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퀴리날레 언덕과 첼리오 언덕을 포함시켜 로마를 확장했다. 그리고 주민들을 두 곳에 나눠 살게 됐다.
두 왕은 특정한 거주지를 갖게 됐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을, 타티우스는 처음에 점령했던 카피톨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을 차지했다.
두 사람은 카피톨리노 언덕 언저리의 평원에 자라던 나무를 베어내고 웅덩이를 메웠다. 그리고 평원을 광장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로마인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두 왕은 그곳에서 모임을 가졌고 불카누스 신전에서 일을 처리했다. 이 신전은 포로 로마노 약간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두 왕은 여러 신전과 제단을 건설해 각종 전쟁에서 맹세를 바친 신에게 헌정했다. 로물루스는 사크라 비아에서 팔라티노 언덕으로 연결되는 포르타 무고니아 근처에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이 신은 로물루스의 맹세를 듣고 달아나는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 전투를 다시 하게 만들었다.
타티우스는 태양과 달의 신, 그리고 사투르누스와 레아 신에게 신전을 바쳤다. 또 베스타, 불카누스, 다이애나, 에니알리우스는 물론 그리스어로는 이름을 표기하기조차 힘든 여러 신에게 신전을 헌정했다. 그는 또 모든 쿠리아에 퀴리티스라고 불리는 식탁들을 건설했다. 유피테르의 부인인 유노 신에서 바치는 이 식탁들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두 왕은 5년 동안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통치했다. 함께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카메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이 부족은 끊임없이 도적떼를 보내 로마의 농촌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들은 사건을 조사하자는 로마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왕은 전투에서 카메리아를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해 점령했다.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땅의 3분의1을 빼앗아 로마인에게 나눠주었다.
카메리아인이 새로운 정착자들을 괴롭히자 두 왕은 다시 전쟁을 벌여 그들을 달아나게 했다. 두 왕은 카메리아인의 모든 재산을 로마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살고 싶어 하는 카메리아인은 모두 받아주었다. 그 수는 4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각 쿠리아에 배분됐다.
두 왕은 카메리아를 로마 식민 도시로 만들었다. 카메리아는 로마 건국 이전에 알바의 식민지로서 가장 축복받은 원주민 거주지였다.
두 왕의 공동 통치 6년째 되던 해 로마는 다시 한 번 로물루스에게 맡겨줬다. 타티우스는 라비니움의 주요 인물들이 꾸민 음모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음모의 전모는 이러했다.
타티우스의 친구 여러 명이 도적떼를 끌고 가 라비니움 영토를 약탈했다. 그들은 라비니움인의 재산을 빼앗고 가축 떼도 훔쳐 갔다. 그들을 도와주러 간 라비니움 병사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라비니움은 사절단을 보내 보상을 요구했다. 로물루스는 분노했다.
“부상을 입힌 사람은 잘못에 따른 처벌을 받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타티우스는 친구들을 옹호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적에게 넘겨 재판을 받게 할 수 없소. 로마 시민이 외부인에게 재판받게 할 수는 없소. 다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로마에 와서 로마 법에 따라 가해자를 고소하시오.”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한 사절단은 불만에 가득 찬 채 돌아갔다. 사비니인 중 일부는 사절단의 행동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래서 사절단을 몰래 뒤따라가 그들이 밤에 천막에서 잠을 자는 동안 돈을 훔치고 목을 베어버렸다. 음모를 눈치 챈 일부 사람은 달아나 겨우 라비니움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라비니움과 다른 여러 도시에서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해 무법적 행동에 항의하면서 정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절단에게 저질러진 폭력은 로물루스에게는 끔찍한 범죄로 보였다. 신성한 법을 어긴 것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속죄해야 할 일이었다. 타티우스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본 로물루스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사슬에 묶어 사절단에게 인도했다.
타티우스는 분노했다. 로물루스가 그의 사람들을 넘겨준 데 대해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끌려간 친구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대부분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서둘러 말을 달려 길에서 사절단을 따라잡아 친구들을 다시 데려왔다.
얼마 후 그는 로물루스와 함께 희생제례를 치르려고 라비니움을 방문했다. 두 왕이 로마의 번영을 위해 고대의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은 필수적인 행사였다.
