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가 죽은 이듬 해 로마의 왕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인테르렉스’이라는 행정관 제도가 만들어져 공공업무를 총괄했다. 이 행정관 자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다.
로물루스 시절에 원로원에 등록한 귀족은 200명이었다. 이들은 추첨을 통해 데쿠리아(10명씩 모임)로 나뉘어졌다. 추첨으로 선정된 첫 데쿠리아 10명은 다른 원로원 의원으로부터 국가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데쿠리아 10명이 동시에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닷새씩 돌아가며 통치했다. 각자 통치 기간 동안 왕권을 상징하는 몽둥이인 파스케스와 다른 상징물을 갖고 다녔다. 권력 기간이 끝나면 데쿠리아는 다음 데쿠리아에 정부를 넘겨줬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권력이 이양됐다.
첫 데쿠리아가 정해진 50일 동안 통치한 뒤에 다른 데쿠리아가 권력을 넘겨받았다. 로마인은 잦은 권력 변화에 짜증을 내며 데쿠리아의 통치를 중단하기로 즉각 결정했다. 사람이 바뀔 때마다 목표가 달라졌고 타고난 능력도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부족, 쿠리아 별로 총회를 소집해 민회에서 정부 형태를 결정하라고 했다. 공공의 이익을 왕에게 맡기든지, 매년 선출하는 행정관에게 맡기든지 알아서 선택하라고 했다. 민회는 선택권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다. 대신 원로원에 결정권을 넘겨주었다. 원로원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만족하기로 민회는 결정했다.
원로원은 왕정을 계속 유지하는 방안을 골랐다. 어느 그룹에서 새 왕이 나와야할지를 놓고 갈등이 일었다. 로마를 다스릴 사람은 원래의 원로원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나중에 원로원에 등록한 사람 중에서 골라야 한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원로원은 결국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따른다는 조건하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먼저 원래의 원로원 의원들은 왕을 선출할 권리를 가지는 대신 그들 중에서 뽑아서는 안 된다.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골라야 한다. 아니면 새로 원로원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똑같은 권리를 준다.
원래의 원로원 의원들은 왕을 고를 권리를 선택하고, 모두 후보에서 빠지기로 합의했다.하지만 새로 들어온 원로원 의원들에게 왕이 될 권리를 양도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로마 밖에서 양 세력 중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사람을 골라 왕으로 선포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파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결론을 내린 뒤 사비니 족 출신의 한 사내를 선택했다. 유명한 인물인 폼폰 폼필리우스의 아들 누마 폼필리우스였다. 쿠레스에서 살던 그는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사려분별이 뛰어난데다 모든 면에서 왕으로서의 품위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쿠레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웃 도시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는 높은 평가를 받아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원로원은 다시 민회를 소집했다. 당시 인테르렉스였던 의원이 나서 이렇게 선언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왕정을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다. 누구에게 왕권을 넘겨줄지를 논의한 끝에 누마 폼필리우스를 골랐습니다.”
민회를 마친 뒤 인테르렉스는 귀족 중에서 사절단을 골라 누마를 로마로 모셔오도록 파견했다. 이 일은 BC 713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마의 역사를 기술한 사람들에게 반대되는 주장을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약간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많은 역사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누마는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다. 그가 로마인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을 때 크로톤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생존 연대를 살펴보면 이 주장은 모순을 드러낸다. 피타고라스는 누마와의 나이 차이가 적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네 세대나 뒤에 살았던 사람이다. 누마는 BC 713년 중반 로마 왕 자리를 계승했고, 피타고라스는 BC 580년(또는 579년)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했다는 게 일반적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내용이다.
또 누마가 왕으로 선택돼 로마에 갔을 때 크로톤이라는 곳은 없었다. 누마가 로마를 통치하고 네 세대 이후 미스켈루스가 창건한 덕에 크로톤이 생겨났다. 이때는 BC 709년이었다.
따라서 누마가 네 세대 이후에 명성을 얻은 사모스 사람 피타고라스에게서 철학을 배웠다거나 로마가 누마를 불렀을 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크로톤에서 살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이다.
이런 내용의 역사를 기술한 사람들은 두 가지 입증된 사실, 즉 피타고라스의 이탈리아 내 거주지와 두 사람이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 여부를 조사하지도 않고 두 사실을 대충 합쳐 “누마는 피타고라스의 제자”라고 주장한 것 같다.
아니면 사모스 사람 피타고라스에 앞서 다른 피타고라스가 존재해 누마를 가르쳤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로마 사절단이 누마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초청했을 때 그는 딱 잘라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한동안 왕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형제들이 거듭 설득하고 아버지가 ‘이 제안은 정말 영예로운 것이어서 거부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그는 마침내 왕이 되는 데 동의했다.
