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 폼필리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은 다시 로마의 통치권을 갖게 됐다. 이들은 똑같은 정부 형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민회가 다른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이 든 의원을 순서대로 일정한 기간 동안 인테르렉스로 임명했다. 원로원은 이어 민회의 결의를 거쳐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를 왕으로 선출했다. 그의 혈통은 이러한 것이었다.
알바인이 건설했고 로물루스가 항복을 받아내 식민지로 삼은 메둘리아라는 도시에서 출신 성분이 뛰어나고 재산이 많은 호스틸리우스라는 사내가 로마로 이주했다. 그는 헤르실리우스의 딸인 사비니 족 여인과 결혼했다. 사비니 족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남편을 대신해 아버지에게 사절로 가자고 사비니 여인을 설득했고, 두 도시의 지도자가 체결한 동맹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바로 그 헤르실리우스였다.
호스틸리우스는 많은 전쟁에 로물루스를 따라 나섰고, 사비니 족과의 전투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긴 뒤 죽고 말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어린이였다. 호스틸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의 주요한 지역에 두 왕과 나란히 묻혔다. 로마인은 그의 활약을 증명하는 내용을 담은 명문을 새긴 기념비를 세워 그의 명예를 높였다.
호스틸리우스의 외아들은 성인이 된 뒤 저명한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다. 그녀와 사이에서 활동적인 사내로 유명한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태어났다.
툴루스는 법에 따라 민회에서 투표를 실시한 끝에 왕으로 선출됐다. 민회의 결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호의적인 조짐을 본 뒤에 확정됐다.
툴루스가 왕이 된 해는 BC 679년이었다. 그는 취임 직후 놀라운 조치를 실시함으로써 노동자 계층과 빈민 계층의 마음을 얻었다. 그보다 먼저 재임했던 두 왕은 아주 비옥한 땅을 많이 갖고 있었다. 두 왕은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할 풍부한 준비물을 갖출 수 있었다.
로물루스는 전쟁에서 이전 소유주로부터 빼앗음으로써 땅을 획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인 누마 폼필리우스가 땅을 물려받았다. 땅은 더 이상 국가 재산이 아니었다. 대를 잇는 왕의 유산이었다.
툴루스는 그의 유산만 갖고도 희생제물로 사용하고 개인적으로 지출하기에 충분하다면서 할당 받은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로물루스, 누마가 물려준 땅을 똑같이 나눠주었다. 그는 이런 인도적 조치를 실시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남의 땅에서 농노처럼 일할 필요성에서 해방시켰다.
툴루스는 또 누구도 거주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성벽 안에 첼리오 언덕을 포함시켰다. 주거지를 마련하지 못한 로마인에게 충분한 땅을 나눠주고 집을 지어주었다. 그도 첼리오 언덕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툴루스에 대해서는 군사적 업적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알바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두 도시 사이의 분쟁과 그들의 친척 관계를 갈라놓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은 클루일리우스였다. 그는 주요 행정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의 번성에 질투를 느꼈고, 그 질투를 억제하지 못했다. 원래 성격이 급하고 약간 광기가 있었던 그는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알바인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던 클루일리스는 정당하거나 긴급한 이유도 없이 로마를 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꾸몄다.
먼저 가난하고 용감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면서 로마의 들판을 약탈하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로마 영토로 넘어가 여러 차례 기습적으로 약탈에 나섰다. 그들은 심지어 공포를 느낄 때조차도 아무런 위험도 없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클루일리우스는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로마인은 약탈을 참지 않고 무장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면 알바 사람들에게 로마인을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라고 비난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알바 사람 대다수는 과거 식민지(로마)의 번성을 질투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잘못된 비난에 기를 기울이고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실제로 일은 클루일리스의 기대대로 진행됐다. 두 도시에서 최악의 부류들이 서로를 약탈하고 노략질했다. 이어 마침내 로마 군이 알바 영토로 쳐들어가 많은 산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클루일리우스는 회의를 소집해 로마를 맹렬히 비난했다. 백성들에게 다친 사람들을 보여주고, 죽거나 잡혀간 사람들의 친척을 억지로 만들어냈으며,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조작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먼저 배상을 요구할 사절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로마가 거부하면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하자 툴루스는 배상을 요구하리라는 걸 예상하면서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는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을 깨뜨린 책임을 알바에 전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나라 사리에는 로물루스 시대에 만들어진 조약이 있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먼저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게 있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어떤 이유에서든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그 도시는 피해를 입힌 도시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만약 배상을 받지 못하면 할 수 없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툴루스는 로마가 먼저 배상 요구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거부할 수밖에 없고 알바인의 눈에 로마가 잘못한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친구에게 최선을 다해 알바 사절단을 접대해서 집 안에 붙들어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 사이 다른 불가피한 일에 매달려 바빠 그들을 만날 시간을 못 내는 척했다.
