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평화 시대
여섯 번째 사제는 살리이라고 불렸다. 누마는 귀족 중에서 이 사제들을 선발했다. 가장 우아하게 생긴 젊은이 열두 명을 뽑은 것이었다. 성물을 팔라티노 언덕에 보관하던 살리이는 살리이 팔라티니라고 불렸다. 성물을 퀴리날레 언덕에 보관하던 살리이는 살리이 아고날레스 또는 살리이 콜리니라고 불렸다.
살리이 아고날레스는 누마가 죽은 뒤 즉위한 왕 호스틸리우스에 의해 임명됐다. 호스틸리우스는 사니비 족과의 전쟁에서 신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모든 살리이는 전쟁의 신을 찬양하는 일종의 무용수였고 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살리이 축제는 ‘마치(March)’라고 부르는 달인 파나티나이아에 열린다.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 여러 날 동안 잔치를 벌인다. 축제 기간 동안 살리이는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도시 곳곳을 행진한다. 포로 로마노를 거쳐 카피톨리노 언덕을 지난 뒤 공적 건물이든 사적 건물이든 여러 장소를 두루 돌아다닌다.
살리이는 넓은 구리 속옷과 함께 수를 놓은 튜니카를 입는다. 그 위로는 브로치를 달고, 자주색 줄무늬가 새겨지고 가장자리에 자주색으로 장식한 옷을 걸친다. 이 옷을 트라베아이라고 부른다. 이 옷은 로마 고유의 의복이면서 가장 위대한 명예를 상징한다. 머리에는 고깔 모양이며 챙이 달린 모자인 아피케스를 쓴다. 그리스인은 이런 모자를 키르바시아이라고 부른다.
살리이는 품에 칼을 하나씩 넣고 다닌다. 오른손에는 창이나 작대기, 또는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도구를 들고 다닌다. 왼팔에는 트라키아 방패를 든다. 양쪽 측면이 아래로 갈수록 줄어드는 오각형 방패다. 그리스에서는 쿠레테스 족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살리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쿠레테스다. 쿠레테스는 쿠오로이라고 불린다. ‘젊은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나이를 감안해서 그렇게 부른다.
반면 로마인은 그들의 생생한 활동력을 보고 살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껑충 뛴다’를 로마인은 살리레라고 한다. 로마인은 똑같은 이유에서 무용수를 살라토레스라고 부른다. 살리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춤출 때 뛰거나 깡충거리는 동작이 많기 때문이다.
살리이는 무장한 채 동작을 연출한다. 시간을 두고 피리를 연주한다. 때로는 다 같이, 때로는 돌아가면서 연주한다. 춤을 추면서 전통 찬가를 노래한다. 무장한 사내들이 추는 춤과 단검으로 방패를 두들기며 노래부르는 관습은 고대의 설명에서 추론해보면 쿠레테스 족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그들과 관련한 전설은 생략하도록 한다.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리이가 들고 다니고, 그들의 노예가 작대기 끝에 매달아 날랐던 여러 방패 중에서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져서 누마의 집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아무도 방패를 왕의 집에 가져간 적이 없는데다 그런 모양의 방패는 이탈리아에서는 알려진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인은 그 방패를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성스러운 날에 가장 눈에 띄는 젊은이들이 방패를 나른다. 누마는 하늘에서 떨어진 원본과 닮은 방패를 여러 개 만들었다. 방패가 더욱 명예로워지기를 바라고, 매년 여러 곳에서 희생제물이 방패에 바쳐지기를 바란데다가 적이나 도둑 때문에 방패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대장장이 마무리우스가 이 일을 맡았다. 그가 완벽한 모방품 여러 개를 만든 덕분에 신이 보낸 방패는 눈에 안 띄게 됐고, 방패를 훔쳐가려는 사람이 구별하기 어렵게 됐다.
쿠레테스 족의 방식을 따라한 춤 축제는 로마인에게는 토속적인 제도였다. 로마인은 춤 축제를 매우 명예롭게 거행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다른 극장에서 벌어진 행진에서, 또는 여러 자료에서 그 내용을 많이 발견했다.
