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네루도바 거리를 떠돈다는 목 잘린 두 유령의 은근한 시선을 느끼며 오르막길을 따라 스트라호프수도원을 향해 걷는다. 제법 숨이 차고 다리에도 부담이 느껴진다. 수도원까지 그다지 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밝은 빨간색 지붕 타일과 구리 첨탑이 푸른 하늘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시원한 풍경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가는 도중 낡은 집 1층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간다. 물 한 병과 작은 비스킷 한 봉지를 사기 위해서다. 가게는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옛 시골마을 슈퍼마켓 그대로다. 가게를 지키는 주인은 족히 일흔 살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것인지 할머니 표정은 심심해 보인다.
스트라호프수도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등을 돌려 시내를 내려다본다. 시원하면서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성비투스대성당을 중심으로 프라하성의 전경도 보인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등에 맺힐 듯 말 듯 한 땀도 식히고 가고자 한다.
프라하성에서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는 풍광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프라하성과 시내를 내려다보는 경치도 연이은 감탄사를 터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낮에 평화스러운 수도원 종소리를 들으면서 프라하 성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환상에 젖을지도 모른다.
프라하에서 지내다 보면 가끔 동화 속에서 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동화의 스토리를 완성하려면 성이 필요하다. 프라하성은 프라하라는 아름다운 동화에 방점을 찍는 것과 다르지 않는 장소다. 스트라호프수도원 후문 앞에서 성과 시내를 바라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수도원 후문 쪽 공터에 작은 그림 액자 수십 개가 서 있다. 젊은 여성이 밝게 웃으며 액자를 지킨다. 옆에서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그림을 그린다. 여성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폴란드에서 왔다고 한다. 그 말로 짐작해보건대 아버지와 딸일 가능성이 있다. 일부 관광객은 “예쁘다”면서 그림을 몇 점 산다. 개당 5~10유로라서 비싸지도 않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은 1143년 올로무츠 주교였던 인드리히 즈디크가 건설했다. 수도원이 지어진 장소은 외곽에서 프라하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프라하 시내에 들어갈 수 없었다. 스트라호프라는 이름은 ‘보다, 감시하다’라는 뜻을 가진 ‘스트라지트’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곳에 프라하를 오가는 상인, 행인을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이 문을 열자 독일 라인강 슈타인벨트 지역에 있던 프레몬트레수도회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규모가 꽤 컸다. 당시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가 살던 프라하성 왕궁보다 더 넓었다고 한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은 봉헌 직후부터 체코에서 지식의 상징이 됐음은 물론 영적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부서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고딕 스타일로 건설했지만 나중에 재건할 때 바로크 스타일로 변했다.
긴 세월은 물론 화재 때문에 무너진 적도, 여러 전쟁 때문에 파괴된 경우도 있었다. 원래 보관돼 있던 많은 책이 도둑맞거나 불탔다. 체코 사람들은 그때마다 수도원을 새로, 더 웅장하게 지었다. 30년 전쟁 중이던 1648년 큰 피해를 입은 뒤 18세기 말 재건한 게 오늘날 수도원의 모습이 됐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의 고난은 20세기 들어서도 이어졌다. 1948년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을 때 스트라호프수도원은 공산정권의 미움을 사게 됐다. 공산당은 2년 뒤 프레몬트레 수도회를 수도원에서 쫓아냈다. 수도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이들은 39년 뒤에야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산당이 수도사들을 쫓아낸 것은 도서관 때문이었다. 이곳은 당시 체코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계몽 교육의 현장으로 이용됐다. 국민이 눈을 뜨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독재 권력이라면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똑같은 현상이다.
스트라호프수도원은 성모승천교회, 도서관, 미술관으로 구성돼 있다. 20만 점에 이르는 각종 자료를 보관한 도서관은 신학의 방, 철학자의 방, 호기심의 방으로 이뤄져 있다. 도서관이 생긴 것은 즈디크 주교가 수도원을 개원할 때 도서관과 자료보관실도 함께 만든 게 계기였다. 이 도서관도 클레멘티눔 도서관만큼이나 웅장하고 아름답다. 대부분 관광객은 여기까지 간 김에 도서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며 반드시 들어가 본다.