로마인은 사절단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자 그를 만나기도 전부터 존경심을 갖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대부분 사람은 왕권을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는 왕권을 시시하고 진지하게 바라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지혜를 나타내는 증거다.”
누마가 로마 근처에 오자 로마인은 길가에 나가 크게 박수를 치거나 인사를 하거나 다른 명예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그를 환영했다. 이어 민회가 열렸다. 각 부족은 쿠리아 별로 투표를 실시해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민중의 결의가 귀족들에 의해 확정되자 조점관이 나서 이렇게 선언했다.
“하늘의 조짐은 매우 상서롭습니다.”
누마는 마침내 왕으로 취임했다. 로마인들은 누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마는 단 한 번도 전쟁을 하지 않았다. 아주 경건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으로 집권하는 내내 평화를 유지했고, 로마를 가장 훌륭하게 통치했다.’
로마인은 누마에 관한 많은 기적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지혜를 신들의 제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마인은 이렇게 말한다.
“에게리아라는 님프가 일이 있을 때마다 누마를 찾아가 통치 기술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에게리아는 님프가 아니라 뮤즈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여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과 대화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누마는 집에 많은 로마인을 초대했다. 모두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누마는 그들에게 집을 보여주었다. 소박한 가구로 장식돼 있었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기에 부족한 집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잠시 돌아가라고 했다.
누마는 저녁 무렵 그들을 다시 초대했다. 사람들이 약속시간에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비싼 소파와 아름다운 잔이 무수히 놓인 식탁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식탁에 앉자 온갖 종류의 음식으로 차려진 잔치를 열었다.
당시 참가한 사람 중에서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아주 오랫동안 준비하더라도 마련하기 힘든 잔치였다. 로마인은 모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 로마인은 신이 그와 대화를 나눈다고 철저히 믿게 됐다.
역사에서 우화적인 내용을 배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에게리아와 관련된 내용은 누마가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왕에게 좀 더 순응하고, 왕이 만든 법률도 신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누마는 그리스의 사례에 따라 이런 일을 꾸몄다. 크레타의 미노스와 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의 지혜를 흉내 낸 것이다.”
미노스는 제우스와 대화를 나눈다고 주장했다. 수시로 딕타이노 산에 가서 신성한 동굴(딕타이온 동굴 또는 사이크로 동굴)에 들어가 법을 만들었다. 크레타 전설에 따르면 딕타이노 산은 쿠레테스 족이 새로 태어난 제우스를 키운 곳이다. 미노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제우스에게서 법을 넘겨받았다.”
리쿠르구스는 또 이렇게 말했다.
“델피를 방문했을 때 아폴로의 지도를 받아 법 규정을 만들었다.”
전설 같은 역사를 설명하려면, 특히 신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좀 더 긴 논의가 필요하다.
로물루스가 세상을 떠난 뒤 원로원은 정부 통제권을 완전 장악하고 1년 동안 최고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누가 더 탁월하고 동등한지를 놓고 여러 파벌로 갈라졌다.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를 건설한 알바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발언할 권리, 가장 큰 명예를 누릴 권리뿐만 신참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권리를 받는 게 마땅합니다.”
반면 나중에 새 정착민들과 함께 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반박했다.
“우리는 어떤 영예에서도 배제돼서는 안 되고, 다른 누구에게도 불리한 위치에 서서도 안 됩니다.”
특히 사비니 족 출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다.
“우리는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원래의 로마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원로원이 이렇게 다투는 바람에 그들의 피후원자도 두 당으로 나뉘어 각각의 당파에 합류했다.
최근에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전쟁에서 로물루스를 지원하지 않은 탓에 그로부터 무시당했고 땅이나 전리품을 배분받지 못한 평민이 있었다. 이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집이 없어 가난했고 떠돌이였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더 나은 사람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고, 폭동을 일으킬 조짐마저 보였다.
누마는 거센 파도 속 같은 혼란 상태에 로마가 빠져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먼저 로물루스가 개인적으로 소유했거나 공공용지로 남아 있던 땅 중 일부를 나눠줌으로써 평민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다. 이어 로마를 처음에 세웠던 귀족들이 갖고 있던 특권 중에서 어떠한 것도 빼앗지 않고 대신 신참자에게 다른 영예를 제공함으로써 귀족들의 갈등도 누그러뜨렸다.
누마는 마치 악기를 다루듯 민중 전체를 공익에 맞춰 조율한 뒤 퀴리날레 언덕을 로마에 포함시켰다. 당시만 해도 이 언덕은 성 밖에 있었다. 그는 이어 다른 조치들도 발표했다.
누마는 로마가 번성하고 위대해지기 위해 꼭 갖고 있어야만 하는 두 가지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려고 애썼다. 먼저 첫 번째는 경건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내려주고 길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신들에게 일러주었다. 두 번째는 정의였다. 신이 내리는 축복은 정의를 통해 인간에게 정직한 즐거움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