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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략결혼 희생 공주 살던 데스칼자스 레알레스 수도원

by leo

16세기 중반 스페인에 카를로스 5세라는 국왕이 있었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이사벨라와 결혼해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다.


카를로스 5세는 당시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을 했다. 지중해와 헝가리 등이 주요 전쟁터였다. 그는 늘 뒤통수가 근질거렸는데, 바로 포르투갈 때문이었다. 언제 스페인을 노릴지 몰랐던 것이었다.


카를로스 5세는 포르투갈의 후안 3세와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영원히는 아니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싶어 했다.


고민하던 카를로스 5세는 정략결혼을 이용하기로 했다. 큰딸 마리아는 이미 헝가리-보헤미아 국왕인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래서 막내딸 후안나를 후안 3세의 아들 후안 마누엘 왕세자에게 시집보내 사돈 관계가 되기로 했다. 부인인 이사벨라도 포르투갈 출신인만큼 딸을 그곳에 보낸다고 해서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딸 후안나야! 아버지가 부탁할 게 하나 있구나! 나라를 위해 포르투갈의 왕세자와 결혼하는 게 어떻겠니?”


“….”


후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는 포르투갈에 가기 싫었지만, 국왕인 아버지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지시를 들은 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머니가 따라와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조국 포르투갈을 떠나 낯선 땅 스페인에서 20년 이상을 산 그녀는 ‘이국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았다.


미모가 탁월해 유럽 여러 왕가에서 탐냈던 후안나가 포르투갈로 가기 싫어했던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녀는 원래 내성적이고 종교에 심취했던 데다 조국 스페인을 정말 사랑했다.


후안나는 또 후안 왕세자가 이상하다는 소문을 일찍부터 들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왕가가 그랬지만 포르투갈 왕가도 근친결혼을 많이 했다. 그 때문에 후손의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 후안 왕세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근친결혼의 가장 큰 특징인 뾰족 튀어나온 턱을 가졌다. 그 탓에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해 위장이 나빴고, 전체적으로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소문에는 후안 왕세자의 건강이 너무 나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 후안나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려고 포르투갈로 가는 게 너무나 싫었다.


카를로스 5세는 수년간에 걸쳐 포르투갈과 결혼 협상을 벌였다. 그로서는 다행히, 후안나로서는 불행히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포르투갈은 결혼을 서둘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후안 왕세자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유일한 왕의 아들이 죽기 전에 서둘러 결혼해 후세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결국 후안나는 ‘씨받이’에 불과했던 셈이었다.


역사학자 루이스 페르난데스 레타나는 후안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후안나의 역할은 포르투갈 왕가의 후손을 낳아준 뒤 평생 미망인으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후안나는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갔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녀는 열다섯 소년이던 후안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가 1552년이었다.


안타깝게도 후안나가 들었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아니 소문보다 후안 왕세자의 건강은 더 나빴다. 그는 결혼 2년 만인 1554년 1월 그만 세상을 뜨고 남았다. 후안나가 아들 세바스티안을 낳기 18일 전이었다.


후안 3세는 며느리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숨겼다. 며느리가 충격을 받으면 손자를 낳기 전에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후안나는 아기를 낳은 다음날에야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버지, 저를 왜 이곳으로 시집보내셨나요? 스페인을 떠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아시면서…. 아버지도 남편의 건강이 이런 줄 모르신 것은 아니지요? 어린 막내딸이 낯선 포르투갈에서 젖먹이 아들 하나만 키우면서 평생 홀로 살기를 원하셨던 건가요?’


후안나는 그날부터 침대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스페인에서 따라간 시녀가 그녀를 껴안고 함께 통곡했다.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후안나에게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카를로스 5세가 후안 3세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이 태어난 지 4개월 뒤인 1554년 5월이었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후안 3세 전하. 사돈인 스페인 국왕이 안부를 전합니다. 전하에게 도움을 청할 게 있어 서신을 보냅니다. 제가 영국에 가게 됐습니다. 아들이 영국에서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필요한데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고민입니다. 전하의 며느리로 가 있는 제 딸 후안나를 잠시 귀국시켜 대신 스페인을 살피도록 배려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카를로스가 딸을 섭정으로 생각한 것은 원래 어릴 때부터 매우 똑똑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에게도 별도로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딸 후안나야! 너만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아버지가 늘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희망을 갖도록 하여라. 나는 머지않아 영국에 가야 한단다. 너의 오빠 펠리페 2세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게 됐어. 돌아올 때까지 네가 스페인을 잠시 돌봐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구나. 너의 시아버지인 후안 3세 전하에게는 이미 알렸으니 곧 조치를 할 것으로 믿는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후안 3세는 며느리를 불러 카를로스 5세의 편지를 보여주며 스페인에 잠시 돌아갈 뜻이 있는지를 물었다.


“너의 아들 세바스티안은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어린 아들은 놔두고 혼자 스페인으로 돌아가 여러 해를 보낼 수 있겠느냐?”


후안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버지인 후안 3세는 약간 미심쩍었지만, 사돈인 스페인 국왕의 부탁인 데다 손자도 이미 얻은 터여서 며느리를 보내기로 했다.


후안나는 며칠 뒤 짐을 꾸려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조국을 떠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겨우 젖먹이인 어린 아들은 유모가 돌보기로 했다. 그는 아들의 이마에 키스로 작별한 뒤 지체하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후안 3세도, 어린 아들도, 포르투갈 백성도 이것이 후안나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후안나는 정말 영민한 여성이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권좌를 비웠지만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국왕이 없어 나라가 혼란스러운 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종교에 매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스페인 백성은 물론 귀족들도 입을 모아 그녀를 칭송했다.


“대단한 분이야! 후안나 공주님이 남자였다면 스페인을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하는 뛰어난 국왕이 될 수 있었을 거야.”


카를로스 5세는 영국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들은 1559년이 돼서야 스페인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귀국한 아버지, 오빠에게 후안나가 폭탄선언을 했다.


“저는 스페인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포르투갈로 복귀하고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에요. 인생을 포기하고 미망인으로 눈물만 흘리며 살지는 않을 거예요. 아들에만 매달려 아들만 키우면서 살기에 너무 젊답니다.”


사실 후안나는 아들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탓에 모성애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버린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후안나는 아버지와 오빠가 영국에 가 있을 때 데스칼자스 레알레스 수도원을 지었다. 두 사람이 돌아와 섭정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왕궁의 숙소와 데스칼자스 레알레스 수도원을 오가며 살았다.  


후안나의 미모를 잘 아는 유럽의 여러 왕가에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재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도원에서 수녀처럼 살며 여생을 보내다 1573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수도원에 묻혔다.


후안나가 재혼을 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지낸다는 소식은 많은 여성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몰린 왕족이나 귀족 가문의 딸들이 그랬다.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을 했다가 미망인이 된 여성은 물론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배신을 당한 여성 등이었다.


여성들은 수도원에 재산을 헌납했다. 그들이 바친 재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덕에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 됐다.


재산을 다 바친 여성들은 수녀가 돼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 시인은 이들을 보고는 이렇게 표현했다다. ‘이 여성들은 예수의 연인이 되는 인생을 선택했다.’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은 마드리드 여행의 기점인 푸에르타 델 솔에서 까야오 광장 쪽으로 가는 칼레 데 프레시아도스 거리에 있다. 엘코르테잉글레스 백화점 맞은편 건물이다.


수도원 이름은 ‘맨발의 여자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예배실 33곳이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진 나이를 뜻한다. 수녀들은 실제로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지낸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은 박물관이다. 교황청으로부터 1960년 박물관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85년에는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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