 국립극장 직원들과 인근 상점 주인들이 시위에 가세해 경찰에 맞섰다.
폭력사태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프라하 곳곳에 퍼져 나가는 바람에 이튿날부터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당초 국제학생의날 행사로 끝날 수도 있었던 시위가 공산정권을 무너뜨리는 벨벳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날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폭력진압이 벌어졌던 미쿨란드스카 거리 입구 시르딘고브스키 궁전 벽에는 기념 동판이 붙었다.
나로드니 거리의 건물은 대부분 19세기에 지은 것이다. 일부 상업시설은 20세기 말이나 21세기에 건설했다. 체코 민족주의의 본산이다 보니 이곳에는 다양한 기관, 협회가 모였다. 체코과학아카데미, 체코직업사진가협회, 시네마트, 체코모델협회, 체코바협회 같은 곳이다.
국립극장이 있다 보니 문화시설이나 문화단체도 많다. 비올라극장, 메트로극장, 바츨라프 스팔라 갤러리, 슬라비아 카페, 에발드 쳄버 시네마, 레두타 재즈 클럽, 카페 루브르 같은 곳이다. 카페 루브르는 19~20세기에 체코 지식인, 예술인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카페 슬라비아는 스메타나, 드보르작 같은 체코 음악가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 영화 ‘아마데우스’를 만든 감독 밀로슈 포르만, 초대 체코공화국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단골이었다. 두 곳은 지금은 현지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인기 카페가 됐다.
오늘날의 나로드니 거리는 프라하에서는 가장 현대적인 곳이다.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을 상대하는 쇼핑센터, 식당, 카페가 즐비하다.
국립극장에는 돌 하나, 기둥 하나, 계단 하나에도 체코인의 민족적 자존심이 서려 있다. 체코의 민족주의를 담아 건립한 곳인 만큼 국립극장 곳곳에서는 19세기에 ‘국립극장 세대’라고 불린 체코 민족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