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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산타 카사' 사그라다 파밀리아

by leo


평범한 모든 날처럼 햇빛이 환한 오후였다. ‘산타 카사 대성당’ 하얀 본채는 밝은 햇살을 받아 더욱 하얗고 순결하게 보였다. 양 옆으로 늘어선 두 건물은 하얀 성당 본채를 아담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살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안에 드러누워 포근한 오후의 낮잠을 즐겼다.


1872년 초가을의 일이었다. 이탈리아 로레토에 있는 ‘산타 카사 대성당’ 앞에 한 사내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판업을 하는 호셉 마리아 보카벨라였다.


‘여기가 성모 마리아가 사셨던 집, 산타 카사를 모신 대성당이구나. 정말 우아하면서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넘치는군.’


성경 <누가복음>에 따르면 산타 카사는 성모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의 집이었다. 그녀가 요셉과 약혼한 뒤 집에 혼자 있을 때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성령을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낳기 위해 베들레헴에 다녀온 뒤 나사렛의 집에서 계속 살았다. 그렇다면 예수도 그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거주했다는 뜻이다. 산타 카사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산 집이었기 때문에 이후 오랫동안 기독교인의 순례 성지가 됐다.


산타 카사는 1291년 십자군 원정이 막을 내릴 때 이탈리아 로레토로 옮겨졌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가 나타나더니 벽에 붙은 집을 통째로 들어 옮겼다. 전설과 다른 현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천사가 산타 카사를 통째로 나른 게 아니라 철수하던 십자군 병사들이 집의 벽돌을 분해해 배에 실어 로레토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살다 유럽으로 피난을 온 비잔틴 제국의 안젤로스 가문이 산타 카사 이전 작업을 총괄하고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는 것이다. 안젤로스라는 가문의 이름 때문에 천사가 날랐다는 소문이 퍼졌다.


보카벨라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대성당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깊은 찬송의 마음이 저절로 배어나왔다. 그는 성당 안팎을 골고루 돌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감동스러운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성당이 바르셀로나에도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미쳐 날뛰는 저 광신적인 불신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텐데….’


보카벨라는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에게 공물을 바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로서는 일종의 성지 순례인 셈이었다. 그는 귀국 길에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을 모신 로레타의 산타 카사 대성당을 둘러보기로 했다. 규모가 엄청나게 크지는 않지만 산타 카사 덕분에 다른 어느 성당보다 거룩하고 엄숙하고 신성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역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광란의 시기였다.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가톨릭을 불신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많은 성직자가 불신자들로부터 낭패를 당하기도 했고, 어떤 곳에서는 성당이 불타기도 했다. 그는 그런 사회 현상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다시 카탈루냐를 종교적 신심이 굳은 지역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보카벨라가 로마에 간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 바르셀로나에 이런 성당을 하나 짓도록 하자. 후원자를 모아 땅을 구하고 건물은 성금으로 건설하면 된다. 당장 돌아가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으도록 하자.’


로레토의 산타 카사 대성당을 둘러보던 보카벨라의 마음에 기존의 바르셀로나 대성당 말고 새 성당을 지어 광란의 시대에 변화를 주자는 마음이 생겼다. 로레토의 대성당을 그대로 베껴 똑같은 대성당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예수와 성 요셉, 성모 마리아는 물론 열두 사도를 모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온 보카벨라는 1876년부터 대성당을 짓기 위한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가톨릭 신자인 알메나라 알타 공작부인이 부지를 기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기부 절차가 정리되기 전에 알타 공작부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보카벨라는 ‘성 요셉 헌신자 협회’를 만들었다.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돈을 모은 뒤 마침내 마리나-프로벤자-마요르카-세르데나 거리 사이에 있는 1만 2800㎡의 땅을 당시 화폐 17만 2000페세타에 사들였다. 보카벨라와 협회는 이듬해 건축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델 빌라에게 대성당 설계와 건축을 맡겼다. 일을 책임지게 된 델 빌라는 협회에 큰소리부터 쳤다.


“제가 일을 맡은 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일을 하면서 사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대성당 건축 양식은 네오고딕, 즉 신고딕으로 하겠습니다.”


공사의 첫 삽을 뜬 것은 1882년 3월 19일이었다. 그날은 성 요셉 축일이었다.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델 빌라와 협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특히 협회 회장인 후안 마르토렐 몬텔스와의 마찰이 심했다. 델 빌라는 값비싼 자재를 사용하려 했고, 처음 말과는 달리 나중에는 수고비를 달라고 했다. 건설비를 기부금만으로 충당하기로 했던 협회는 난처해졌다. 결국 델 빌라에게 손을 떼게 하고 새 건축가를 구하기로 했다.


“델 빌라가 공사를 포기하면 일을 누구에게 맡길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새롭고 창의적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만들어줄 수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건축가가 지금 카탈루냐에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아주 독특한 시선의 건축으로 요즘 화제를 모으는 사람이 있지요. 다들 아실 거예요. 안토니오 가우디라는 젊은이 말입니다.”


