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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수호성인 산 이시드로

by leo

1070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이시드로 라브라도르라는 아기가 태어났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어찌나 덩치가 컸던지 부모는 "커서 남의 집 하인으로 일하면 품삯을 몇 배는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부모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아기는 울지도 않은 채 하루종일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이시드로는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스무 살 무렵에는 키가 2m에 이를 정도가 됐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은 콩나무 줄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이시드로는 매일 성당에 다녔다. 부모나 이웃사람들이 성당에 가라고 권유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성당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시드로는 열 살이 넘어갈 무렵부터 어려운 집안 살림에 힘을 보태기 위해 같은 마을의 대지주인 후안 데 바르가스의 농장에서 매일 품삯을 받으며 일했다. 바르가스는 곡괭이로 잘게 갈아놓은 밭의 흙처럼 마음씨가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거나, 때로는 재산을 풀어 도와주기도 했다. 이시드로는 그런 바르가스를 위해 일을 한다는 데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바르가스도 늘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이시드로를 항상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착하게 세상을 살고, 남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도 아무 이유없이 미움을 사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이시드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는 매일 바르가스의 농장에 일을 하러 가기 전에 항상 성당에 들러 기도를 드리는 게 일과처럼 돼 있었다.


이시드로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당을 찾는 것을 싫어하는 동료 일꾼이 있었다. 그는 이시드로가 착한 척한다고 생각했고, 바르가스가 그런 이시드로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싫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매일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아침 일찍 바르가스의 집을 찾아가 이시드로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주인 나리, 이시드로는 성당에 간다는 핑계로 지각을 한답니다.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주인 나리가 농장에 나타날 때에만 일을 하는 척할 뿐이랍니다. 주인 나리께서 사정을 잘 살피셔서 이시드로를 쫓아내든지, 혼을 내든지 하셔야 합니다."


바르가스는 높은 산에 뿌리 깊게 박힌 오래된 바위처럼 이시드로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꾼이 매일같이 와서 이시드로를 험담하자 마음 한구석에 그를 의심하는 기운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농장에 한번 가봐야겠군. 그렇다고 이시드로를 못 믿는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야. 다만 한 번쯤 확인해볼 필요는 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바르가스는 서둘러 농장으로 달려갔다. 농장 한쪽 구석에 있는 별장에 들어가서 누가 언제쯤 일을 하러 오는지를 살필 생각이었다. 삐~걱 하며 농장 문을 열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어두컴컴한 농장 안쪽에 희미한 불빛과 함께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충 위치를 보아하니 이시드로가 맡아 일을 하던 구역으로 보였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일찍 와서 일을 하는 걸까? 이시드로가 성당에 가기 위해 미리 나와서 일을 해놓는 것일까? 그런다고 해서 품삯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바르가스는 발소리를 최대한 낮춰 몰래 옅은 불빛이 비치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일꾼의 등 뒤에 선 뒤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일꾼은 숙였던 허리를 들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바르가스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시드로의 구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일꾼은 다름 아닌 천사였던 것이다.


"바르가스야, 너의 마음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도록 하여라. 이시드로가 하느님의 집에서 마음 편히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내가 대신 그의 쟁기를 부여잡고 있을 뿐이니라."


그날 이후 바르가스는 이시드로야말로 하느님과 천사가 지키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어느 누가 이시드로를 모함하는 말을 하더라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농장에서 본 천사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바르가스가 기적을 경험했다는 소문은 마드리드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바르가스는 어느 겨울날 이시드로에게 옥수수 씨앗이 가득 든 자루를 건네주면서 다른 일꾼들과 함께 농장의 밭에 뿌리라고 시켰다. 이시드로는 주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농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시드로가 농장 입구 근처에 도착할 무렵 비둘기 여러 마리가 눈이 제법 수북하게 쌓인 땅에 내려와 구구거리면서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둘기들은 부리로 땅 이곳저곳을 쑤셔 보았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흙만 팔 뿐이었다. 이시드로는 비둘기들이 가엽게 여겨졌다.


'하루종일 땅을 파 보았자 이런 추운 날씨에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터인데….'


이시드로는 주인이 건네준 자루를 열고는 옥수수 씨앗을 꺼내 비둘기들에게 던져 주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먹이를 찾던 비둘기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모이를 비둘기들에게 나눠 주었다. 나중에는 자루에 씨앗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얘들아, 옥수수 씨앗을 조금 더 주고 싶지만 이제는 가야겠구나. 남은 씨앗이라도 밭에 뿌려야 나중에 옥수수를 수확해서 너희들에게 다시 나눠줄 수 있지 않겠니? 아쉽지만 이제 작별을 해야겠다.“


이시드로가 비둘기들에게 아쉬움의 말을 건네자, 비둘기들은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 주변을 몇 바퀴 돌더니 다른 곳으로 힘차게 날아가 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일꾼들이 이시드로의 곁으로 몰려왔다.


