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사비니의 통합
다음날 사비니 족은 회의를 열었다. 로마 영토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고향에서 지원병을 데려와 가장 명예스러운 방법으로 전쟁을 끝낼 때까지 싸워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사비니 족은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는 게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기대에 걸맞은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하더라도 계속 싸우는 게 적절한 것인지를 검토했다. 논의 끝에 로마와 휴전협정을 맺는 게 전쟁을 끝내는 가장 명예로운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로마인보다는 그들에게 더 어울리는 해결책이라고 여겼다.
로마는 사비니 족보다 더 궁지에 몰렸다. 현재 상황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인들을 돌려보낼 수도, 데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돌려보낸다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랬다가는 사비니 족이 요구하는 것을 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계속 데리고 있자니 전 영토가 초토화되고 더 많은 젊은이가 죽는 끔찍한 일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사비니 족에게 평화협정을 요청하더라도 적당한 조건을 얻어낼 수가 없었다. 거만하고 고집불통인 사비니 족이 로마를 온건하지 않고 아주 엄격하게 다룰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은 이런 고민을 하면서 전투를 재개하거나 평화를 요청하지도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사비니 족 출신으로 로마인의 아내가 됐으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여인들이 남편이 없는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평화 회담과 관련해 양측에 먼저 제안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사비니 여인들에게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은 헤르실리아였다. 그녀는 사비니 족이지만 출신 가문은 분명하지 않았다. 일부는 ‘헤르실리아는 결혼한 여인이었지만 다른 처녀들과 함께 납치됐다’고 말한다. 가장 그럴 듯한 주장은 ‘딸과 함께 자발적으로 로마에 남았다. 딸이 납치됐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여인들은 이런 결정을 내린 뒤 원로원을 찾아갔다. 그들은 의원들에게 오랫동안 설명한 뒤 이렇게 요청했다.
“두 나라가 화합할 수 있는 훌륭한 이유가 많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사비니 진영에 있는 친척에게 가게 해주십시오.”
로물루스와 함께 여인들을 만난 원로원 의원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들은 현재 어려움을 감안할 때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원로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비니 여인은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사절로 고향사람에게 갈 수 있다. 아이를 여러 명 가진 여인은 일부를 데리고 갈 수 있다. 이들은 두 나라를 화해시키도록 노력한다.’
결의안이 통과되자 사비니 여인들은 상복을 입고 로마 성 밖으로 나갔다. 일부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갔다. 사비니 진영에 도착한 여인들은 통곡하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발밑에 쓰러졌다. 그들을 본 사비니 병사들은 연민을 느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여인들을 만날 위원회가 소집됐다. 타티우스 왕은 진지에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제안을 내놓았으며 여인들의 대표였던 헤르실리아는 오랫동안 애처롭게 호소했다.
“우리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찾아온 우리에게 평화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가서 로마인을 만나 양측에 도움이 되는 관점에서 평화 협정의 조건을 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헤르실리나가 말을 마치자 아이들을 데리고 간 모든 사비니 여인은 왕의 발 앞에 몸을 던져 납작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한참 뒤에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여인들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합리적인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은 여인들에게 회의장에서 나가라고 한 뒤 논의 끝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두 나라 사이에 휴전 합의가 이뤄졌고 이어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 두 나라 왕은 조항을 만든 뒤 지킬 것을 맹세했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똑같은 권한을 가진 로마의 공동 왕이 된다. 두 왕은 똑같은 명예를 가진다. 도시는 원래 이름을 유지한 채 로마라고 한다. 두 나라 시민 개개인은 이전처럼 로마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총괄적으로는 하나의 일반적 명칭으로 포괄돼야 한다. 타티우스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퀴리테스라고 부른다. 로마에서 살기 원하는 사비니 족은 로마인과 공통의 의식을 거행하며 각 부족과 쿠리아에 배속된다.’
두 나라는 이런 조약을 지키겠다고 서약했다. 맹세를 확인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의 사크라 비아 한가운데에 제단을 건립했다. 모든 일을 마친 뒤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 어울렸다. 타티우스만 빼고 모든 사비니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타티우스는 물론 사비니에서 가장 저명한 가문의 세 사람은 로마에 남아 후대가 누리게 될 명예를 얻었다. 이들은 볼루수스 발레리우스, 티라니우스라는 별명을 가진 탈루스, 그리고 웅덩이를 건너간 메티우스 쿠르티우스였다. 이들과 함께 많은 동료, 친척, 피보호자도 로마에 잔류했다. 그 규모는 기존 로마 인구에 못지않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한 두 왕은 귀족의 수를 배로 늘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인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기존에 가장 저명한 가문에 새로 정착한 사람들을 추가했다. 양측 숫자는 똑같았다. 이들은 새 귀족이라고 불렸다.