살해당한 사절단의 친구와 친척이 타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제단에서 소를 잡을 때 사용하던 칼과 소를 구울 때 쓰던 쇠꼬챙이를 이용해 제단에서 그를 살해했다. 리키티우스 마케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함께 가지 않았다. 희생제례 때문에 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친 사람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해주라고 설득하려고 혼자 라비니움에 갔다. 사람들은 화가 났다. 가해자가 로물루스와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인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살된 사절단의 친척들이 대거 타티우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더 이상 약식처형을 피할 수 없었고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타티우스의 시체는 로마로 옮겨졌다. 그는 명예롭게 매장됐다. 로마는 해마다 그에게 공식적으로 헌주를 바친다.
두 번째로 단독 집권자가 된 로물루스는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물과 불 사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사절단에 저지른 범죄를 속죄하도록 했다. 타티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로마에서 달아났다. 로물루스는 타티우스 살해 음모에 가담한 라비니움 사람들을 인도받아 재판에 세웠다. 이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복수했을 뿐이라면서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로물루스는 그들을 무죄로 풀어주었다.
로물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피데나이로 쳐들어갔다. 로마에서 12㎞ 정도 떨어진 도시였다. 당시에는 큰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다.
로마가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 크루스투메리움이 보내준 식량이 배에 실려 강을 따라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피데나이 사람들은 배에 몰려가 식량을 빼앗고 배에 탄 로마인을 살해했다. 로마가 보상을 요구하자 단호히 거부했다.
분노한 로물루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의 영토로 쳐들어갔다. 그는 상당한 전리품을 챙겨 로마로 돌아갔다.
피데나이가 다시 전쟁을 걸어오자 그는 싸울 기회를 주었다. 양측에서 많은 사람이 쓰러지는 치열한 접전 끝에 피데나이는 패했다. 로물루스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 피데나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첫 공격에서 도시를 점령한 로물루스는 상당수 시민을 처벌했다. 그곳에 경비병 300명을 배치하고 토지의 상당부분을 빼앗아 로마인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피데나이를 로마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도시는 노멘툼, 크루스투메리움과 함께 알바가 건설한 도시였다. 알바에서 떠난 삼형제가 각 식민지의 지도자가 됐으며 그 중 맏형이 피데나이를 다스렸다.
피데나이와의 전쟁에 이어 로물루스는 다시 카메리아와의 전쟁에 나섰다. 카메리아는 로마가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이 카메리아에 살고 있던 로마인을 공격했다. 그들은 로마가 재앙으로 처참하게 파괴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식민지단을 죽이거나 쫓아버렸다.
복수에 나선 로물루스는 두 번째로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했고, 병사들에게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락했다. 또 이전에 로마 식민지단이 차지한 땅 외에 그들의 토지 절반을 추가로 빼앗았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반란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병력을 남겨놓은 뒤 귀국했다.
카메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전리품으로 청동 전차를 만들어 불카누스 신에게 바쳤다. 그 옆에는 그리스어로 업적을 기록한 명문을 새긴 조각상을 세웠다.
로물루스가 치른 세 번째 전쟁은 당시 에트루리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로마에서 28㎞ 정도 떨어진 베이이였다. 이 도시는 높은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고, 면적은 아테네 정도였다.
베이이는 전쟁의 명분으로 피데나이 침략을 내세웠다. 그들은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다.
“피데나이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빼앗은 영토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시오.”
베이이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 그들은 피데나이 인근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로물루스는 그들의 공격에 대해 사전 정보를 수집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정예병을 이끌고 나서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전투 준비를 마친 두 군대는 평원에서 격돌했다. 두 군대는 오랫동안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갔다. 밤이 돼서야 양측 군대는 물러났다. 이날 전투는 무승부였다.
머지않아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로마군은 로물루스의 전략 덕분에 승리를 거뒀다. 그는 밤에 베이이군의 진지에서 멀지 않은 고지대를 점령했다. 첫 전투 이후 로마에서 달려온 최정예 기병과 보병을 그곳에 숨겼다.
로마와 베이이 군대는 평원에서 만나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싸웠다. 로물루스는 고지에 숨어 있던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뒤에서 베이이군을 공격했다. 적은 지쳤던 반면 이들은 기력이 왕성했다. 로마군은 어렵지 않게 적을 패주시켰다.
