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4월 23일 빨간 장미 선물하는 이유?

by leo


먼 옛날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나라에 용 한 마리가 날아왔다. 용은 산속 동굴에서 살면서 가끔 인근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달라며 주민들을 괴롭혔다.


“배가 너무 고프군. 매일 내게 먹을 것을 내놓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불을 뿜어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


용의 협박이 두려웠던 주민들은 처음에는 닭을 한 마리씩 먹이로 주었다. 하지만 용이 점점 자라면서 먹는 양이 많아짐에 따라 닭 한 마리로는 배를 채우기가 어렵게 됐다. 용은 더 큰 먹이를 요구했다. 주민들은 염소나 양을 한 마리씩 바쳐야 했다.


시간이 흘러 용은 완전히 다 자라 엄청난 덩치를 갖게 됐다. 이제는 염소, 양 따위로는 배를 채울 수 없게 됐다. 주민들은 할 수 없이 매일 소 한 마리씩을 먹이로 가져다줘야 했다. 매일 용에게 소를 한 마리씩 바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 나라에 있던 닭, 염소, 양, 소는 바닥이 나 버렸다. 사람들은 용에게 더 이상 줄 먹이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우리를 지배하는 무서운 창조물이시여! 이제 당신에게 바칠 먹이가 없나이다. 가난한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부자 나라로 날아가시는 게 어떠하신가요?”


더 이상 바칠 먹이가 없다고 호소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던 용은 화를 벌컥 냈다. 그는 입에서 엄청나게 뜨겁고 큰 불덩어리를 내뿜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게 먹이로 줄 가축이 없다면 내일부터는 너희의 아들, 딸을 먹이로 바쳐라. 만약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당장 산 아래로 내려가 너희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용은 동굴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사뿐히 날아오르더니 입에서 불을 내뿜어 집 서너 채를 순식간에 불태워 버렸다.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은 기겁했다.


“알겠습니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내일부터 아들, 딸을 매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분노를 거두시고 동굴로 돌아가 계시기 바랍니다.”


용이 동굴로 돌아간 후 주민들은 광장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나라를 다스리던 왕도 참석했다. 그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들, 딸을 괴물의 먹이로 바칠 수도 없고, 그놈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우리 모두 불에 타 죽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저 엄청난 괴물에 맞서 싸울 힘도 없으니, 도무지 방법이 없군요.”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일단 저놈에게 우리의 자식들을 줄 수밖에 없소. 스무 살 이하 소년, 소녀의 이름을 다 적도록 합시다. 그리고 매일 추첨을 통해 용의 먹이로 희생될 아이들을 고르도록 합시다. 괴롭고 힘들지만 모두 다 죽을 수는 없지 않소?”


주민들은 할 수 없이 용에게 소년, 소녀를 먹이로 바치기로 했다. 왕도 이 같은 백성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 노인이 종이 수백 장에 소년, 소녀의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그는 종이를 보자기에 넣어 흔들고 난 뒤 눈을 감고 손을 집어넣어 그중 한 장을 꺼냈다.


“아! 이런. 골치 아프게 됐군요. 첫 희생자는 다름 아닌 임금님의 따님인 마리엔 공주님이십니다.”


“뭐라고? 내 딸을 용에게 먹이로 바친다고….”


첫 희생자로 선택된 소녀는 다름 아닌 왕의 딸이었다. 왕의 얼굴은 하얘졌다. 그는 외동딸을 용에게 먹이로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모두 찬성한 일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왕은 괴로워하면서 성으로 돌아갔다.


“공주님, 큰일 났어요. 내일 공주님이 용에게 잡아먹히러 동굴로 가셔야 한답니다요.”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내가 용에게 잡아먹히다니….”


백성 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성의 시녀가 공주에게 서둘러 달려가 비보를 전했다. 내용을 상세하게 들은 공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공주가 용의 먹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성의 시종, 병사 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공주는 성으로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왕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어서 왕이라도 함부로 뒤집을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공주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사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무섭고 떨리지만 두 분을 위해 그리고 백성을 위해 내일 용의 먹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는 대성통곡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동안 그녀를 돌봐준 여러 시종과 시녀, 병사에게도 일일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저를 잘 보살펴주셔서 이 나이까지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잘 자랐답니다. 그간 고마웠습니다. 다들 안녕히 계세요.”


공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건네자 성문 밖까지 따라 나온 모든 사람은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어떤 시녀들은 성벽을 붙잡고 머리를 찧으며 통곡하기도 했다. 공주는 그들의 눈물을 뒤로 한 채 작은 말을 타고 용이 사는 동굴로 떠났다.


공주가 떠난 직후 하얀 말을 탄 기사가 성 주변을 지나갔다.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옷을 입었고,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방패를 들었고, 옆구리에는 긴 칼을 찬 기사였다.


기사의 얼굴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울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공주의 유모를 붙들고 물었다.


“이것 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많은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소?”


“아이고, 기사님, 공주님 좀 살려주세요. 오늘 공주님이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나쁜 용에게 잡아먹히게 됐답니다. 공주님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아무도 없답니다.”


유모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기사는 성문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왕 부부에게 다가갔다. 그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왕에게 인사를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라의 왕이시여! 저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기사 상 조르디입니다. 유모에게서 오늘 비극적인 사연을 들어 알게 됐습니다. 공주님을 용의 먹이로 희생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산의 동굴에 가서 용을 죽여 나라의 골칫거리를 없애고, 공주님을 구해와 왕의 슬픔을 덜어드리겠습니다.”


