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

by leo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그림이 있다. 세계적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가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아토차역 인근에 있는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에 가야한다. 길은 어렵지 않다. 대로변에 위치한 데다 지하철역도 있어 찾아가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 건물은 과거에는 병원이었다. 1980년대부터 수리와 증축을 실시했고, 1992년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술센터 이름은 후안 카를로스 전 스페인 국왕의 부인인 레이나 소피아 왕비의 이름에서 따 왔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레이나 소피아는 그리스 왕족 출신이다. 그녀는 그리스의 전 국왕 파블로스의 장녀로 태어났고, 남동생은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였다. 그리스 왕정은 1973년 군사정권에 의해 폐지됐다. 이후 그녀를 비롯해 그리스 왕족은 스페인, 영국 등에 흩어져 살게 됐다.


레이나 소피아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이후 독일, 그리스에서 교육학과 고고학, 음악을 더 공부하기도 했다.


레이나 소피아 왕비는 1954년 그리스 섬 사이를 오가는 크루저에서 카를로스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서로 반한 두 사람은 1962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특이하게도 같은 날 두 번에 걸쳐 열렸다. 한 번은 신랑 나라인 스페인의 종교에 따라 기독교 방식으로, 다른 한 번은 신부 나라의 종교인 그리스정교회 방식으로 진행됐다.


첫 결혼식은 아테네 생드니교회에서 진행됐다. 그녀는 왕궁에서 말 6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시민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가운데 아테네 시대를 일주한 뒤 교회에 도착했다. 그런데 제단에 오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아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새 신랑 카를로스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새 신부의 눈물을 닦아줘 참석자들로부터 마음의 박수를 받았다.


한 시간 동안의 결혼식이 끝난 뒤 신혼부부는 백마 6마리가 이끄는 새 마차에 올라 성모마리아대성당으로 옮겨 두 번째 결혼식을 거행했다.


카를로스가 왕위 계승권자가 된 데는 레이나 소피아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60년대 후반 독재자 프랑코는 왕정을 복귀시킨 뒤 새 국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했다. 처음에는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후안 드 보르봉이 왕위계승 1순위였지만 프랑코는 보르봉이 너무 진보적이라는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특유의 카리스마와 친밀감 넘치는 미소로 스페인 국민은 물론 프랑코에게서도 좋은 평가를 받던 레이나 소피아가 나섰다. 그녀는 프랑코에게 “제 남편 후안 카를로스를 왕위계승권자로 지명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프랑코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69년 카를로스를 그의 후계자로 정했다는 것이다.


레이나 소피아는 남편 카를로스가 국왕이 된 뒤 ‘퀸 소피아 자선재단'을 만들어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녀가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어린이 강제노동, 어린이 매춘, 마약중독 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이 좋아하는 투우를 너무 싫어했으며 특히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레이나 소피아는 스페인 국왕과 결혼하고 세계 각국을 많이 여행한 덕분에 영어, 스페인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했다. 운동도 좋아해 그리스 요트 국가대표로 1960년 올림픽에 출전했다. 남편도 1972년 올림픽 요트 종목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 건물은 주로 유리와 철골을 많이 사용했다. 외부를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매우 인상적이다. 전체 구조는 여러 건물이 삼각형 형태를 이룬 모양이다. 4개 층 가운데 두 개 층은 미술관 소장 작품을 영구 전시하는 공간이며 나머지 2개 층은 여러 행사가 바뀌면서 열리는 임시 전시실이다.


건물 옥상 테라스에도 올라가볼 만하다. 종전에는 문을 닫아놓았지만 마드리드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요청에 따라 2008년부터 문을 열었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개방하는데 이곳에서 마드리드 시내를 보면 경치가 훌륭하다.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의 대부분 작품은 인근 프라도미술관과 스페인현대미술관 등에서 옮겨온 것이다. 처음에 스페인 국민들과 미술 평론가들의 여론은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미술관 측은 개관 직후부터 많은 돈을 들여 스페인 화가는 물론 외국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2층 피카소룸 한가운데에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여기서는 다른 작품은 다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유독 ‘게르니카’가 걸린 방에서만큼은 사진 촬영 금지다. 늘 사람들이 붐벼 사진을 찍으면 관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정부가 파리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피카소에게 의뢰해서 그린 작품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프랑코 총독파의 지원을 받은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역인 게르니카를 폭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사건을 재연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1981년까지는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걸려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이 작품을 스페인에 돌려주지 마라”고 한 것이었다.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도 처음에는 프라도미술관에 전시돼 있었다. 피카소가 그곳에 걸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게르니카’는 1992년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가 개관할 때 옮겨졌다. 스페인 정부가 왕비의 이름을 달고 새로 생긴 국립예술센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 가족은 여기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비스카야 주의 주도인 빌바도 시청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비스카야는 게르니카가 포함된 주다. 빌바오 시청은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는 당연히 역사적 현장인 게르니카 인근에 세워진 구겐하임 미술관에 걸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이에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레이나소피아국립예술센터에는 ‘게르니카’ 외에도 유명한 화가들의 대단한 작품이 여럿 있다. 살바도르 달리도 그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은 독특하면서 괴기하다. 솔직히 그림에 이해도가 높은 편이 아니라면 난해해서 보기에 불편할 정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