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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과학이 만든 마드리드 펠리페 4세 동상

by leo

16~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 피에트로 타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조각에 관심이 많아 하루 종일 돌을 끼고 살다시피 했다. 자질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난 덕분에 10대 후반에는 벨기에 출신의 유명 조각가였던 지암볼로냐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궁정조각가였던 지암볼로냐는 타카를 매우 신뢰했다. 그를 수제자로 지명하기도 했고, 나중에 세상을 떠날 때는 작업장과 모든 직책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타카는 그 덕분에 스승의 뒤를 이어 1608년 메디치 가문의 궁정조각가가 될 수 있었다.


타카가 궁정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던 1610년 피렌체에 유명한 철학자, 수학자 겸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나타났다. 메디치 가문이 파두아대학교 교수로 일하던 그를 궁정학자로 채용한 것이었다. 당시 타카는 서른세 살, 갈릴레이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타카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갖춘 갈릴레이를 존경하며 자주 대화를 나눴다. 작품을 만들 때에도 그로부터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갈릴레이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훤하십니까?”


“타카 선생의 예술적 소양이 저의 천박한 지식보다 훨씬 아름답지요. 선생의 조각 작품을 볼 때마다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나 싶답니다.”


타카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 ‘네 무어인의 기념탑’, ‘포르셀리노’, ‘프랑스 앙리 3세 기마상’ 등 여러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높였다.


반면 갈릴레이는 지동설, 천동설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교황청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걷던 1634년 어느 날 스페인 왕궁에서 파견했다는 사절단이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 2세를 방문했다. 스페인 왕궁과 메디치 가문은 오래 전부터 친분 관계가 깊었다.


“펠리페 3세 전하께서 특별히 부탁 말씀을 전하라고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야지요.”


“피렌체의 궁정조각가인 타카 선생에게 펠리페 4세 전하의 동상을 만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스페인의 영광을 부활시킨 전하의 위업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펠리페 4세는 펠리페 3세의 아들이었다. 무기력했던 선왕 때와 달리 스페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화가 벨라스케스 등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궁정화가, 조각가로 하여금 그의 초상화나 흉상을 만들도록 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대형 동상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일을 맡겨야할지 고민하던 그의 눈에 마요르 광장에 세워진 아버지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생각났다. 그는 평소 그 동상을 볼 때마다 ‘참 멋진 기마상이야’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부친의 기마상을 만든 조각가에게 자신의 기마상도 만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에 세워진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은 지암볼로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타카가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암볼로냐가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인 1616년 타카가 최종적으로 완성해 스페인으로 보낸 것이었다. 스페인 국왕 사절단이 피렌체를 찾았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페르디난도 2세는 타카를 불렀다.


“스페인 왕궁에서 펠리페 4세 국왕의 기마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왔네. 꼭 자네에게 맡기라는군. 그 일을 맡을 수 있겠나?”


“대공 전하의 지시라면 당연히 맡아야지요. 최선을 다해 훌륭한 작품을 스페인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주군인 페르디난도 2세로부터 지시를 받은 타카는 곧바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스페인 궁정화가들이 그린 펠리페 4세의 그림 복사본을 여러 장 구했다. 그중에서 벨라스케스와 루벤스가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펠리페 4세가 두 앞발을 위로 높이 치켜든 말을 탄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을 바탕으로 기마상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타카는 앞발을 모두 들어 올리고 뒷발로만 버티는 기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마상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뒷발이 말 전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서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기마상에서 말들은 늘 네 발을 땅에 디뎠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부서지는 일은 없었다. 이전에 여러 조각가가 앞발을 든 기마상을 만든 적은 있었지만 펠리페 4세의 것처럼 크지는 않았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당혹스러운 경험 탓에 타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을까? 명색이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라면서 다른 조각가에게 해결책을 물어볼 수도 없고….’


펠리페 4세의 기마상 제작은 이런 이유로 조금씩 늦어졌다. 주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타카의 귀에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천동설, 지동설 논란 때문에 피렌체를 떠나 있었던 갈릴레이가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타카는 천동설이 맞는지 지동설이 맞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늘 존경하던 갈릴레이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게 반가울 뿐이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갈릴레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갈릴레이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몸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이렇게 피렌체로 돌아오셨으니 이제는 다시 마음 편하게 학문에 전념하십시오.”


“고맙소. 타카 선생. 그동안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 온 유럽에 명성을 떨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오.”


타카와 갈릴레이는 오랜만에 저녁을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타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펠리페 4세 기마상 생각이 났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갈릴레이가 그 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제가 앞발을 든 기마상을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신경을 써도 균형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말 앞부분이 너무 무거워 자꾸 넘어지거나 부서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타카의 푸념을 듣던 갈릴레이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옆방에 가서 종이와 필기구를 들고 왔다. 그리고 종이에 앞발을 든 기마상을 그렸다.


“제가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대충 이런 모양이겠지요?”


갈릴레이가 그린 기마상은 타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릴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타카를 쳐다보며 다시 빙긋이 웃었다.


“해결책은 두 가지가 있지요. 먼저 말 상체는 속을 비우고 껍데기만 만드세요. 그러면 무게가 가벼워 뒷발만 갖고도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리를 얼마나 들어 올려야 할지 각도는 제가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수일 내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레이가 내놓은 해법을 들은 타카는 무릎을 탁 쳤다. 왜 저런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그는 갈릴레이의 해법을 듣고 돌아온 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백마 한 마리가 앞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그를 쳐다보는 꿈을 꾸기도 했다.


며칠 뒤 갈릴레이는 약속했던 대로 말 다리의 각도를 계산해 타카에게 보냈다. 그는 그 각도에 따라 말 조각상을 완성한 뒤 마드리드로 실어 보냈다. 기마상 제작에 착수한 지 6년 만인 1640년의 일이었다.


 갑을 넘긴 타카는 펠리페 4세의 기마상을 완성한 그해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결국 기마상은 그로서는 대표적인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타카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 갈릴레이도 그로부터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마드리드로 건너온 펠리페 4세 기마상은 왕궁 앞 오리엔테 공원 입구에 세워졌다. 거대한 규모의 기마상은 직사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자리를 잡아다. 대좌 밑에는 네 마리의 수사자 조각상이 기념상을 호위한다. 기념상 앞에는 고풍스러운 분수대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관광객은 마드리드 왕궁만 둘러볼 뿐 펠리페 4세 기마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이 기마상에 갈릴레이의 과학이 숨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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