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나를 너무 놀린단 말이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들이 더 이상 혀를 놀릴 수 없게 만들려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멋진 변화가 필요해.”
이제 날씨가 조금씩 서늘해지기 시작한 1905년 9월이었다. 도시 개발업자 페레 미야는 재혼한 부인 로사 세기몽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호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새 부인에게 목소리를 높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불과 두 달 전인 6월에 결혼한 사이였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세기몽은 바르셀로나에서 손꼽을 만한 부자였다. 그녀는 원래 조셉 과르디올라의 부인이었다. 과르디올라는 인디아노라고 불렸다. 인디아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떼돈을 벌고 돌아온 카탈루냐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과르디올라는 귀국하자말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식도 없이 혼자 남은 로사는 뜻하지 않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바르셀로나 최고의 부자가 됐다.
반면 미야는 넉넉한 형편이었지만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는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열리는 상류층 파티에 참석해 여성들과 곧잘 어울리곤 했다. 그는 파티장에 갔다가 로사를 만나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로사와 결혼한 미야는 곧바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돈을 보고 ‘추녀’와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다.
“미야는 과르디올라의 미망인과 결혼한 게 아니야. 미망인의 과르디올라과 결혼한 거지.”
앞의 과르디올라는 로사의 전 남편 이름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스페인어로 ‘돼지 저금통’과 비슷한 발음이 과르디올라고 한다. 사람들은 발음이 비슷한 두 이름을 빗대어 미야를 놀리곤 했다. 각종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사람들이 구석에서 수군대니 미야는 창피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됐다.
새 남편의 하소연을 들은 로사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진심을 믿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이상한 소리를 하니 속이 무척이나 상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집을 짓도록 해요. 지금은 다들 당신이 부자인 나와 결혼했다고 놀리지만, 거꾸로 부자인 나와 결혼했다고 부러워하도록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집을 짓는 거예요.”
“어디에 어떤 집을 짓는다는 말이오?”
“얼마 전에 우리가 페레 비달로부터 산 집과 땅이 있잖아요! 땅 면적이 1800㎡ 정도는 되지요. 그 건물을 허물고 화려한 대저택을 짓는 거예요.”
로사의 제안을 들은 미야의 두 눈이 번쩍 하고 크게 벌어졌다. 그는 아내의 말이 기발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내게도 좋은 생각이 있지.”
“그게 뭔가요?”
사실 미야는 페레 비달로부터 산 집을 보러 갔다가 길 건너편에 있는 다른 저택을 보게 됐다. 그는 그 저택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바르셀로나에 단 하나밖에 없는 훌륭한 설계로 지어진 집이었다.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카사 바트요였다. 그는 비달로부터 산 집에서 카사 바트요를 볼 때마다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가우디 씨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합시다. 새로 산 집 건너편에 있는 카사 바트요 못지않은 아름다운 집을 부탁하는 거요.”
그런데, 로사는 가우디의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중세 시대의 화려한 성이나 궁전 같은 건물을 더 선호했다. 하지만 남편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 짓는 건물이니만큼 남편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가우디를 찾아가 건축을 부탁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1층은 미야, 로사 부부가 사용하고, 나머지 층은 세를 놓을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가우디는 흔쾌히 승낙했다.
가우디는 이듬해 2월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다 성모마리아 신봉자였다.. 그는 부부의 새 집을 ‘성령의 상징’이 되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집의 처마 돌림띠에는 묵주에나 있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가우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집에 동상을 세우려고 했다.
“미야 씨, 그리고 로사 부인. 새 집에 성모마리아와 대천사 미카엘, 가브리엘의 동상을 세우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집으로서 완성도가 높아질 겁니다.”
미야, 로사 부부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성당도 아니고 일반주택에 성모마리아 등의 동상을 세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들은 생각했다.
“가우디 씨, 새 집의 콘셉트를 ‘성령의 상징’으로 잡은 것은 다소 못마땅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상은 절대 세울 수 없군요. 무슨 귀신이 나오는 집도 아니고….”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건축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겠네요. . 다른 사람을 구해보시죠.”
부부의 반대에 부닥친 가우디는 건축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부부는 난감해졌다. 사실 부부가 동상 설립에 반대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여러 성당이 방화에 휩싸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부는 성모마리아 동상을 세울 경우 자신의 집이 성당으로 오해받아 불에 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부부는 잘 아는 신부를 찾아가 가우디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가우디는 신부가 여러 차례 만류한 덕분에 공사를 끝까지 책임지기로 약속했다.
1906년에 시작한 공사는 4년이 지난 1910년 12월에 끝났다. 새 집에는 카사 미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 ‘미야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완공을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가우디가 워낙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설계를 도입해 건물을 짓는 바람에 바르셀로나시의 건축 규정에 어긋나는 내용이 많았다. 시는 미야 부부에게 이런 통지서를 보냈다.
‘귀하가 건축한 새 건물은 고도제한 등 시 건축규정에 위반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10만 페세타를 과태료로 납부하고, 위반 부분은 허물도록 하십시오.’
미야 부부는 얼굴이 노래진 채 통지서를 들고 가우디에게 달려갔다. 가우디는 통지서를 보자마자 화가 나서 시청으로 뛰어갔다. 그는 시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왜 건축 규정 따위로 예술가의 창의적 활동을 묶느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 시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가우디의 새 건물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총건축비 40만 페세타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과태료는 물어야했다.
미야 부부는 집이 완공되자마자 입주해 살았다. 하지만 로사 부인은 집의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1926년 가우디가 세상을 뜨자마자 부부가 살던 층을 완전히 프랑스풍으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1940년 남편 미야가 세상을 떠나자 6년 뒤 1800만 페세타를 받고 집을 처분해 버렸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가면 가우디의 여러 작품을 보게 된다. 카사 미야도 그 중 하나다. 외관만 봐도 가우디 작품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건물은 마치 물결이 이는 것 같다. 1층은 미야 부부가 살던 곳이다. 지금은 전시실이다. 4층은 아파트. 1909~1929년 바르셀로나를 알려주는 각종 자료 전시실과 20세기 초 바르셀로나 부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다락은 가우디를 소개하는 공간이다. 팔라우 구엘처럼 이 건물 옥상도 다양한 모양의 굴뚝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