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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04. 2020

7. 안쿠스 마르키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사망한 이후 원로원은 전통에 따라 인테르렉스를 임명했다. 인테르렉스는 로마의 왕으로 안쿠스 마르키우스를 선택했다. 민회가 원로원의 결정을 추인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조짐은 우호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마르키우스는 관습에 따른 필요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후 BC 638년 왕으로 즉위했다.


마르키우스는 외할아버지인 누마 폼필리우스가 창안한 많은 종교 의식이 방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로마인 대부분이 전쟁에만 몰두하고 농토를 경작하는 일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시민들을 한자리에 모은 뒤 누마 시대처럼 신들을 경배하라고 촉구했다. 


“로마에 수시로 역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이 죽는 비극이 발생한 것은 로마인이 신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신들을 제대로 모시지 않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왕이 오랫동안 여러 가지 육체적 고통 때문에 신음하다가 결국 정신적, 육체적으로 약해져서 끔찍한 종말을 맞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 죽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누마가 만든 정부 제도는 매우 뛰어나고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가장 합법적인 노동을 통해 매일 풍요로움을 제공했습니다. 누마의 제도를 되살려야 합니다. 모두 농사일과 가축 사육에 힘을 쏟고, 부당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해야 합니다. 약탈, 폭력은 물론 전쟁에서 챙기는 이익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키우스는 이렇게 호소하면서 모든 시민에게 평화로운 안정과 내실 있는 경제에 충실하라고 했다. 그는 폰티피케스로부터 누마가 만든 모든 종교 의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뒤 평판에 새겨 포로 로마노에 게시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평판은 모두 부식돼 사라졌다. 당시에는 청동 기둥을 사용하지 않을 때였다. 당시에는 종교 의례와 관련한 법과 조례를 참나무 판에 새겼다.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이후 종교 문제를 총괄하던 폰티피케스인 가이우스 파피리우스가 대중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평판의 내용을 다시 새겼다.  


마르키우스는 사실상 망각 상태에 빠졌던 종교 의례를 다시 살리고 게으른 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한 직업을 갖게 했다. 사려 깊은 농부들은 격려했고 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농부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행정 제도를 정리한 마르키우스는 외할아버지처럼 평생 전쟁 같은 일에서 멀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운명에 의해 이뤄지지 못하게 됐다. 그의 성향과는 달리 전사가 돼야 했고, 위험이나 혼란에서 자유로운 삶은 전혀 살 수 없게 됐다.


마으키우스가 왕으로 즉위해서 차분한 정부를 꾸려가고 있을 때였다. 라틴인들은 그를 무시하면서 용기가 없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멸시했다. 각 도시는 도적떼를 국경에 인접한 로마 땅에 보냈다. 많은 로마인이 이 때문에 다치게 됐다. 


마르키우스는 사절을 보내 “조약에 따라 배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라틴 도시들은 이를 거부했다.


“우리는 도적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이 일은 국가의 동의 없이 저질러졌다. 도적들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우리는 마르키우스 왕과 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왕과 조약을 체결했을 뿐이다. 툴루스 왕이 죽었으므로 평화 협정은 폐기됐다.”


마르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그는 폴리토리움을 포위한 뒤 다른 도시의 지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폴리토리움 주민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재산을 계속 보유하도록 허용하면서 로마로 이전해 살게 했다. 그리고 여러 부족 사이에 그들을 나눠 배치했다. 


이듬해 라틴 도시들은 텅 빈 폴리토리움에 정착할 사람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폴리토리움 사람들이 경작하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마르키우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라틴인이 전투를 하러 성 밖으로 나오자 그는 단숨에 격파하고 다시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집들을 불태우고 성벽을 허물어버렸다. 이후 라틴 도시들은 폴리토리움을 기지로 사용하거나 농토를 경작하지 못했다. 마르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라틴 도시들은 로마 식민지였던 메둘리아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성을 공격해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때 마르키우스는 유명한 라틴 도시인 텔레나이로 쳐들어갔다. 그는 야전에서 적군을 격파한 뒤 성을 공격해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텔레나이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 포로로 붙잡아 로마에 보냈다. 그리고 로마에 집을 마련해준 뒤 로마인이 되게 했다. 


마르키우스는 메둘리아를 라틴인에게 빼앗긴 지 4년 만에 되찾았다. 여러 번 큰 전투를 벌여 메둘리아에 살던 라틴인을 모두 쫓아냈다. 또 2년 전에 항복을 받은 적이 있던 피카나를 다시 점령해 모든 주민을 로마로 이주시켰다. 그 외에 다른 피해는 입히지 않았다. 그는 아주 관대하고 사려 깊게 일을 처리했다. 


라틴 도시들이 피카나에 식민지 개척단을 보내 영토를 차지하고 거기서 나는 생산물을 마음껏 즐겼다. 마르키우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피카나로 쳐들어갔다.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도시를 다시 점령했다. 그는 모든 집을 불태우고 성벽은 허물어버렸다.