모든 행진에서 멋진 튜니카를 입고 모자를 쓴 젊은이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대열을 이루어 행진한다. 이들은 행진을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며, 로마인은 이들을 리디아인이 창시한 것으로 보이는 게임에서 이름을 따와 루디오네스(연주자라는 뜻)라고 부른다.
이들은 살리이와는 약간 비슷하다. 그들은 살리이처럼 노래나 춤에서 쿠레테스 족의 성격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살리이는 자유인이고 원래 로마인이어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로마에 살고 있어야 했다. 반면 루디오네스는 어떤 조건이어도 괜찮았다.
성스러운 제도의 일곱 번째 사제는 페티알레스 사제단이었다.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노디카이, 즉 ‘평화의 중재자’로 불린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최고 가문 출신 남자들 중에서 고른다. 누마는 로마에서 이 신성한 행정관 제도를 처음 만든 사람이었다.
겔리우스가 쓴 글에 따르면 누마는 아르데아에서 아이퀴콜리라고 불린 사제단을 보고 페티알레스 사제단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마가 왕이 되기 전에 로마에 페티알레스 사제단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마가 로마 영토를 침범해 약탈을 저지른 피데나이에 전쟁을 선포하려고 할 때 페티알레스 제도가 만들어졌다. 누마는 피데나이가 전쟁 없이 타협할지 알아보려고 했다.
페티알레스 사제단은 그리스에는 없는 제도다. 얼마나 많은 일이, 그리고 얼마나 큰 일이 그들의 관할 영역에 속했는지 설명하는 게 필요하. 그렇게 해야 당시 마르스 신의 경건함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로마가 모든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사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티알레스의 기원과 동기는 매우 성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기가 닥칠 때 신들은 로마인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페티알레스의 관할권에 속하는 의무는 매우 많았다. 이를 모두 나열하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간략하게 윤곽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마가 동맹을 맺은 도시와 부당한 전쟁을 하지 않게끔 신경 쓰는 게 그들의 일이다. 다른 도시가 로마와 맺은 조약을 어길 경우 먼저 사절로 가서 공식적으로 보상을 요구하고, 그들이 요구를 거절할 경우 전쟁을 선포한다.
거꾸로 로마와 동맹 관계를 가진 도시가 로마인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면서 보상을 요구할 경우 그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도 페티알레스의 일이다. 만약 그들의 불만이 사실로 드러나면 가해자를 체포해서 피해자 측에 인도한다.
페티알레스는 또 사절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관리하며, 조약이 종교적으로 합당한지를 감독하고 평화를 선포한다. 만약 평화가 성스러운 법에 적힌 대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평화 선포를 미뤄놓고 조사활동을 벌여 맹세와 조약에 관한 장군의 위반 사항을 속죄한다.
로마인에게 피해를 입힌 것으로 알려진 도시에 갔을 때 그들이 수행한 업무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페티알레스 사제단 중에서 뽑힌 한 명이 다른 사제와 구별되는 신성한 옷을 입고 상징을 든 채 가해자가 사는 도시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국경에서 멈춘 뒤 유피테르 신과 다른 모든 신에게 이렇ㄱ 호소한다.
“로마를 위해 보상을 요구하러 온 일에 목격자가 돼 주십시오. 저는 피해를 입힌 도시로 갈 것입니다. 만일 제가 주장하는 게 사실이 아니라면 저와 로마에 끔찍한 저주를 내려도 좋습니다.”
신에게 맹세를 한 뒤 페티알레스는 국경을 넘어간다. 그는 가장 먼저 만나는 상대 도시의 사람에게 “목격자가 되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사람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든 시골에 사는 사람이든 관계없다. 페티알레스는 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맹세를 한 뒤 도시로 간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문지기 또는 문 앞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목격자라 되라”고 소리를 지른다.
페티알레스는 상대 도시의 포룸에 가서 자리를 잡고 행정관에게 도시에 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곳에 갈 때까지 했던 맹세와 저주를 다시 되새긴다. 만약 행정관이 가해자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는 친구와 헤어지는 사람처럼 가해자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간다.