베이이 병사 중 일부는 전투 중에 피살됐고, 대부분은 헤엄쳐 건널 생각으로 피데나이 인근을 흐르는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부상당한데다 전투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강을 헤엄쳐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헤엄칠 줄도 모르고 전방을 살피지도 않았던 다른 병사들은 위험 앞에서 평정심을 잃었고, 강물의 흐름에 휩쓸려갔다.
베이이군이 첫 계획의 실수를 깨닫고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면 더 큰 불행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생각에, 그리고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 공격한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다시 대군을 이끌고 나와 로마에 도전했다. 베이이군은 베이이에서 징병한 병사들과 동맹을 도우러 달려온 다른 에트루리아 도시의 병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다시 치열한 전투가 피데나이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번에도 로마가 승리를 거뒀다. 로마군은 수많은 베이이 병사를 살해했고, 더 많은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그들의 진지도 점령했다. 그곳은 돈과 무기, 노예, 엄청난 보급품을 실은 선박 등으로 넘쳐났다. 많은 포로가 강을 따라 로마로 끌려갔다.
로물루스는 세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번 개선식은 앞의 두 차례보다 더 대단했다. 얼마 후 베이이에서 사절단이 찾아와 공격을 용서하라면서 전쟁을 끝내자는 뜻을 전했다. 로물루스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벌칙을 부과했다.
“일곱 개의 지역으로 불리는 테베레 강 근처의 땅을 로마에 넘겨주시오. 테베레 강 하구의 염전을 포기하시오. 앞으로 반란을 획책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인질 50명을 보내시오.”
베이이가 모든 요구조건에 동의하자 로물루스는 100년 기한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기둥에 그 조건을 새겼다. 귀향을 원하는 포로는 몸값을 받지 않고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로마에 남기를 원하는 포로가 돌아가려는 자보다 훨씬 많았다. 로물루스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여러 쿠리아에 배분했다. 그리고 테베레 강 근처에 땅을 나눠주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로물루스가 수행한 기념할 만한 전쟁들이다. 그가 이웃나라를 더 정복하지 못한 것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은 그가 아직 전쟁에서 더 맣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왕성한 나이일 때 발생했다. 이것과 관련해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로물루스의 인생에 대해 좀 우화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진지에서 병사들에게 연설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폭풍이 몰아쳤다. 폭풍이 멈췄을 때 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마르스에 의해 하늘로 올라갔다.’
반면 좀 더 그럴 듯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이렇다.
‘로물루스는 로마인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관습에 어긋나게 베이이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를 풀어줬다는 게 살해 이유였다. 또 로물루스가 원래 로마시민들과 나중에 새로 등록한 시민들을 똑같은 태도로 대하지 않고, 전자를 더 우대하고 후자를 멸시한다는 것도 이유였다.
범죄자를 처벌할 때 너무 잔인하다는 것도 이유였다. 예를 들면 그는 이웃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도적질을 한 혐의로 붙잡힌 로마인들을 혼자서 재판해 언덕 아래로 떨어뜨려 죽였다. 이들은 출신 성분이 미천한 것도 아니었고 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가혹하고 자의적인 것처럼 보였으며 왕보다는 독재자처럼 권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귀족들은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기로 했다. 이들은 원로원 건물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시체 조각을 하나씩 옷 안에 숨긴 뒤 건물에서 빠져나가 비밀스럽게 묻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로물루스는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로마의 시민권을 새로 얻은 사람들에게 살해됐다. 그들은 비가 내리고 하늘이 매우 어두울 때 범행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흩어졌고 호위병도 경계를 소홀히 했다. 사람들이 달아난 날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이날은 오늘날까지도 포풀리푸기아라고 불린다.’
로물루스의 탄생, 죽음과 관련해 신의 뜻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저명한 사람의 영혼을 하늘에 올리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신이든 인간이든 로물루스의 어머니를 범했을 때 완전일식이 일어났으며 밤처럼 완전한 어둠이 땅을 덮었다. 그가 죽었을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상이 로물루스의 죽음과 관련해 전해지는 내용이다. 그는 로마를 건국했고 시민들에 의해 첫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37년간 집권한 뒤 55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왕이 됐을 때 18세도 채 안 될 정도로 정말 젊었는데 역사를 기록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