로마와 라틴 도시들은 이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두 번에 걸쳐 대규모 야전을 벌였다. 첫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 우세를 잡지 못하고 상당한 시간 동안 싸움만 한 뒤 서로 헤어져 각각 진지로 돌아갔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승리를 거뒀다. 로마군은 라틴군을 진지까지 추격했다. 


이후에는 양 군대 사이에 더 이상의 야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양측 모두 끊임없이 상대 영토를 침입했다. 일부 기병끼리는 물론 국경을 순찰하는 경무장 보병끼리 소규모 다툼은 계속 이어졌다. 싸움에서 승자는 대개 로마군이었다. 로마군은 타르퀴니우스의 지휘에 따라 들판의 유리한 지점에 항상 병력을 몰래 배치해두었다.

이 무렵 피데나이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 소규모로 몰래 기습공격을 감행해 로마 시골을 초토화시켰다. 마르키우스는 경무장 보병을 이끌고 나섰다. 피데나이가 전쟁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기 전에 그는 도시를 포위했다. 


피데나이는 처음에는 모르는 척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로마군이 우리 도시에 쳐들어 온 것이오?”


마르키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시골 마을을 습격해서 약탈한 자들을 처벌하러 왔소.”


피데나이는 딴소리를 했다.


“우리는 이 일에 책임이 없소. 조사를 해서 범죄자를 찾아낼 시간을 주시오.”


피데나이는 로마에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라틴 도시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고 무기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마르키우스는 그들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로마군 진지에서 피데나이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진지를 떠나 군대를 이끌고 도시로 행진했다. 그는 일부러 땅굴을 판 성벽 반대편으로 접근했다. 전쟁에 대비해 미리 가져온 공성전 장비와 사다리 및 다른 장치들을 가지고 갔다. 


피데나이는 공격받은 쪽으로 많은 병사를 보내 완강하게 공격에 맞섰다. 다른 로마군은 땅굴을 통해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반항하는 피데나이 병사를 모두 제거한 뒤 성문을 활짝 열었다.


도시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데나이 사람이 학살당했다. 마르키우스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한 곳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반란 주모자들을 채찍질한 뒤 목을 베었다. 로마 병사들에게는 피데나이의 모든 집을 약탈할 시간을 주었다. 일을 다 마친 뒤에는 충분한 주둔병을 남겨둔 뒤 사비니 족을 향해 진군했다.


사비니 족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왕과 맺은 평화조약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 영토를 자주 침입해 접경 지역을 초토화시키곤 했다. 


마르키우스는 첩자와 탈출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공격을 개시할 적당한 시간을 엿보고 있었다. 사비니 족이 들판에 흩어져서 약탈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직접 보병을 이끌고 적군 진지로 쳐들어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진지를 점령했다. 마르키우스는 타르퀴니우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기병을 이끌고 나가 약탈하느라 흩어져 있는 적을 섬멸하시오.”


사비니 족은 로마 기병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약탈품을 버려두고 진지로 달아났다. 하지만 로마군이 진지를 점령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숲이나 산으로 도망갔다. 


로마 기병과 보병은 그들을 추격해 상당수를 살해했다. 도망간 사비니 병사는 소수였다. 사비니 족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고 합의에 이르렀다. 라틴 도시와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 전쟁 때문에 로마는 다른 적에게는 휴전과 평화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시작하고 4년째 되던 해에 마르키우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동맹 도시에 가능하면 많은 보조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베이이와 전쟁을 할 생각으로 베이이 시골지역 상당부분을 초토화시켰다. 베이이는 1년 전 로마 영토로 침입해 많은 재산을 빼앗고 여러 사람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베이이는 대군을 이끌고 피데나이 근처 테베레 강 건너편에 진영을 꾸렸다. 마르키우스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을 진군시켰다. 기병 전력에서 앞서 있었던 그는 베이이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해 베이이 군대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야전에서 적을 대패시키고는 진지를 점령했다. 


원하는 대로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마르키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례 의식을 열었고, 승리를 축하하는 행진과 전통적인 개선식을 거행했다.


2년 뒤 베이이는 휴전협정을 깼다. 그들은 로물루스 통치 기간 중에 로마에 넘겨줬던 염전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마르키우스는 다시 베이이와 전쟁을 하게 됐다. 지난번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손쉽게 승리를 거뒀고, 이후 염전을 영구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한 사람에게 주는 상은 기병 사령관인 타르퀴니우스에게 돌아갔다. 마르키우스는 “전군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영광을 수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귀족 겸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어준 일이었다.


마르키우스는 볼스키 족과도 전쟁을 하게 됐다. 볼스키 족 출신의 도적 떼가 로마 들판에서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마르키우스는 볼스키 족 도시인 벨리트라이를 포위한 뒤 도랑과 목책으로 성을 에워쌌다. 그는 들판을 완전히 장악한 뒤 성벽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때 벨리트라이의 노인들이 항복의 상징물을 들고 성 밖으로 나왔다. 


“마르키우스 왕이 원하는 대로 피해를 보상하고 범죄자들을 붙잡아 넘겨주겠소.” 


