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에게 해의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가득 끼었다. 점심 무렵 선선하던 바람은 제법 거칠어진 상태였다. 하늘 높이 날던 물새들은 고도를 낮춰 수면 근처를 스치듯 비행했다. 저녁 무렵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배 아홉 척이 에게 해 한가운데를 천천히 달렸다. 각 배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모두 용모가 준수하고 인상이 뚜렷했다. 제각각 떼어놓고 보면 당대의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사내들이었다.
가장 앞서 달리던 배의 갑판에는 여러 사내가 모였다. 선수에는 헤라 여신을 조각한 나무상이 세워졌다. 도도나에 있는 제우스의 성스러운 참나무로 만든 조각이었다. 여신상을 붙들고 먼 바다를 내다보던 한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밤 폭풍우가 몰려올 걸세. 우리 중 누구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폭풍일 거야. 우리의 원정을 시기하는 올림포스신의 한 신이 의도적으로 보내는 폭풍이지. 모두 조심하라고 이르도록 하게. 배 아홉 척이 흩어지거나, 난파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전하게.”
폭풍우를 예견한 사내는 린케우스였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도, 장벽 같은 안개도 뚫고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의 눈에 수십km 밖에서 다가오는 잔혹하리만치 거대한 폭풍우 구름이 보였다.
린케우스의 이야기를 들은 사내들은 다른 배에 화살을 쏘아 폭풍우의 도래를 알렸다. 전갈을 마친 뒤 한 사내가 주변에 모인 다른 사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폭풍우만 지나가면 헬레스폰토스해협까지는 순탄하게 항해할 수 있을 걸세. 다들 오랜 바다생활이 처음이어서 힘이 들 테지만 조금만 참고 오늘 밤을 잘 넘기도록 하세.”
사내의 이름은 이아손이었다. 그는 이올코스의 왕이었던 크레테우스의 손자였다. 원래 크레테우스가 죽은 뒤 이아손의 아버지인 아이손이 왕위를 승계하게 돼 있었지만, 그의 동생인 펠리우스가 형을 몰아내고 왕 자리를 빼앗고 말았다. 삼촌의 위협을 피해 숨어 다니던 이아손은 성인이 됐을 때 펠리우스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인 왕 자리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겁을 먹은 펠리우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머나먼 코르키스 땅에 아레스 신의 숲이 있다. 거기에 1000년 묵은 참나무가 있지. 그 나무 가지에 마법의 황금 양털이 걸려 있어. 그 양털을 가져오면 왕 자리를 너에게 돌려주마.”
아이손은 에게해를 건너 머나먼 항해를 떠나기 위해 그리스 전국에서 도움을 줄 영웅을 모았다. 그의 호소를 들은 수많은 청년이 모여들었다. 당대 최고의 역사 헤라클레스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는 아내 메가라와 두 자식을 살해한 잘못에 대한 죗값으로 미케네의 겁쟁이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위해 열두 가지 과업을 달성해야 했다. 지금은 그중 네 번째 과업인 ‘에리만토스의 살인 야생 멧돼지’를 처단하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헤라클레스 외에 아테네의 건국 영웅인 테세우스,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날카로운 눈을 가진 린케우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 오르페우스 등 50여 명이 이아손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스 최고의 목수 아르고는 배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배를 제작했다. 영웅들은 배에 ‘아르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황금 양털을 구하러 떠나는 자신들을 ‘아르고아테우스’, 즉 아르고 원정대라고 불렀다.
신화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르고 원정대가 타고 간 배가 ‘아르고 호’ 한 척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르고 호’ 말고도 여덟 척을 더 만들어 총 아홉 척이라고 한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르고 원정대는 아홉 척의 배 이야기를 근거로 만들어진 신화다.
린케우스의 예견대로 그날 밤 끔찍한 폭풍우가 아르고 원정대를 덮쳤다. 그리스 최고의 목공이 만든 배였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폭풍우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르고가 배를 얼마나 튼튼하고 안전하게 만들었던지, 부서지거나 뒤집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르고 원정대는 사흘 밤낮이 지나고 나흘째 새벽이 올 때까지 엄청난 높이의 파도에 휘말려 이리저리 떠다니기만 했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드디어 희망의 여명이 밝았다. 태양을 다스리는 신 헬리오스가 수평선 너머 짙은 구름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나마 빛을 이오니아해에 보내주었다. 빛이 수면에 비치자마자 아르고 원정대를 그렇게 괴롭혔던 폭풍우와 높은 파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잠잠해졌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 거야? 우리는 그리스 에게해를 항해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그곳과 경치가 완전히 다르군.”
