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한 무리의 한국인 관광객이 짐을 꾸려 서둘러 밖으로 나가느라 허둥지둥한다. 이제 겨우 7시 무렵인데 다들 바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체스키 크룸로프까지 먼 길을 가야 해서 일찌감치 출발하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이른 조식을 챙겨 먹고 호텔 앞에 세워진 승합차에 짐을 올리고 몸도 싣는다. 이들은 이른바 ‘세미 패키지’ 여행객들이다. 자유여행에 패키지여행을 더한 형태다. 항공권, 호텔, 이동 교통편은 여행사에서 준비하고, 여행지에서 일정은 개별적으로 알아서 진행하는 형식이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불편하다면 한국에서 따라간 여행사 사장과 함께 움직이면 된다.
정말 놀랍게도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이 여행사 사장은 이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다. 나도 체스키 크룸로프로 갈 예정이라니까 승합차에 공짜로 태워준다고 한다. 그곳을 거쳐 할슈타트와 잘츠부르크에도 간다면서 거기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재수도 이런 재수가 없다. 대신 이동하는 도중 승합차 안에서 여행객들에게 할슈타트와 잘츠부르크 역사, 전설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후였던 엘리자베트와 모차르트 이야기를 해주기로 한다.
체코 남부, 즉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한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림 같은 마을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에 슬픈 전설까지 더해져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 등과 함께 체코에서 해외 여행객이 가장 많은 도시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줄어 지역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일부에서는 체스키 크룸로프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어떻게 보면 프라하의 말라 스트라나 또는 캄파 섬 분위기가 나는 곳이다. 구불구불한 시내의 골목길은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프라하처럼 가장 높은 곳에는 강을 내려다보는 성이 있다.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성에 올라가면 마치 동화 같은 전경이 펼쳐진다. 체코에서 체스키 크룸로프처럼 잘 보존된 중세도시는 보기 드물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원래 이름은 ‘구불구불한 목초지’라는 뜻의 ‘크루메 아우에’였다. 여기에 체스키, 즉 보헤미아를 뜻하는 가진 단어를 붙여 ‘보헤미아의 크룸로프’라는 뜻인 체스키 크룸로프로 불리게 됐다.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은 15세기였다. 동쪽에 ‘모라비아의 크룸로프’라는 모라브스키 크룸로프가 있어 구별하기 위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체스키 크룸로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곳이 번성한 것은 1250년 체스키 크룸로프성이 만들어진 이후부터였다. 성을 만든 가문은 비트코브치 가문이었다. 체코에서 프라하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인 체스키크룸로프성의 소유권은 여러 가문을 거쳐 국가에 넘어갔다.
체스키 크룸로프의 지형은 매우 특이하다. 우리나라 강원도 영월군 동강처럼 ‘S’자 모양이 두 번 나타날 정도로 굽이굽이 흐르는 블타바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됐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이렇게 특이한 지형 중에서 가파르고 길게 튀어나온 작은 바위산에 자리를 잡았다. 강이 두 번째로 ‘S’자를 그리며 굽는 지점이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작은 동네인 데다 길이 너무 좁아 동네 중심가로 버스가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대형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외국인 관광객은 마을 외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한다. 사실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는 것보다는 걸어서 가는 게 더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주차장에서 나가면 성문을 지나게 된다. 체스키 크룸로프를 잘 몰랐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시내를 바라볼 때 나타나는 멋진 풍경은 바로 이 성문 위, 즉 망토 다리에서 내려다본 장면이었다.
성문을 지나면 독특한 이름을 가진 나무다리가 나타난다. 독특하다기보다는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다리 이름은 ‘성 아래 다리’다. 체코어로는 ‘라브카 포드 잠켐’이다. 글자 그대로 체스키크룸로프성 아래를 지나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가 나온다. 프라하와 다른 모습의 중세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나 오스트로베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멋진 성과 다리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우리말로는 ‘이발사의 다리 촬영 포인트’다. 이곳에서 성쪽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꽤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포인트가 됐다.
성으로 가려면 구시가지에서 라제브니츠케 다리를 건너 라테란 거리를 따라가야 한다. 네포무츠키 동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동상이 있는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는 ‘이발사의 다리’로 알려졌다.
라제브니츠케 다리가 ‘이발사의 다리’로 불리게 된 것은 다리 인근에 이발사의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발사의 딸과 관련된 슬픈 사연이 담겼기 때문이다. 비극의 시작은 17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인 루돌프 2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돌프 2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근친결혼의 후유증인 우울증을 유산처럼 안고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열한 살 때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스페인 국왕인 외삼촌 펠리페 2세와 함께 살았다. 외삼촌도 근친결혼 때문에 얻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미 정신적으로 취약했던 어린 루돌프 2세는 외삼촌에게서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9년 뒤인 스무 살에 빈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우울증, 신경쇠약증 환자가 돼 있었다.
루돌프 2세는 1583년 제국의 수도를 프라하 성의 왕궁으로 옮겼다. 궁정을 이전한 뒤 병이 더 깊어진 그는 본격적으로 세상에서 멀어졌다. 게다가 호흡 곤란, 피해망상, 극도의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환각과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 탓에 반복적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양성애자였던 루돌프 2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여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중에서 화가의 딸이었던 스트라도바와의 사이에 여섯 아이를 두었다. 맏아들은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나쁜 유전자를 모두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극심한 우울증, 피해망상, 조현병에 시달렸다. 아들마저 똑같은 정신적 증세에 시달리는 걸 알게 된 루돌프 2세는 1605년 프라하에서 멀리 떨어진 체스키 크룸로프 성을 사들여 아들에게 영지로 하사했다.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성 인근에 가게를 갖고 있던 이발사의 딸 마르케타 피클레로바를 좋아하게 돼 마르케타를 성으로 불러들여 같이 살았다. 그런데 그는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마르케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나중에는 급기야 그녀를 성의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말았다.