왕은 벨리트라이와 휴전했다. 그들이 제공한 배상을 받아들인 뒤 정식 협정을 맺었다.


아직 로마의 힘을 알지 못하던 사비니 족의 일부 도시 중에서(일부 내용 소실) 아주 크고 번성하던 도시가 로마에 불평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로마의 번영을 질투한 나머지 도적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소규모 군대를 보내 들판을 습격했다. 나중에는 전리품을 챙길 목적으로 대놓고 전쟁을 시작해 국경 지역 상당 부분을 약탈하고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전리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르키우스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국경지역 마을을 구원하러 달려가 사비니족  군대 근처에 진지를 차렸다. 


큰 전투가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병사가 쓰러졌다. 로마는 탁월한 전투기술과 인내력을 앞세워 승리를 거뒀다. 그들이 오랫동안 익혀왔던 전투 요령 덕분이었다. 로마군은 사비니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로마군은 무질서하게 진지로 달아나는 사비니군을 추격해 대규모 학살극을 벌였다. 로마군은 사비니군의 진지를 함락했다. 그곳에는 값진 물건이 가득했다. 로마군은 사비니군이 붙잡아 끌고 가던 포로를 되찾아 로마로 돌아갔다. 


이상은 마르키우스의 군사적 업적 중에서 로마인에 의해 기억되고 기록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마르키우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성벽 안에 넣음으로써 도시를 적지 않게 확장했다. 아벤티노는 적당한 높이의 언덕이었다. 둘레가 5㎞ 정도이며 여러 종류의 나무로 가득했다. 특히 아름다운 월계수가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월계수의 숲’이라는 라우렌툼으로 불렀다. 지금 이곳은 많은 건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디아나 신전이 들어서 있다. 아벤티노는 팔라티노 언덕과는 깊고 좁은 협곡으로 갈라져 있다. 나중에 두 언덕 사이의 협곡은 흙으로 메워졌다.


마르키우스는 이 언덕을 외적 침입에 대비한 기지로 사용하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벽을 쌓고 배수로를 팠다. 이곳에 텔레나이와 폴리토리움 및 다른 도시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살게 했다. 


이것은 마르키우스가 평화로운 시기에 이룬 업적 중 하나다. 아주 놀랍고 실용적인 업적이었다. 로마는 다른 도시를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적군의 공격을 받아도 덜 취약하게 됐다.


방금 말한 것보다 더 큰 결과를 낳은 다른 평화 시기의 업적도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로마를 ‘삶의 편의’라는 측면에서 더 부유하게 만들었다. 또 지금까지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에 착수했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흘러내려와 로마 근처를 지나가는 테베레 강은 항구 없이 계속 흘러 티레니아 해의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 강은 로마에 별로 이익이 되지 않았다. 강어귀에 무역항이 없어 바다에서 오는 물건을 내려 강을 따라 운반해 상인과 교환할 수 없었다. 


테베레 강은 상당한 크기의 하천용 배는 물론 많은 짐을 실은 항해용 배도 오갈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마르키우스는 강어귀에 항구를 건설하기로 했다. 


테베레 강의 경우 바다와 결합하는 강어귀 부분이 상당히 넓었다. 최고의 항구에 필적할 만큼 넓은 만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강어귀가 바닷물 때문에 쌓인 모래언덕으로 막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또 소택지나 늪지를 거치면서 수량을 낭비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아주 강하게 자주 불어오는 연안의 서풍에도 불구하고 조수의 영향을 최소화해 어디서나 항해할 수 있었고, 강어귀를 통해 쉽게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노 달린 배는 규모에 관계없이, 상선은 최고 10t까지 짐을 싣고 강어귀로 들어와 로마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더 큰 배는 강어귀에 닻을 내린 뒤 짐을 하역해 작은 하천용 선박에 실어 운반할 수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강과 바다가 연결되는 지점에 마을을 건설하고 벽으로 에워쌌다. 그리고 마을에 오스티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로마를 내륙도시 겸 해양도시로 만들어 바다 너머에서 오는 각종 물건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마르키우스는 테베레 강 건너편의 야니쿨룸이라는 높은 언덕에 성벽을 쌓았다. 배로 강을 오가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그곳에 적당한 주둔군을 배치했다. 에트루리아는 강 건너편 땅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늘 상인을 약탈하고 있었다.



마르키우스는 또 테베레 강에 나무다리(폰스 수블리키우스)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이나 철을 사용하지 않고 교각만으로 버틸 수 있게 만든 다리였다. 로마인은 이 다리를 매우 성스럽게 여기면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다리 일부분에 손상이 생기면 폰티피케스가 즉각 수리한다. 수리하는 동안에는 특정한 전통 희생제례를 거행한다. 


마르키우스는 로마를 왕이 됐을 때보다 더 나은 도시로 만든 뒤 후계자에게 왕 자리를 물려주었다. 24년 동안 통치한 뒤 그는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하나는 갓난아기였고, 장남은 겨우 수염이 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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