밤새 폭풍우에 시달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아손과 헤라클레스가 배 갑판으로 나와 바다를 둘러보았다. 멀리 육지가 보였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를 따라 나온 다른 영웅들에게도 낯선 곳이었다.
“이아손, 배가 여덟 척뿐이야. 한 척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간 모양이야.”
맑은 눈으로 바다를 쭉 훑어본 린케우스가 이아손과 다른 영웅들에게 배 한 척이 보이지 않는다고 알렸다. 아마도 높은 파도가 그 배를 다른 배 여덟 척과 떼어 놓은 모양이었다.
“린케우스, 자네의 명안으로 주변을 다시 살펴보게. 아마 육지에 배가 난파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린케우스는 이아손의 말대로 눈을 비빈 뒤 다시 바다와 주변 육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먼 육지 쪽에 작은 배 한 척이 보였다. 며칠 전 같이 출항했던 아르고 원정대 배가 분명해 보였다.
“배가 부서졌을지 모르니 우리가 저쪽으로 가도록 하지. 저들을 다른 배에 나눠 태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 배를 만들어야 하는 건지 가서 보고 결정하도록 하세.”
아홉 번째 배는 완전히 부서졌다. 새로 고쳐 탈 처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배에 탄 영웅들은 지쳐 보이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매우 활기로 넘쳐났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 신난 표정이었다. 헤라클레스가 배에서 내려 난파선으로 갔다.
“그리스의 영웅들이여, 모두 다른 배로 옮겨 타도록 하게. 폭풍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어. 서둘러 다시 그리스 쪽으로 돌아가야 하네.”
아홉 번째 배의 영웅들은 모두 머뭇거리기만 했다. 다른 배에 옮겨 탈 생각이 없는 듯했다. 헤라클레스가 앞으로 나서 다시 물었다.
“자네들은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우리와 함께 다시 원정에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구먼. 솔직히 자네들 속마음을 이야기해보게나. 아르고 원정대의 어느 누구도 자네들에게 동행을 강요하지는 않을 걸세.”
헤라클레스가 말을 마치자 아홉 번째 배의 선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사실 우리는 첫날 밤 이곳에 난파했다네. 자네들이 며칠 동안 바다에서 폭풍우와 싸우는 모습을 여기서 다 볼 수 있었지. 하지만 도우러 갈 수는 없었어. 그동안 우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네. 이곳은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이야. 우리끼리 상의했는데,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살기로 했네. 우리를 이해해 주게나.”
이아손과 헤라클레스는 그의 말을 다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그대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제 여덟 척으로 줄어든 아르고 원정대의 영웅들은 낯선 땅에 정착하게 된 동지들에게 성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르고 원정대의 아홉 번째 배가 난파한 곳은 오늘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였다. 신화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바르셀로나 몬주익언덕 인근이었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땅에 도시를 지었고, ‘바르사 노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르사’는 ‘아홉’이라는 뜻이고, ‘노나’는 배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아르고 원정대에 헤라클레스 외에 헤르메스가 동참했다고 한다. 둘은 모두 제우스의 아들이었으니, 이복형제였던 셈이다. 아홉 번째 배가 바르셀로나에 난파한 데에는 헤르메스의 의중이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헤르메스는 바르셀로나를 만든 신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헤르메스 신의 동상이 많은 것인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바르셀로나라는 이름과 관련해 다른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로마가 스페인을 지배하기 이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스페인을 다스릴 때의 일이다. 로마를 침공했던 한니발의 아버지 한니발 바르카가 바르셀로나 총독으로 파견됐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바르셀로나에 반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따 ‘바르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몬주익언덕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주경기장이었던 몬주익스타디움이 있다. 당시 올림픽 개막식 공연에는 이아손과 아르고원정대의 전설이 등장했다. 몬주익언덕은 당시 황영조가 남자마라톤에서 우승한 기억 때문에 우리에게도 친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