마르케타는 천우신조로 짚이 쌓인 수레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져 부모의 집으로 달아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발사에게 딸을 성으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이발사가 이를 거절하자 감옥에 가둬버렸다. 마르케타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자진해서 성으로 돌아갔다.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분노를 터뜨리면서 그녀를 죽이고 시신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루돌프 2세는 곧바로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졌지만 천성이 악하지 않았던 황제는 아들의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을 성의 감옥에 가두고 죽을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마르케타가 죽고 1년 뒤인 1609년 세상을 떠났다.’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성 쪽으로 가면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먼저 나타난다. 이미 여러 사람이 성 앞에 모여 웅성거린다. 다름 아니라 다리 아래에 곰이 사는 ‘곰 해자’가 바로 그곳이다. 뜻밖에 곰이 여기서 살게 된 것은 꽤 오래됐다. 16세기부터라고 하니 벌써 500년이나 지난 셈이다. 해자에 곰을 풀어놓은 것은 성의 방어를 위해서였다. 해자를 통해 성으로 침입하려는 적이나 도둑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해자에 사는 곰은 세 마리다. 곰에게는 이름도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보크, 카타(카테리나)다. 곰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잠을 잔다. 일부는 지켜보는 사람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바위 사이에 들이민다.
과거에는 해자에 곰을 키우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동물 학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체스키 크룸로프 시청은 당장 곰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 좁은 우리에 가둬 키우는 게 아닌 데다 먹을 것도 충분히 주므로 사육 환경이 나쁘지 않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해자를 지나 성 입구로 들어가면 13세기에 만들어져 가장 오래된 구역이 나온다. 성벽 등 곳곳에 그림이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창문 모양 그림, 사람 모습 등 그림은 다양하다. 성 보수공사를 실시할 때 자금이 모자라 창문을 새로 만들지 못하고 그냥 그림만 그려 놓은 것이다.
해자 쪽에 바싹 붙은 곳에 종탑이 보인다. 20세기 체코의 유명한 작가 카렐 차펙은 6층으로 된 이 종탑을 ‘탑 중에서 가장 우뚝 솟은 탑’이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이 탑은 블타바강 위의 좁은 바위 언덕에 우뚝 솟아 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의 종탑에는 원래 종이 다섯 개 설치돼 있었다. 다섯 개 중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17년 군인들이 무기를 만드는 데 쓰려고 녹이는 바람에 사라졌다. 당시 체스키 크룸로프에 있던 종 가운데 14개 이상이 사라졌다. 사라진 종 다섯 개는 100년 만인 2021년 복원됐다. 지금 성에서 땡~땡 하며 울리는 종은 ‘신제품’인 셈이다.
종탑을 등 뒤로 하고 약간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앞만 보고 가려는데 오른쪽에서 갑자기 누군가 쑥 튀어나온다. 그가 나온 틈새로 보니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주저하지 않고 그리로 들어간다. 맨 끝에 조그마한 테라스 겸 전망대가 나타난다. ‘설마’ 하면서 전망대로 살살 걸어간다.
“우~와!”
저절로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체스키 크룸로프의 절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에서 내려다보는 구시가지 전경이다.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여기만큼 풍경이 좋은 곳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금 건너온 ‘성문 앞의 다리’는 물론이거니와 나 오스트로베 거리, ‘이발사의 다리’ 그리고 종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전망대에는 한두 사람만 겨우 설 수 있다. 인상적인 곳이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많은 사람이 기다린다. 할 수 없이 서둘러 사진만 찍고 밖으로 나간다.
다시 위로 올라간다. 이번에는 좁은 전망대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구시가지를 볼 수 있는 ‘망토 다리’가 나타난다. 조금 전 체스키 크룸로프 시내로 들어올 때 지나갔던 성문 윗부분이 ‘망토 다리’다. 다리 난간에는 성 바츨라프, 성 네포무츠키, 파두아의 성 안토니우스, 성 펠릭스 동상이 서 있다.
망토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전경도 훌륭하다. 많은 사람이 다리에 기대어 구시가지를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는다. 이 각도로도 찍어보고, 저 각도로도 찍어본다. 다리에 붙은 작은 구멍을 통해 이색적인 시내 전경을 찍는 사람도 있다.
망토 다리 바로 옆에는 또 다른 전망대가 있다. 옛날에 마구간과 마구제작실로 사용한 건물의 정원이다. 지금은 카페가 있다. 망토 다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구시가지 전망이 나오는 곳이다. 이곳에는 담장이 있어 사람이 나오는 사진을 찍기에는 다른 곳보다 나아 보인다.
망토 다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승마학교가 나온다. 승마학교 뒤에는 넓은 정원이 보인다.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정원은 아니지만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좋은 곳이다. 정원 끝까지 가서 왼쪽 소로로 돌아가면 다시 망토 다리로 이어진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는 단체 가이드 투어를 실시한다. 미리 예약할 경우 1시간가량 성 내부 시설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대다수 외국인 관광객은 가이드 투어보다는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체스키 크룸로프 전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가이드 투어에 참가할 경우 성탑 전망대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다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조금 다른 각도의 전망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