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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29. 2024

프라하 셋째 날(3) 구시가지 골목 한 바퀴


나로드니 거리의 마지막 부분은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레기이 다리다. 평소에 국립극장 쪽에서 보면 평범한 다리처럼 느껴지지만 안개가 잔뜩 끼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다리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꽤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론 다리 하나를 보자고 안개가 끼기를 기다리거나 눈이 오는 겨울에 다시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이 좋으면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레기이 다리 아래에는 섬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프라하에 온 첫날 가 본 강 한가운데의 스트르젤레츠키 섬이고, 다른 하나는 국립극장 쪽 제방에 붙은 슬로반스키 섬이다. 국립극장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자기 화장실이 생각난다. 다행히 레기이 다리 모퉁이 아래쪽에 유료 화장실이 있다. 요금은 싸지 않지만 사정이 급한 사람은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구글맵에도 나올  정도니 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모양이다. 


슬로반스키 섬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한 조핀 궁전으로 유명하다. 19세기에 각종 무도회나 연주회가 열린 장소다. 이곳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명곡 ‘나의 조국’이 초연된 장소로 더 유명하다. 청각을 잃은 스메타나가 수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씩 작품 전곡을 1882년 이곳에서 차례로 연주했다. 헝가리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물론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곳에서 연주했다. 지금도 이곳이 대연회장은 연말연시 무도회, 연주회 장소로 사용된다고 하니 프라하에 여행을 간 김에 여유가 있으면 시간을 잘 골라 한번 가볼 만하다.



슬로반스키 섬은 다리 위에서만 내려다보고 그냥 가기로 했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 국립극장 맞은편 디발델니 거리로 들어간다. 이제부터는 구시가지 골목길을 헤매어 볼 참이다. 


나로드니 거리를 중심으로 국립극장 쪽은 신시가지, 반대쪽은 구시가지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나로드니 거리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과, 그 성벽을 에워싼 해자가 있던 곳이다. 


구시가지 골목길에 들어가면 헤맬 것을 각오해야 한다. 미로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방향 감각이 없으면 이리저리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물론 헤매려고 일부러 들어가는 것이니 헤매는 게 짜증나거나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무조건 북쪽으로 가다 적당한 시점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구시가지 광장이나 하벨시장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니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10분 정도 천천히 걷다 보니 특이하게 생긴 교회가 나온다. 체코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곳이지만 체코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소다. 이곳은 15세기 체코에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 외세 배격,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종교 지도자 얀 후스가 프라하 시민들을 상대로 개혁 설교를 시작한 베들레헴예배당이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얀 후스는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들레헴예배당의 설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파렴치한 독일 기업인과 종교인에게 유린당하던 조국 보헤미아의 아픈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했다.


베들레헴예배당 안마당 한쪽 구석에는 대머리처럼 보이는 나무 조각이 있다. 비에 맞아 바람에 쓸린 흔적이 깊이 배인 조각이다. 이것이 바로 얀 후스 조각상이다. 구시가지광장에서 1915년에 제막한 동상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인간적 고뇌를 제대로 담았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화려하고 큰 동상보다 더 감동적으로 보인다.



1620년 발발한 30년 전쟁에서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가 패한 이후 베들레헴예배당은 거의 방치됐다. 보헤미아를 지배한 가톨릭은 얀 후스의 설교가 이뤄졌던 이곳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던 이곳을 재건된 것은 뜻밖에도 ‘종교는 마약’이라고 주장하던 공산당의 손에 의해서였다.


1948년 쿠데타로 집권한 공산정권은 얀 후스의 정신이 깃든 베들레헴예배당을 중건했다. 그들이 이곳을 중시한 것은 얀 후스가 주창한 이념이 사회주의 혁명 이론과 부합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얀 후스를 민중혁명 운동가로 추켜세운 그들은 예배당에 담긴 종교적 측면은 깎아내리고 자유를 찾으려는 민중의 투쟁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공산정권이 후스를 이용하던 시절에 반체제 인사들은 후스를 저항의 상징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구시가지광장 후스동상 앞에 앉아 침묵시위를 벌이곤 했다.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하고 언론 자유를 원한다는 걸 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수백 년 전에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다 탄압을 받고 목숨을 잃은 한 인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양측이 ‘우리와 뜻이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물론 둘 중 하나의 주장은 후스의 참뜻을 왜곡한 엉터리였지만.