스트라호프수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입장료가 없다. 건물 외관만 살펴보거나 정원을 둘러보거나 그냥 지나친다면 돈을 안 내도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도서관과 미술관에 들어갈 때는 요금을 각각 내야 한다. 사진을 찍으려면 촬영비도 따로 내야 한다. 눈으로만 볼 때와 사진까지 찍을 때 요금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신학의 방은 1만 8천여 권에 이르는 종교 관련 도서를 보관하고 있다. 860년에 만든 ‘스트라호프 성경’이 대표적인 소장품이다.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18세기 화가 시아르 노세츠키가 그린 것이다. 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묘사했다.
철학자의 방은 원래 곡물창고 자리였다. 천장의 그림은 18세기 화가 안톤 마울베르츠가 그렸다. 진실과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의 여행을 주제로 담은 그림이다. 아담과 이브는 물론 알렉산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그림에 등장한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10계명 석판도 보인다. 이곳의 책은 신학의 방과 달리 종교 서적 외에 의학, 수학, 법률, 지리, 천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스트라호프수도원 도서관은 상당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장화가 그려진 하얀색 천장과 중세의 각종 서적이 꽂힌 서가는 조용히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 안에 들어가서 책이나 장식을 상세히 살펴볼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니 어쩔 수 없다.
미술관은 14~19세기에 모은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총 400여 점이니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고딕 시대 그림을 이렇게 많이 모은 곳은 중부 유럽에서는 이곳뿐이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조용한 수도원 분위기를 풍기는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그림을 살펴보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스트라호프수도원에서 가장 이색적인 장소는 맥주 양조장이다. 건물도 예쁜 데다 가을이면 빨갛게 물든 담쟁이넝쿨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세기 동안 수도사들이 개발한 방법에 따라 만든 전통 수제 맥주다. 아주 짙은 갈색이며 약간 쓴 맛이 특징이다. 이곳의 수제 맥주는 수도원 창립 초기부터 만들어졌다. 지금은 맥주에 안주를 곁들여 파는 식당이 수도원 한쪽에 있다. 식당 이름은 ‘성 노베르 스트라호프’인데 프레몬트레 수도회를 창건한 성 노베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프라하에서 여행으로 지친 몸을 달래는 데에는 맥주보다 나은 보약은 없다. 체코 맥주는 부드럽게 목을 잘 넘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양조연구소’가 쥐를 이용해 실험한 결과 여러 나라 맥주 중에서 체코 맥주를 가장 먼저 비웠다고 한다. 이어 물을 마셨고 다른 나라 맥주는 나중에야 입을 댔다는 것이다.
프라하에는 맥주와 관련해서 가볼 만한 곳이 많다. 13세기에 만든 건물 지하에서 수제 맥주를 즐기면서 다양한 맥주 관련 재료나 장비를 둘러볼 수 있는 ‘맥주박물관’은 물론 따뜻한 물 대신 맥주로 목욕을 즐기는 맥주 온천도 있다. 수제 맥주를 만들어 파는 전문 가게를 둘러보며 다양한 맛을 즐기는 맥주 투어까지 생길 정도다.
성 노베르 스트라호프 바로 옆은 호텔 모나스테리, 즉 수도원 호텔이다. 직각으로 붙은 두 건물 사이로 작은 틈새가 보인다. 계단이 연결된 걸 보니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혹시나 싶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역시나! 계단 아래는 포호르젤레츠 거리다. 로레탄스카 거리로 이어지는 흐라드차니 중심지다. 이 계단을 몰랐다면 스트라호프수도원 정문으로 돌아가서 한참이나 걸어와야 한다.
흐라드차니는 프라하성이 있는 언덕이다. 흐라드차니라는 이름 자체가 ‘성 지역’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잘 몰라서 프라하성만 둘러보고 흐라드차니의 다른 곳은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지만 이곳에는 생각 외로 재미있는 공간이 많다.
흐라드차니 서쪽 끝에는 흥미로운 동상이 하나 서 있다. 16세기 유럽의 최고 천문학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천동설을 주장한 케플러는 익숙하지만 브라헤는 낯선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브라헤가 케플러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 동상을 나란히 세운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인연에서 시작해 악연으로 끝난 사이였다. 덴마크인이었던 브라헤는 159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초청을 받아 프라하로 갔다. 그는 1600년 케플러를 프라하로 불러 조수 일을 맡겼다.