가우디는 보카벨라 가문으로부터 건축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 잘 아는 사이였다. 보카벨라는 가우디의 건축학적 시각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은 터였다. 가우디는 일을 부탁하러 온 보카벨라 등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신의 명령이군요. 이 일은 제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네요.”


가우디가 성당 작업을 넘겨받은 것은 1883년 3월 18일이었다. 당시 서른한 살 때였다. 가우디는 델 빌라와는 달리 마르토렐과 뜻이 잘 맞았다. 보카벨라와 마르토렐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사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가우디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의뢰인은 원래 서두르지 않는 분이랍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당 공사에 마침표를 찍으실 분은 성 요셉이 될 겁니다.”


가우디가 말한 의뢰인은 보카벨라와 마르토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바로 성전의 새 주인이 될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었다. 가우디는 공사를 맡았을 때부터 생전에 일을 다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이 성당이 완성될 수는 없어. 공사가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몰라.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면 성당을 망치고 말 거야. 나는 다만 성당 공사의 기초를 다지고 방향만을 제시하면 돼. 그것이 나의 역할이야.’


가우디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보카벨라처럼 당시 카탈루냐를 휩쓸던 반종교적인 혁명 정신에 반감을 가졌다. 그는 성당을 지으면서 주변에 그 의미를 설명하곤 했다.


“제가 건설하려는 성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성소입니다. 성당은 인간의 영혼을 대표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종교는 인간에게서 가장 성스러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웃으며 비꼬듯이 말하곤 했다.


“지금까지 가우디 씨는 카탈루냐의 부자들과 돈 많은 성직자들을 위한 값비싼 고급 저택을 지어 명성을 얻지 않았나요?”


가우디는 질문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빈자는 기도의 대상입니다. 정치의 대상이 아닙니다. 특히 혁명적 정치의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를 위협하는 것은 죄입니다.”


가우디는 설계를 종이에 꼼꼼하게 기록해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가 생각하는 건물의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드로잉도 몇 장 남겼다. 그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자료는 1930년대에 모조리 없어졌다. 스페인 내전 때 바르셀로나에는 반가톨릭 열풍이 강하게 불었다. 수많은 성직자가 총살당했고, 학살당한 수녀들의 시체가 발가벗겨진 채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불타고 부서진 성당만 58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성당은 오늘날 바르셀로나의 주교좌 성당인 ‘바르셀로나 대성당’이었다.


이런 와중에 혁명분자들은 가우디가 만들던 새 성당에도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1936년 성당 공사장에 난입했다. 짓고 있던 성당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남긴 모형, 드로잉을 부수거나 불태웠다. 나중에 일부가 복원되거나, 숨겨져 있던 모형 등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결국 가우디가 생각했던 근본적인 성당의 모습은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었다.


혁명세력을 극도로 혐오한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그들을 묘사한 조각을 하나 만들었다. 악마가 노동계급 혁명분자들에게 ‘오르시니 폭탄’을 넘겨주는 장면이었다. 오르시니 폭탄은 당시 과격한 혁명가였던 이탈리아의 펠리체 오르시니가 고안한 테러용 폭탄이었다.


가우디는 성당 공사를 맡은 뒤 생의 마지막 12년 동안 마치 고행을 자처한 수도승처럼 살았다. 매일 짧지 않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고, 오랫동안 단식을 했다. 찢어진 벽지를 덮고 노숙자처럼 지내기도 했다. 옷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핀으로 고정시키기도 했다. 바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빈곤의 공경’을 실천한 것이었다.


1926년 6월 7일이었다. 가우디는 평소처럼 기도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상 펠리프 네리 성당으로 걸어갔다. 그가 입은 옷은 누더기처럼 더럽고 다 떨어졌고, 구두는 발가락이 튀어나올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가우디가 그란 비아 인근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트램이 튀어나와 그를 치고 말았다. 가우디는 바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는 신분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 거지같은 차림을 한 그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 가우디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램 운전사는 물론 어느 누구도 그를 병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알폰소라는 사람이 근처를 지나갔다. 그는 노숙자처럼 보이는 노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다가갔다.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던 것인지, 그는 가우디가 주택단지로 만들려다 실패했던 파크 구엘에서 유일하게 주택을 분양받았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파크 구엘 공사장을 구경하러 갔다가 가우디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가우디 씨잖아! 평소 옷을 누더기처럼 입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는 택시를 불러 가우디를 병원으로 옮긴 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센 길 파레스 목사에게 연락했다. 너무 놀라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파레스 목사가 병원으로 달려가 죽어가는 가우디의 신분을 확인했다.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가우디는 병원에서도 행려환자로 취급돼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결국 가우디는 사흘 뒤인 6월 10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이틀 뒤 여전히 공사 중이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작은 예배당에서 열렸다. 수많은 바르셀로나 시민이 모여 무관심 속에 세상을 안타깝게 떠난 천재 조각가를 배웅했다. 당시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 진척도는 20%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나고 74년이 지난 2010년 11월 사그라다 파밀리아 봉헌식이 열렸다. 2026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는 여전히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베네딕토 1세 교황이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가우디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다지요. ‘성 요셉이 성당 공사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세례명이 바로 요셉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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