기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공주가 간 동굴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기사가 도착했을 때 공주는 동굴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용은 동굴에서 천천히 기어 나와 코를 그르렁거리며 ‘젊은 처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늘의 식량은 얼마나 맛있을지 재어보는 것 같았다.


“끔찍하게 생긴 괴물아! 당장 공주에게서 떨어져 뒤로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공주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라도 건드렸다간 네 놈은 뼈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리라.”


용이 공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본 기사는 칼을 빼어들고 용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오른손에 든 칼로 왼손에 든 방패를 두들기며 용의 정신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용은 처음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후 ‘아주 작은’ 기사 하나가 하얀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는 매우 화 난 표정으로 기사를 향해 머리를 돌려 입에서 불을 뿜어낼 준비를 했다.


기사가 적당한 거리까지 달려오자 용은 뜨거운 불을 쏟아냈다. 불과 수 초 만에 집 여러 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그 무서운 화염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사가 왼손에 든 방패를 앞으로 내밀자 용이 내뿜은 불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깜짝 놀란 용이 연이어 두 번, 세 번 불을 내뿜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기사의 방패는 용의 불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기사는 이번에는 오른손에 든 칼을 높이 들어 용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얼마나 빠르고 힘찬 팔놀림이었던지 용이 피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용은 기사의 칼을 용케 피하더니 긴 꼬리를 휘둘러 말의 옆구리를 세게 때렸다. 그 때문에 말은 크게 상처를 입었고, 기사는 말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기사는 땅바닥에 여러 차례 뒹굴더니 재빨리 일어섰다. 그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왼팔에 든 방패를 똑바로 세우고 오른팔에 든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용도 처음보다는 신중한 자세로 기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용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시 힘을 끌어올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뿜어낸 어떤 불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용이 불길을 가다듬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조짐을 보이자, 기사는 용의 입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용은 깜짝 놀라 있는 힘을 다해 불길을 뿜어내려 했다. 기사는 용의 옆구리를 향해 한 바퀴 구르더니 재빨리 다시 일어나 칼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용의 심장을 향해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용은 불길을 뿜어내느라 온 힘을 다 쏟은 탓에 미처 피할 여력마저 없었다.


“크~~~와~~앙~~~”


용의 입에서 엄청나게 큰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는 소리이면서 한편으로는 엄청난 고통을 담은 절규였다. 용은 딱 두 번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할 정도의 괴성을 지르더니 털썩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기사는 천천히 용에게 다가가 심장에 깊숙이 박힌 칼을 뽑아내 바지에 깨끗이 닦았다. 멀리서 기사와 용의 대결을 지켜보던 공주가 달려와 상 조르디를 껴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바로 그때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용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흘러내린 땅에서 작은 나무 하나가 솟아올랐다. 바로 장미였다. 나무는 용의 피를 한껏 빨아들이더니 금세 빨간 장미꽃 여러 송이를 피워냈다. 기사는 나무에 조심스레 다가가 가장 크고 가장 빨갛고 향기로운 장미 한 송이를 꺾어 공주에게 바쳤다.


기사는 공주를 말에 태우고 죽은 용을 끌고 마을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은 용이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며 여전히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기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과 백성 모두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교회를 세운다면 용은 부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기사에게 개종하고 교회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상 조르디가 떠나간 뒤 용을 죽인 바로 그 장소에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와 기사에게 바쳤다.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샘물이 하나 생겼다. 병든 사람이 그 샘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


기사 상 조르디가 공주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준 뒤부터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해마다 4월 23일이 되면 남성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빨간 장미를 한 송이 선물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여성이 장미를 받은 답례로 책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는 풍습도 태어났다.


상 조르디는 영어로는 ‘성 조지’, 그리스어로는 ‘게오르기오스’, 포르투갈어로는 ‘상 조르주’라고 불리는 전설의 인물이다. 원래 그리스 카파도키아 출신의 로마군 병사였는데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중세에 들어 그는 기사로 변신해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 역사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12세기 십자군의 중동 원정 때에는 상 조르디가 십자군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 군대에 맞서 싸웠다는 전설까지 창조됐다.


상 조르디는 영국, 우크라이나, 불가리아, 조지아 등에서 수호성인으로 숭앙받는다. 카탈루냐에서는 1507년 이래 500년 이상 수호성인으로 받들어져 왔다. 매년 4월 23일은 카탈루냐 지방에서 ‘상 조르디의 날’이인데, 이날은 303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축일이다. .


바르셀로나에는 세계적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만든 까사 바트요라는 건물이 있다. 환상과 상상이 넘쳐난다는 평가를 받는 건물이다. 이곳은 1904~1906년에 만들어졌는데, 가우디가 이전에 있던 집을 리모델링한 것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가우디가 이 건물에 담은 모티브는 바로 상 조르디와 용이었다. 까사 바트요를 가만히 살펴보면 곳곳에서 전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둥근 건물 지붕은 비늘로 덮인 용의 등처럼 보인다. 뾰족한 탑은 상 조르디가 용을 찌른 창을 상징한다. 각 방 앞의 테라스는 정면에서 보면 용의 머리처럼 보이는데 파도가 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까사 바트요를 ‘용의 집’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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