만약 행정관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면 열흘을 기다린다. 이런 식으로 세 번을 기다려준다. 30일의 기한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행정관이 정의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며 도시를 떠난다.
“천상과 지옥의 신이시여! 오늘 일에 목격자가 돼 주십시오. 로마는 여유를 갖고 이 문제를 논의할 것입니다.”
페티알레스는 다른 페티알레스 전부를 데리고 원로원에 가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성스러운 법에 정해진 대로 일을 다 했습니다. 원로원이 전쟁을 할 생각이라면 신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반대도 없습니다.”
만약 이런 절차 중에서 하나라도 빠진다면 원로원은 물론 민중도 전쟁을 선언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누마가 성스러운 공직과 관련해서 정한 마지막 규정은 로마에서 최고 사제직을 유지하면서 최고의 힘을 행사할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업무 중에서 나무다리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라틴어로 폰티피케스라고 불리게 됐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일을 한다.
폰티피케스는 시민 개개인이나 행정관 또는 신의 사제와 관련해서 모든 종교적 문제에 심판관이 된다. 그들은 기존 법이나 관습에는 없지만 법과 관습의 규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종교 절차의 준수와 관련한 법을 만든다.
폰티피케스는 희생제의나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행정관의 행위를 조사한다. 또 다른 모든 사제의 행위도 조사한다. 또 노예나 제관들이 종교 의식을 거행할 때 신성한 법률에 어긋나지 않도록, 또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관리한다. 이런 문제를 잘 모르는 평민에게는 신과 정령들을 모시는 문제를 설명하고 해석해준다. 만약 누군가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모든 위반 사항에 대해 처벌을 내린다. 폰티피케스는 종교문제와 관련해서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으며 원로원이나 민회에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폰티피케스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사람이 임명된다. 민회가 아니라 폰티피케스가 새 구성원을 선택한다. 이들은 동료 시민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고른다. 이렇게 승인을 받은 사람은 신의 조짐이 호의적이기만 하다면 사제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러한 것들은 종교적 숭배와 관련해서 누마가 만든 가장 중요하고 인상적인 조항들이다. 그는 신성한 의식의 종류에 따라 사제 계급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도시에는 경건한 분위기가 더 늘어났다.
누마의 규정은 개개인의 생활에 있어 근검절약과 절제를 장려하고, 국가의 조화를 지켜주는 정의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었다. 규정은 매우 많아서 일부는 성문법으로 기록돼야 했고, 나머지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관습과 오랜 관행으로 새겨졌다.
이런 모든 것을 다 다루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두 가지만 다루는 것으로도 나머지의 증거로서 충분하리라고 본다.
먼저 사람들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도록 사람의 소유물에 한계를 정한 법이 있었다. 누마는 각 개인의 땅에 선을 긋고 경계에 돌을 두게 했다. 그는 이 돌을 유피테르 테르미날리스에게 봉헌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해마다 정해진 날에 특정 장소에 모여 국경의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누마는 국경의 신을 기리는 축제도 만들었다. 로마인은 이 축제를 테르미날리아라고 불렀다. ‘국경’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철자 하나만 바꾸면 테리미네스라는 국경을 뜻하는 말이 된다.
누마는 국경의 돌을 부수거나 옮기는 사람을 신에게 바쳐야 하는 사람이라고 간주했다. 신을 더럽힌 그 사람을 죽이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유죄라는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
누마는 개인 재산뿐만 아니라 공공 재산에 관한 법도 만들었다. 그는 공공재산에도 영역 표시석을 놓게 했다. 영역의 신이 로마인의 땅을 이웃나라의 땅과 구별할 수 있게 만들려는 뜻에서였다. 또 공공 재산을 개인 재산과 구별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로마인은 이런 관습을 종교적 형태로만 오늘날에도 지키고 있다. 그들은 국경 표시석을 신으로 보고, 신에게 매년 희생제물을 바친다. 표시석에 피를 묻히는 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동물이 아니라 곡물 및 땅에서 난 첫 수확물로 만든 떡을 바친다.