"이시드로, 자네 미쳤군. 주인 나리께서 밭에 심으라고 주신 옥수수 씨앗을 비둘기들에게 모두 다 줘 버리면 밭에는 무엇을 뿌릴 텐가? 아무리 주인 나리가 자네를 신뢰한다고 해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시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자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


다른 일꾼들이 자신을 힐난하는데도 이시드로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빈 옥수수 자루를 다시 어깨에 메고는 씨앗을 뿌려야 할 밭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른 일꾼들은 밭에 뿌릴 씨앗 하나 없으면서도 밭에는 왜 가는지 모르겠다는 둥, 도대체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는 둥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시드로는 밭에 도착하자 자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어 두 손으로 자루 밑쪽을 잡고 거꾸로 들어 입구를 땅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금 농장 인근에서 비둘기들에게 모이로 옥수수 씨앗을 거의 다 주는 바람에 비어 있어야 할 자루에서 옥수수 씨앗이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뒤를 따라오던 다른 일꾼들이 깜짝 놀라 북풍한설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 못하고 서 있을 때, 이시드로는 여유 있게 휘파람을 불며 밭에 씨앗을 골고루 뿌렸다. 그가 일을 거의 다 마쳤을 무렵에야 다른 일꾼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해 이시드로가 씨앗을 뿌린 옥수수밭에서는 이전 해보다 배 이상 많은 옥수수가 수확됐다. 이시드로는 바르가스에게 수확량 가운데 일부를 비둘기 모이로 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옥수수와 비둘기의 기적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주인은 상당량의 옥수수를 이시드로에게 건네주었다.


이시드로가 먹을 것을 나눠준 것은 비둘기만이 아니었다. 그는 늘 넉넉지 않은 품삯을 받았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항상 쪼들리기 일쑤였다. 아내 마리아와 아들까지 세 식구가 하루 세끼 입에 겨우 풀칠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거리에서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들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집으로 데리고 가 그나마 부족한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이런 경우를 부창부수라고 하는 것인지, 다른 아내라면 있는 바가지, 없는 바가지를 모두 긁을 상황이었건만, 마리아는 불평 한마디 하는 일이 없었다.


찬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어느 겨울, 이시드로는 평소보다 유난히 많은 걸인을 집에 데리고 왔다. 족히 10명은 되어 보였다. 마리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눠 줄 음식이 충분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편을 부엌으로 몰래 불렀다.


"여보, 당신이 너무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다만 집에 있는 음식이 너무 모자라서 손님들에게 자칫 실례를 저지를지도 모를까 걱정이 돼서 하는 이야기예요. 남은 음식 재료를 냄비에 모두 긁어모아 죽을 만들었는데 겨우 3인분도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리아의 걱정을 들은 이시드로는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먼저 냄비에 담긴 3인분의 죽을 충분히 퍼서 손님들에게 내어 드리도록 해요. 어차피 접시 10개를 한꺼번에 들고나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그런 다음 부엌으로 돌아가서 다시 3인분의 죽을 퍼도록 해요. 이렇게 서너 번만 하면 다들 죽을 나눠 먹을 수 있을 거요."


마리아는 처음에는, 남편이 내 말을 이해를 하지 못했나, 싶었다. 그러다 평소 차분하고 총명한 남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사정을 알면서도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게 됐다. 그녀는 이시드로가 시키는 대로 했다. 냄비에 담긴 죽을 박박 긁어 접시 3개에 나눠 담은 뒤 손님들이 기다리는 식탁에 가져갔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간 그녀의 눈앞에 믿지 못할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한 방울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을 긁어 담아 손님들에게 대접했는데, 냄비에는 다시 죽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그제야 남편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죽을 다시 접시에 담아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그날 이시드로와 마리아의 집을 찾은 가난한 손님들은 다들 죽을 2~3접시씩 배부르게 먹고 돌아갔다.


평생 품삯일꾼과 농부로 살았던 이시드로는 환갑이던 1130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619년에는 성인으로 봉헌됐고,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이 됐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육십평생 펼쳐 보인 기적은 모두 438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도 편안히 땅에 묻혀 있지 못했다. 1212년 펠리페 3세 국왕은 중병에 걸려 죽을 처지에 몰렸다. 그때 왕은 주변의 충고에 따라 이시드로의 유해를 파내 손으로 만졌다. 그랬더니 하루아침에 병이 모두 사라지고 건강을 되찾았다고 한다. 1696년, 신경쇠약 등의 병에 시달리던 카를로스 2세 국왕은 펠리페 3세처럼 이시드로의 유해를 땅에서 파내게 한 뒤 그의 이를 빼내 베개 밑에 넣고 살았다고 한다.


산 이시드로는 농부의 수호성인이다. 또 그의 고향인 마드리드는 물론 사라고사, 세비야 등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마드리드에서는 해마다 5월 15일이 되면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에서 산 이시드로 축제가 열린다. 마요르 광장 인근에는 산 이시드로와 아내 마리아의 유해를 모신 이시드로 성당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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