이들 중에서 쿠리아 별로 100명을 뽑아 기존의 의원들과 함께 원로원에 등록했다. 로마의 모든 역사학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하지만 일부는 새로 등록한 의원 수에 차이를 보인다. 100명이 아니라 50명이 추가됐다는 것이다.
두 왕이 평화를 중재한 공로로 사비니 여인들에게 부여한 명예와 관련해서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 왕은 여인들에게 많은 명예의 표식을 부여했다. 30개 쿠리아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사절로 간 사비니 여인이 30명이었기 때문이다.’
테렌티우스 바로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로물루스는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이미 각 쿠리아에 그런 이름을 주었다. 그가 처음 백성을 나누었을 때였다. 이 이름 중 일부는 각 쿠리아 지도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다른 일부는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사절로 간 사비니 여인은 30명이 아니라 527명이었다. 두 왕이 일부 여인에게 명예를 주려고 많은 여인의 명예를 빼앗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타티우스와 그 일행이 살았던 도시인 쿠레스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다. 원주민이 살던 레아테 영토에 있던 아주 고귀한 가문의 아가씨가 춤을 추려고 에니알리우스 신전에 갔다.
사비니인과 로마인은 에니알리우스 신에게 퀴리누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가 마르스인지 아니면 마르스와 비슷한 명예를 누린 다른 신인지는 분명히 확언할 수 없다. 일부는 두 이름이 전쟁을 주관하는 같은 신에게 사용된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두 전쟁의 신에게 각각 부여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아가씨는 신전에서 춤을 추다가 갑자기 신적 영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춤을 멈추고는 신의 성소로 뛰어 들어갔다. 이후 이 신의 아기를 갖게 된 아가씨는 아들을 낳았다. 성은 파비디우스였고 이름은 모디우스였다.
파비디우스는 성인으로 성장하자 인간이 아니라 신의 형상을 갖게 됐다. 용감한 행동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유명해졌다. 그는 스스로 도시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많은 사람을 모아 짧은 시간에 쿠레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파비우스는 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신의 이름을 따 도시의 명칭을 정했다.’
반면 테렌티우스 바로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비니인은 창을 쿠레스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도시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역사학자인 트로이젠의 제노도투스의 설명은 이렇다.
‘토착민인 움브리아인이 레아테 지역에 처음 살았다. 펠라스기인에게 쫓겨난 뒤 지금 사는 곳으로 옮겨갔다. 부족 이름은 움브리아에서 사비니로 바꿨다.’
포르키우스 카토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비니라는 이름은 지역의 신 산쿠스의 아들 사부스에서 나왔다. 산쿠스는 유피테르 피디우스라고도 불렸다.
그들이 처음 살았던 곳은 아미테르눔 근처에 있는 테스트루나라는 마을이었다. 거기에 시작해 사비니 족은 당시 레아테 영토를 잠식했다. 레아테에는 원주민과 펠라스기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사비니 족은 유명한 도시 쿠틸리아이를 점령해 빼앗았다. 사비니족은 레아테 영토에 식민지단을 보내 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은 도시에 성을 쌓아 살았다. 그 중 하나가 쿠레스다. 사비니 족이 점령한 땅은 아드리아 해에서 약 8㎞ 떨어진 곳이다. 티레니아 해에서는 28㎞ 이상 떨어져 있었다.’
사비니 족의 역사와 관련해서 다른 설명도 있다. 스파르타 식민지단이 사비니 족 사이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리쿠르구스가 조카 에우노무스의 보호자가 돼 스파르타에 법을 퍼뜨릴 무렵이었다. 스파르타인 중에서 일부는 리쿠르구스가 제정한 엄격한 법을 싫어해서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다. 나중에는 아예 도시를 떠났다. 그들은 넓은 바다를 건넌 뒤 가장 먼저 만나는 땅에 정착해서 살겠다고 신에게 맹세했다. 어떤 땅이라도 서둘러 정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폼프티누스 평원 근처에 있는 이탈리이 지역에 상륙했다. 바다를 건너오면서 겪었던 일을 기념해 처음 발을 내디딘 땅을 포로니아라고 불렀다(역자 주-포로니아는 ‘함께 견디다’라는 뜻이다).
이들은 포로니아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고 여신에게 맹세를 다짐했다. 이후 철자 하나가 바뀌어 포로니아는 페로니아(로마신화에 나오는 숲의 여신)로 불리게 됐다. 그들 중 일부는 거기서 더 들어가 사비니 족 사이에 정착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비니 족의 관습 중에서 상당 부분은 스파르타와 비슷하다. 특히 그들이 전쟁을 좋아하고 아주 검소하며 삶에서 아주 엄격하다는 점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