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여 평 부지에 주거단지를 건설한다. 이른바 정원도시다. 인구는 3만 2000명이다. 넓은 광장이 하나 있고, 공원도 하나 있다. 도로는 방사형으로 만들어 중앙에서 6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도시는 자급자족형으로 운영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기업을 운영해 큰돈을 번 에우세비 구엘 백작은 1899년 집에서 책을 읽었다. 영국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한 것이었다. 영국의 건축가 에벤에셀 하워드 경이 쓴 <내일-진정한 개혁을 향한 평화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하워드 경이 책에서 펼친 주장의 핵심은 ‘정원 도시 운동’이었다.
구엘 백작은 하워드 경의 책을 읽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주거단지. 거주지와 산업, 농업, 숲의 적절한 조화. 이것이야말로 내가 짓고 싶은 도시다.’
구엘 백작은 책을 다 읽은 뒤 바르셀로나에 하워드 경의 정원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기업 운영에서 번 돈을 투자하면 건설비는 충당할 수 있을 것이고, 복잡하고 더러운 도시생활에 지친 귀족이나 부자 기업인들에게 저택을 분양하면 충분히 건설비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구엘 백작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총 60채의 주택을 만들어 분양하면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염두에 둔 사업 부지는 ‘몬타나 펠라다’, 즉 ‘대머리 산’이었다. 나무가 하나도 없이 헐벗은 산이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바르셀로나 외곽인 데다 경치도 좋지 않으니 땅값은 비싸지 않았다.
구엘 백작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를 불렀다. 두 사람은 도시와 세계를 보는 눈이 비슷했다. 둘 다 독실한 가톨릭 신도여서 가치관이 비슷했다. 그래서 구엘 백작은 팔라우 구엘, 콜로니아 구엘 같은 사업을 가우디에게 맡겼다.
“가우디 선생, 몬타나 펠라다에 정원도시를 만드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설계와 건축을 맡아 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에게 일을 맡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저도 구엘 백작과 같은 자연형 도시에 관심이 많습니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을 이용한 주택을 짓는다면 하느님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정원도시의 이름은 제 이름을 따서 구엘공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곳에 지을 저택은 60채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구엘 백작, 세상에 이런 종류의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우리 둘뿐인 것 같습니다.”
“가우디 선생. 저는 선생의 건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수준을 넘어 존경합니다.”
구엘 백작과 가우디는 이른바 ‘모델 하우스’를 지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없던 개념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모델 하우스를 보러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것이다. 하워드 경이 내놓은 정원도시의 개념은 영국에서도 새롭고 이색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다. 사정은 바르셀로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구엘 백작과 가우디는 공사를 시작했다. 일을 벌려놓고 수년간 진행하다 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하나둘 찾아올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가우디는 민둥산에 많은 나무와 다양한 식물을 심었다. 정원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숲이 우거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종류는 다양했다. 소나무, 유칼립투스 나무, 참나무, 올리브나무, 야자수 등이었다.
그는 이어 구엘공원 입구에 작은 건물 두 채를 지었다.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생강과자 건물 같은 모양이었다. 두 건물은 관리인 숙소 및 행정사무소로 지은 것이었다. 가우디는 두 건물에 깨진 세라믹 커피 잔을 거꾸로 붙였다. 그는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를 막 끊은 상태였다. 자신이 더 이상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커피 잔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가우디는 또 입구 쪽에 계단을 만들었다. 그곳에 분수를 설치하고 깨진 타일을 붙인 화려한 색깔의 도마뱀을 만들었다. 그는 직원 여럿을 불러 인근 세라믹 공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세라믹 공장에 가서 깨진 세라믹 조각을 챙겨오도록 하세요. 공장 사장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해뒀으니 조각을 가져온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한두 개가 아니라 그 공장에 있는 조각을 몽땅 다 가져와야 합니다.”
가우디는 파크 구엘에 트렌카디스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타일을 깨뜨린 뒤 불규칙한 조각을 모자이크로 붙이는 기법이었다. 트렌카라는 단어는 카탈루냐어로 ‘부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가우디가 이전에 구엘 백작의 다른 저택 공사에 사용한 적이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함께 일하는 모든 건축가, 조각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파크 구엘의 건물과 계단 등 모든 외벽과 표면에는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타일을 붙이도록 합시다. 크기는 8~10인치 사이로 합시다.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자연스럽고 화려한 결과를 내는 데 최적의 방법입니다.”
가우디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여러 건축에서 가톨릭 신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성 조지와 용의 전설에 매달렸다. 성 조지는 하느님을 상징하고, 용은 악을 대변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계단에 설치한 것은 사실 도마뱀이 아니라 엘 드락이라는 용이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계단 끝에는 제법 넓은 정자 모양 공간을 만들었다. 이름은 살라 히포스틸라였다. ‘기둥 100개의 홀’이라는 뜻이다. 그리스 도리아 양식으로 나무 모양 기둥 86개를 세운 방이다. 각 기둥은 약간 기울어졌고, 기둥 안에는 하수관이 설치됐다. 비가 내릴 경우 빗물이 하수관을 통해 내려가 물탱크에 저장되는 구조다.
살라 히포스틸라 천장 역시 화려한 트렌카디스로 장식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과 달의 움직임을 상징한 내용이다. 가우디는 원래 이곳을 시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분양에 실패하는 바람에 시장은 문을 열지 못했다. 지금은 다양한 연주회가 열리는 장소가 됐다. 살라 히포스틸라 위에는 뱀 모양의 화려한 벤치를 갖춘 테라스가 만들어졌다. 바르셀로나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구엘공원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곳에 집을 산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1905년 바르셀로나 변호사였던 마르티 트리아스 도메네크였다. 그는 구엘공원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분양 계약서에 서명한 뒤 집에 ‘까사 마르티 트리아스 이 도메네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4년 구엘 백작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사업비를 댈 여력이 안 됐던 것이었다. 구엘공원은 이후 오랫동안 내버려졌다. 그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청이 구엘공원을 구입해 재정비 작업을 진행했다. 구엘공원은 설계자인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1926년에 문을 열어 대중에게 공원으로 개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