툴루스는 다음날 저녁 저명한 로마인 여러 명을 페티알레스 사제와 함께 알바에 보냈다. 그들에게 로마인이 당한 피해의 배상을 알바인에게 요구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사절단은 해가 뜨기 전에 알바에 도착했다. 이들은 군중이 모여 있는 시장에서 클루일리우스를 만났다. 사절단은 로마인이 알바인의 손에 입은 피해를 나열하면서 클루일리우스에게 두 도시가 맺은 조약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클루일리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을 선포했다.
“알바가 먼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보상을 요구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소. 조약 규정을 어긴 것은 로마이니 사절단은 떠나시오.”
사절단 단장은 떠나기에 앞서 클루일리우스에게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하라고 요구했다.
“배상을 먼저 요구받은 쪽이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거요?”
“그렇소.”
“두 도시의 조약의 증인이었던 신들에게 다시 한 번 증인이 돼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로마는 배상을 먼저 거부당한 쪽이기 때문에 조약을 어긴 자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합니. 배상을 거부한 쪽은 모든 상황이 보여주듯이 알바인입니다. 당신들은 배상을 먼저 요구받고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쟁을 먼저 선언했습니다. 칼에 앞서 당신들에게 닥칠 복수를 기대하시오.”
툴루스는 로마에 돌아온 사절단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는 알바 사절단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당신들이 로마에 온 이유는 무엇이오?”
“로마인 때문에 많은 알바인이 다치고 약탈당했습니다. 배상을 하십시오. 우리는 배상을 받지 못할 경우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소. 우리는 조약이 규정한 대로 배상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알바인에게 전쟁을 선포하겠소. 이 전쟁은 불가피하면서 정당한 것이오.”
로마와 알바는 전쟁을 준비했다. 자체군대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지원군도 불렀다. 모든 것을 갖춘 두 군대는 상대를 향해 진군했다. 두 군대는 로마에서 11㎞ 정도 떨어진 지역에 진지를 설치했다. 알바는 포사이 클루일리아이(클루일리우스 배수로) 근처에, 로마군은 그보다 조금 더 안쪽이었다. 둘 다 가장 편리한 지점을 진지로 골랐던 것이다.
두 군대가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했을 때 어느 쪽도 수에서 열세를 보이지 않았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또 사전 준비라는 점에서도 경멸을 당할 쪽은 없었다. 두 군대는 무엇보다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적을 꺾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상대를 보고는 전투에 나서려는 충동적 열정을 잃어버렸다.
두 군대는 선공을 당하지 않으려면 진지를 상대보다 더 높이 지어서 방어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고의 행정관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지 않으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헐뜯는 습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전쟁에 책임이 있었던 클루일리우스는 병사들이 게으르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군대를 이끌고 나서 적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만약 로마군이 응전하지 않는다면 진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전투 준비는 물론 적 진지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계획을 모두 마련한 클루일리우스는 밤에 사령관 천막으로 자러 들어갔다. 평소처럼 경비병이 천막을 지켰다. 날이 밝을 무렵 그는 죽은 채 발견됐다. 상처나 교살, 독살, 또는 다른 살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 불행한 사건은 모두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이유를 추론했다. 그에게는 원래 고질병이 없었다. 모든 인간의 일을 신의 섭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클루일리스의 죽음은 신의 분노 탓이다. 그는 어머니 도시와 그녀의 식민 도시 사이에 부당하고 불필요한 전쟁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을 수지맞는 장사로 생각하고 큰 이득을 놓치게 됐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주장했다.
“클루일리스의 죽음은 인간의 배신과 질투 탓이다. 동료 시민 중 클루일리우스에 반대하는 당파가 비밀리에 추적할 수 없는 독으로 그를 제거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추정을 내놓았다.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힌 클루일리우스가 목숨을 스스로 거두었다. 그의 모든 계획은 실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쟁을 시작할 때 기대했던 것 중에서 어느 것도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클루일리우스에게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 사람들은 가장 온당한 이유로 그의 죽음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그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신의 분노도, 반대 당파의 질투도, 그의 절망도 아니다. 자연의 법과 운명 때문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누구에게나 찍히는 예정된 인생코스를 그가 마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