처음에는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는 조금씩 금이 갔다. 그러다 이듬해 브라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프라하에서는 ‘케플러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21세기 들어 덴마큰 의학연구팀이 구시가지광장 틴성모마리아교회에 묻힌 브라헤의 시신을 연구해 보니 독은 검출되지 않았다. 케플러는 500년 만에 누명을 벗었지만 사후에라도 둘의 나쁜 관계를 개선할 수는 없었다.
브라헤와 케플러는 동상의 기단에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가 나쁜 걸 의식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동상 앞을 지나는 도로 이름이다. 당시에는 프라하에서 브라헤가 더 유명했지만 지금은 케플러가 세계적인 천문학자로 평가받기 때문에 도로에는 케플러의 이름을 붙여 ‘케플러로바’라고 부른다. 또 동상 뒤에는 고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도 케플러의 이름을 붙여 ‘김나지움 얀 케플레라’라고 부른다.
포호르젤레츠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데 넓은 주차장에 많은 차가 세워져 있다. 주차장 앞에는 단정한 미색 벽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 보인다. 길이만도 100m를 넘는 큰 건물인 데다 아름답고 웅장해서 황제가 산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프라하에서 가장 큰 바로크식 건물인 체르닌 궁전이다. 이곳은 1930년대 이래 체코 외무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는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시간을 잘 맞춰 가면 정원은 마음대로 둘러볼 수 있다. 아주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제법 아담하게 잘 꾸며진 곳이어서 잠시 휴식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늦은 밤에 궁전을 돌아다닐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이곳에도 유령이 나온다. 특히 매우 악랄하기로 소문이 난 유령이다.
체르닌 궁전은 17세기 오스트리아 외교관이었던 얀 체르닌 백작이 지은 곳이다. 그의 후손 중에 낭비벽이 심한 마리안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이 대개 그렇듯 자비심이 부족해서 주변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마리안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조사하러 나온 경찰관에게 사람들은 ‘사악하고 잔인한 악마가 지옥으로 끌고 갔다’고 말했다.
마리안은 이후 유령이 돼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체르닌 궁전과 주변을 돌아다닌다. 사람을 죽여 끌고 오라고 악마가 일을 맡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외무부 직원 중에서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체르닌궁전에는 체코 현대사의 비극도 숨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산주의가 득세할 때 정면으로 반대했던 외무부 장관 얀 마사릭이 궁전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가 혼자 공산당에 맞서다 힘에 부친 나머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공산 정권이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창문에는 그가 매달려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체코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사인을 조사했다. 조사할 때마다 결과가 달랐다. 사고 직후 공산 정권은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민주화 이후인 2003년 재조사 때에는 암살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2021년 3월에는 엉뚱하게도 이유를 모른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흥미로운 건 자살일 수도 있고, 암살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불행한 사고일지도 모른다’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령 마리안이 있다면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 범인은 그녀?
체르닌 궁전은 유령 마리안, 그리고 아담하지만 꽤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정원은 대개 주말에는 무료로 개방하기 때문에 들어가 볼 만하다. 앞서 두 차례 프라하에 갔을 때에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입장할 생각도 못 했지만 이번에는 미리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궁전 정원에는 외국인 관광객은 별로 없고 산책을 즐기는 현지인만 붐빈다. 구글맵에 뜬 사진을 봤을 때에는 정원 연못에 물이 가득 차 꽤 운치 있어 보였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가뭄 탓인지 연못이 비어 있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흐라드차니와 떨어진 곳인데 정원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조용하고 차분했으며 마치 동화에 나오는 멋진 성에 숨겨진 화원을 돌아보는 느낌이었다. 이곳을 처음 지은 체르닌 백작은 오스트리아에서도 꽤 높은 권세를 자랑하던 귀족이었으니 남에게 숨겨진 정원을 아름답게 꾸민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그는 규모 면에서는 황제가 거처하던 프라하 성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미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궁전을 짓고 싶어 정원을 이렇게 훌륭하게 설계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