누마는 법을 통해 로마를 근검절약하고 절제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계약과 관련해서 법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위해 그는 가장 축복받는 제도를 만든 사람들도 모르던 장치를 고안했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목격자 앞에서 맺어진 계약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에 대한 존경이라는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잘 준수된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목격자 없이 체결된 계약이 훨씬 많다. 이 경우에는 계약을 체결한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누마는 이 사실에서 착안해 재임 중에 신뢰를 주요한 관심사항으로 삼아 숭배를 바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누마는 유스티티아(정의의 여신), 테미스, 네메시스와 에리니에스라고 불리는 다른 신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존경받고 숭배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 사이에서 더 위대하고 더 신성한 신은 없는데도 피데스(신뢰의 여신)는 국가는 물론 개인에 의해서도 제대로 숭배받지 못하고 있었다.
누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피데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다. 그리고 다른 신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공공 비용을 들여 여신을 기리는 희생제례를 시작했다.
국가가 믿을 수 있고 일관된 태도를 보인다면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개인 시민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들의 평가에서 신뢰라는 것은 매우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신성불가침한 것이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맹세는 그의 신뢰를 거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무게를 갖게 됐다.
만약 목격자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분쟁이 생기면 양측의 신뢰도만으로도 분쟁을 해결하고, 일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데 충분했다. 행정관과 사법재판소는 대부분의 경우 판결을 내릴 때 신뢰를 내걸고 주장하는 쪽의 맹세를 더 믿었다. 절제를 장려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누마가 고안한 이런 규정은 로마를 가장 잘 통제된 가정보다 더 질서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국가가 정의를 사랑하고 절제하는 관습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풍부해야 한다. 이 사실을 고려한 누마는 나라를 여러 파기(구역)로 나누었다. 그리고 땅을 조사하는 일을 하는 관리를 각 파기에 임명했다. 이 관리는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면서 땅이 잘 경작되는지 아닌지를 기록해서 왕에게 제출했다. 왕은 세심하고 근면한 농부에게는 칭찬과 호의라는 상을 베풀었다. 반면 나태한 농부에게는 질책과 함께 벌금을 물림으로써 더 신경 써서 땅을 경작하라고 촉구했다.
전쟁에서 벗어나고 국가의 각종 잡무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물론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도 모두 농부가 됐다. 이들은 땅이 생산하는 부와 그 밖의 모든 정당한 부를 군 생활의 변덕스러운 영향보다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누마는 신하들로부터 존경받는 왕이 됐고, 이웃나라의 모범이 됐다. 내부의 혼란이 국가의 조화를 깨뜨리거나, 외적의 침입 때문에 가장 우수하고 존경할 만한 제도가 지켜지지 않는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조치 덕분이었다.
로마의 이웃나라들은 로마의 평화로운 안정을 침략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할 일이 생기면 로마를 중재자로 선택했고, 누마의 중재 아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다.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산 것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 중에 누마를 가장 앞자리에 놓더라도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귀한 출신이었으며 고귀한 외모를 가졌다. 말로만 일을 해결하는 무용한 교육이 아니라, 경건함과 모든 미덕을 가르치는 원칙을 추구하는 교육을 받았다.
누마는 젊었을 때 미덕에 대한 평가 덕분에 로마의 왕으로 취임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로마인은 그를 왕으로 초청했다.
누마는 살아 있는 동안 신하들의 복종을 계속 지휘했다. 그는 능력의 손상 없이 포르투나(행운의 여신)로부터 어떤 벌도 받지 않고 매우 오래 살았다.
누마는 가장 쉬운 죽음을 통해 인생을 마감했다. 나이에 따라 시든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부여된 천재성은 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라질 때까지 똑같은 호의를 계속 베풀었다.
누마는 80년 동안 살았고 43년 동안 통치했다. 대부분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는 아들 네 명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후손들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나에우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딸 하나만 낳았는데 로마의 4대 왕인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어머니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는 매우 슬퍼했다. 로마는 아주 장엄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는 테베레 강 건너편에 있는 야니쿨룸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