얀 후스 사망 600주년인 2015년 체코 정부는 구리로 종을 만들어 그가 설교했던 베들레헴예배당 탑에 설치했다. 예배당 벽에는 ‘진리를 위하여(’Za pravdu)라는 문구를 새긴 장식을 붙였다. 문구는 햇빛이 잘 들어 벽에 뚜렷한 그림자가 생길 때에만 선명하게 잘 보인다. ‘진리는 어두운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베들레헴예배당은 매우 독특하게 생겼다. 삼각형 지붕을 가진 집 두 채가 나란히 선 모양이다. 뒤쪽에 붙은 탑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단순히 동화 같은 주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배당에 들어가 보려고 이리저리 출입문을 찾아봤지만 모두 잠긴 것 같다. 알고 보니 이날 교회에서 종교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외부인은 출입하지 못하게 통제한 것이었다. 다음에 다시 프라하에 갈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예배당 안을 둘러보기로 작정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베들레헴예배당을 지나 후소바 거리 쪽으로 이동한다. 많은 사람이 골목 입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다들 시선을 위로 향하는 것일까? 일행 모두 궁금한 표정을 한 채 골목으로 서둘러 간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후소바 거리가 끝나는 모퉁이의 3층 건물 벽 높은 곳에 철봉 같은 쇠막대기가 달렸는데, 한 사내가 한 손으로 쇠막대기를 잡고 있다. 다른 손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특히 이 길을 잘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이 어두운 밤에 이 골목을 지나다 ‘매달린 사람’을 보면 기겁하지 않을까?



놀랄 필요는 없다. 튀어나온 쇠막대기에 매달린 것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조각 작품이다. 21세기 체코 최고의 조각가 다빗 체르니가 만든 ‘매달린 사람’이라는 조각이다. 정식 명칭은 ‘매달린 사람’이지만 흔히 ‘매달린 프로이트’라고 부른다. 매달린 사람이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체르니는 이 작품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프로이트의 생애와 심리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믿는다. 


작품의 의미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 지식인과 일반 시민의 차이를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뜻한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 혼란한 현대에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을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마침 근처 식당에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페인트공이 건물 옥상에 묶은 줄을 몸에 매단 채 아래로 내려와 창틀에 페인트를 칠한다. ‘매달린 사람’은 페인트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페인트공도 가끔 ‘매달린 사람’을 쳐다본다. 두 사람 모두 동질감을 느끼고 공감대를 가진 모양이다.



후소바 거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매달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매달린 사람’이 언제 아래로 뛰어내릴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스코르제프카 거리로 걸어간다. 


거리 끝에는 조그마한 광장이 나타난다. ‘석탄 시장’을 뜻하는 ‘우헬니 트르흐’ 광장이다. 원래 이곳에는 석탄 시장이 있었다. 나중에는 꽃 가게와 장의용품 가게로 바뀌었다. 지금은 관광객을 상대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놀랍게도 평범해 보이는 이 광장은 연금술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연관된 장소로 유명하다.


광장 한가운데 분수 앞 벤치에 앉는다. 소년과 소녀가 포도 넝쿨로 감긴 종려나무를 붙잡고, 나무 위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백조가 설치된 분수다. 바로 앞에 둥근 아치형 출입구 세 개가 달린 회랑을 가진 건물이 보인다. 1층은 연한 살구색, 2층과 3층은 짙은 산호색으로 칠해진 집이다. 



15세기에 프라하에서 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연금술사를 프라하에 초빙해 중용했다. 그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인 센디보기우스였다. 


센디보기우스는 왕을 만나기 전에 프라하 부자 귀족인 루드비크 코랄렉의 도움을 받아 연금술을 연구했다. 코랄렉은 하벨시장 인근인 우헬니 트르흐 거리에 있는 ‘깃털 세 개의 집’에 실험실을 갖고 있었다. 광장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살구색과 산호색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깃털 세 개의 집’은 체코어로 ‘우 트리 페르’다. ‘늑대의 식도’라는 ‘블치호 흐르들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센디보기우스는 못과 옷걸이를 뜨거운 숯덩이에 올린 뒤 특수약물을 넣어 은으로 바꿔 코랄렉을 놀라게 했다. 여러 종류의 약을 제조해 코랄렉 가족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루돌프 황제 앞에서 수은을 끓이고 빨간 가루로 만든 용액을 넣어 금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깜짝 놀란 황제는 금으로 메달을 만들어 라틴어를 새겼다. ‘센디보기우스가 이룬 것을 다른 사람도 시도해보라.’



