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기 44년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의 작은 어촌 이리아 플라비아에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날 오후의 일이었다. 어찌나 비바람이 거칠었던지 수십 년 동안 어업에 매달렸던 어부들조차 일찌감치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배가 제대로 잘 있는지 한 번 살펴보고 올게.”
어부 루고는 아침에 배를 해안 깊숙한 곳으로 끌어올려 큰 나무에 밧줄로 묶어 놓았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해안으로 다시 나가보기로 했다. 그는 큰 파도를 조심하라는 아내의 염려에 옅은 미소로 답한 뒤 비를 흠뻑 맞으며 바다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저게 뭐지?’
루고가 자신의 배에 묶인 밧줄을 한 번 더 단단하게 당길 때 그다지 멀지 않은 바다에서 배 한 척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다.
루고가 손바닥을 눈 위에 대고 비를 가린 채 배를 쳐다보려고 할 때 엄청나게 큰 파도가 배를 덮치고 말았다. 배에서 무엇인가 튕겨 나와 바다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사람 같아 보였다.
루고는 도대체 누가 이런 폭풍우에 배를 몰다 저런 사고를 당했는지 싶으면서도 너무 비바람이 심해 도와주러 달려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폭풍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 루고는 전날 밤 배에서 떨어진 사람의 안부가 걱정스러워 해안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의 배가 안전한지 먼저 살펴본 그는 해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한쪽 구석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초대형 가리비 껍데기들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달려가 껍데기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서 사람 시신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아니, 이 사람은!’
가리비에 둘러싸인 사람은 루고가 아는 인물이었다. 갈리시아는 물론 스페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하러 다녔던 야고보라는 유대인이었다. 루고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그는 4년 전 사라고사의 에브레강에서 설교하던 중 홀연히 나타난 성모 마리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유다의 마지막 왕 헤롯 아그리파(아그립바)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왜 그의 시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
야고보의 시체가 배에 실려 왔다는 소문은 금세 갈리시아 전역에 퍼졌다. 소문이라는 녀석은 원래 입이 가벼워서 하루가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게 마련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사가 야고보의 시신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갈리시아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야고보의 유해는 처음에는 이리나 플라비아의 한적한 곳의 돌더미에 파묻혔다가 나중에 다른 도시로 옮겨졌다.
2.
사실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12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했다. 그의 시신이 먼 스페인까지 가서 이리나 플라비아에 묻힌 것과 관련해 다른 전설도 전한다.
예수의 사도들은 왕의 부하들을 매수해 야고보의 시신을 빼돌려 야파항으로 옮겼다. 그들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야고보의 사체를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않나? 예루살렘에는 묻을 수가 없으니 그가 과거에 선교 활동을 하셨던 스페인으로 모셔 가서 안장시키도록 하세.”
“배를 어떻게 구하지? 가진 돈도 별로 없는데….”
사도들은 야고보의 시신을 부두로 힘들게 옮겼지만 배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배 한 척이 사도들 곁으로 다가왔다. 사도들은 누가 배를 몰고 오는지 궁금했다. 배가 가까이 오자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나무로 만든 목선이 아니라 돌로 만든 석선이었다.
“주님께서 야고보의 시신을 옮기라고 보내주신 배인 모양일세.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모양이야.”
사도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끌어올리자 배는 저절로 바다로 미끄러져 갔다. 아무도 노를 잡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스페인 쪽을 향해 달려갔다. 어부 루고가 배와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상한 석선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리아 플라비아의 여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해안으로 달려왔다. 여왕의 이름은 ‘암늑대’라는 뜻의 로바였다.
“너희들은 누구이기에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해안에 배를 내리는 것이냐?”
“저희들은 예루살렘에서 건너온 기독교도들입니다. 아그리파 왕에게 목숨을 잃은 야고보를 스페인 땅에 안장하기 위해 험한 바다를 헤쳐 왔습니다. 이곳에 그분을 묻게 해 주십시오.”
로바 여왕은 낯선 기독교인들을 해치우고 싶었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민하다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야고보를 묻을 수 있게 해 주겠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저기 피코사크로산에는 용과 거친 황소 두 마리가 살고 있다. 용을 해치우고 황소들을 내게 끌고 오도록 하라.”
사도들이 산에 올라갔다가는 용이 입에서 내뿜는 불에 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게 여왕의 속셈이었다.
사도들은 주저하지 않고 산으로 달려갔다. 산 중턱에서 커다란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입에서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사도들은 놀라기는커녕 차분하게 십자가를 꺼내 용에게 보여주었다. 용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도들 앞에 이번에는 황소 두 마리가 나타났다. 코에서 김을 내뿜으며 금세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사도들은 이번에도 십자가를 꺼냈다. 황소들은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져 멍에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사도들이 용을 없애고 황소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자 여왕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정말 하늘의 가호를 받는 사람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야고보의 시신을 묻을 땅을 그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3.
수백 년이 흘러 야고보가 스페인에 묻힌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린 818년 어느 날이었다. 이리나 플라비아에 사는 목동 펠라기우스는 밤늦게 양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다 하늘의 별들이 이상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별이 마치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도대체 하늘의 별들이 왜 저러는 거지? 마치 내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는 것 같잖아.’
신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웠던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곧바로 테오데미르 주교를 찾아갔다. 이상한 느낌이 든 주교는 그날 저녁 펠라기우스가 말해주었던 곳으로 가보았다.
펠라기우스의 말처럼 ‘별들의 강’인 은하수의 모습은 달라보였다. 마치 그에게 ‘이곳으로 가라, 저곳으로 가라’ 하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는 별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는 조그마한 무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별들은 무덤 위에서 쏟아지듯이 빛을 발산했다.
주교는 무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조그마한 이름이 무덤 앞에 새겨진 게 보였다.
“사도 야고보!”
주교는 이름을 읽는 순간 놀라서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명색이 주교인데 야고보의 이름을 모를 수 있을까? 예수를 모신 12사도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를. 주교는 순간적으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설처럼 퍼진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주 먼 옛날에 예루살렘에서 성인의 유해를 실은 배가 이곳으로 건너왔고, 그 유해가 어딘가에 묻혔다는 내용이었지. 그렇다면 그 전설이 사실이고, 유해는 야고보란 말인가?’
주교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갈리시아를 통치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 국왕에게 달려갔다. 그는 평소 주민들로부터 들었던 전설과 자신이 신학 공부를 해서 알던 내용을 모두 국왕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무덤의 유해가 야고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놀라운 소식에 흥분한 알폰소 2세는 당장 무덤이 있는 자리에 예배당을 지어 야고보의 유해를 모시라고 지시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예배당이 완공된 직후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가 야고보의 유해에 가장 먼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해서 알폰소 2세는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첫 번째 순례자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 이후 1884년 레오 13세 교황은 칙령을 내려 ‘테오데미르 주교가 발견한 유해가 야고보의 것’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사람들은 이후 야고보가 묻힌 도시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고 불렀다. 산티아고는 야고보(Jacob)를 뜻하는 갈리시아어 ‘이아고(Iago)’에 ‘성인(聖人)’을 뜻하는 스페인어 ‘상트(Sant)’가 합성된 단어다. 콤포스텔라는 ‘별이 빛나는 들판’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