세월이 흘러 1787년 9~11월 모차르트는 프라하를 방문했다. 같은 해 1월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가 묵은 곳은 우헬니 트르흐 420-1번지 ‘우 트리 이비츠쿠’로 불리는 집이었다. ‘황금 사자 세 마리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지금 이 건물에는 ‘모차르트 인’ ‘아마데우스 스튜디오’처럼 모차르트의 이름을 차용한 시설이 들어 있다. 또 건물 외벽에는 ‘1787년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지냈다’는 명판이 붙었다.


모차르트가 프라하를 두 번째 방문한 것은 ‘돈조반니’를 초연하기 위해서였다. 우 트리 이비츠쿠는 돈조반니 공연장인 스타로보브스케 디발도에서 불과 3~4분 거리였다. 모차르트는 스코르제프카 거리에 있는 당구장에 자주 들러 당구를 즐겼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벤치에서 유튜브를 틀어 ‘돈조반니’ 서곡을 듣는다. 모차르트가 마침 문을 열고 나와 아내와 함께 산책하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가 낯선 우리를 보고 잠시 놀라더니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준다.



우헬니 트르흐 바로 인근은 8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라하 최고(最古)의 시장인 하벨시장이다. 13세기에 생겼다니 모차르트가 ‘황금 사자 세 마리의 집’에 살 때도 시장은 존재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나 그의 아내가 이곳에 들러 장을 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벨시장은 현지에서 직접 수확한 농산품은 물론 각종 기념품을 다양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가격과 품질이다. 과거에는 현지인이 주로 찾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가격은 높아지고 품질은 떨어졌다. 재미 삼아 둘러볼 가치는 충분하지만 기념품을 살지 말지는 각자 판단할 문제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면서 모차르트의 마지막 흔적을 살펴볼 차례다. 프라하 문화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인 스타보브스케 디발도다. 이곳이 만들어진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30년 전쟁 탓에 인구가 줄고 경제가 쇠락했던 프라하가 되살아나던 무렵이었다.



18세기 중엽부터 프라하 인구는 다시 늘고 경제도 활기를 되찾았다.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하자 프라하 귀족은 문화예술로 눈을 돌렸다. 당시 최고 부자였던 프란츠 안톤 폰 노스티츠-리넥 백작은 엄청난 돈을 투자해 1783년 노스티츠 극장을 건설했다. 이름이 ‘스타노브스케 디발도’, 즉 ‘국민극장’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초였다.


노스티츠 극장에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됐다. 모차르트가 1787년 오페라 ‘돈 조반니’, 1791년 ‘티투스 황제의 자비’를 초연한 곳도 여기였다. 그가 ‘돈 조반니’를 초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노스티츠 국립극장 입구에는 오페라에 유령으로 나오는 코멘다토레를 상징하는 유령 조각상이 세워졌다. 


당시 프라하에는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숭배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가본 어느 도시보다 따뜻하고 환대가 좋았다. 그래서 그도 프라하를 정말 좋아했다. 



스타보브스케 디발도 뒤편에는 ‘과일시장’이라는 뜻인 오보츠니 트르흐 광장이 있다. 단순히 지나치면 잘 모르지만 광장 주변에는 매우 중요한 건물이 많다. 극장 옆에는 카를대학교 건물 중 하나인 카롤리눔이, 극장 남쪽에는 콜로브라트 궁전이 있다. 민주화 이후인 1996년에 건설돼 쇼핑센터로 이용되는 미슬벡 궁전과 파초브스키 궁전으로도 불리는 노바 민코브나 궁전도 있다. 일일이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지나가면서 슬쩍 둘러볼 만한 가치는 있다.


광장에서 가장 이색적인 건물은 끝부분에 붙은 ‘블랙 마돈나의 집’이다. 이 건물은 체코 큐비즘 건축의 상징으로 불린다. 건물의 이름은 모퉁이 벽에 붙은 블랙 마돈나 동상 때문에 생겼다. 지금은 프라하 응용예술박물관에서 가져온 일부 작품을 전시하는 체코 큐비즘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물론 카페도 있다. 1993년 내외부를 대대적으로 수리해 이듬해 10월 18일 미술관 개관식을 열었는데 지금은 세상을 떠난 민주화의 영웅 바츨라프 하벨 당시 대통령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블랙 마돈나의 집을 거쳐 화약탑 아래를 지나 공화국 광장으로 들어간다. 이제 프라하 여행은 여기에서 막을 내린다. 광장을 걷다 보니 아쉬움과 함께 다음에 찾아올 기회를 생각하는 기대감이 머리를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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