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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05. 2020

8.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1)

에트루리아 이민자, 로마의 왕이 되다



안쿠스 마르키우스 왕이 죽은 뒤 정부 형태를 결정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은 원로원은 다시 똑같은 왕정을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인테르렉스를 임명했다. 원로원은 민회를 열어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가 왕으로 선출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조짐은 시민들의 선택을 확인해주었다. 타르퀴니우스는 BC 614년 왕으로 즉위했다.


로마의 여러 연대기에서 본 기록에 따라 타르퀴니우스의 조상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왜 로마로 이사했는지, 어떤 경로로 왕이 됐는지도 밝히려 한다. 


바키아다이 가문 출신으로 데마라쿠스라는 그리스 코린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업에 종사했다. 배에 짐을 가득 싣고 이탈리아로 장사를 하러 다녔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에트루리아 여러 도시에서 화물을 모두 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데마라쿠스는 다른 항구도시로 갈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같은 바다를 계속 오가면서 그리스의 상품을 에트루리아로, 에트루리아의 상품을 그리스로 실어 날랐다. 이 덕분에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코린트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독재자 키프셀루스가 과두정치를 하던 바키아다이 가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데마라투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엄청난 재산을 갖고 독재자 밑에서 사는 건 안전하지 않아. 게다가 나는 바키아다이 가문 사람이잖아. 재산을 모두 챙겨서 코린트에서 탈출해야겠어.’


데마라투스는 오랫동안 교류를 해온 덕분에 에트루리아에 많은 친구를 갖고 있었다. 특히 당시 매우 크고 번성한 도시였던 타르퀴니이에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그곳으로 이주해 집을 짓고 훌륭한 가문 출신의 여인과 결혼했다. 


데마라투스는 두 아들을 얻었다. 둘에게 에트루리아 식으로 아룬스와 루코모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들에게 그리스어는 물론 에트루리아어도 가르쳤다. 그는 두 아들을 현지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의 딸들과 결혼시켰다.


얼마 후 아룬스는 큰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괴로워하던 데마라투스는 며칠 뒤 큰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살아남은 둘째 아들 루코모가 상속자가 됐다. 그는 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뒤 공적 활동에 뜻을 두고 도시의 행정부에 참여했다. 


하지만 루코모는 원주민으로부터 배타시되고 따돌림 당했다. 최고의 자리뿐만 아니라 중간 계급에서도 밀려났다. 그는 공민권을 빼앗기고 분노하게 됐다. 루코모는 아내는 물론 함께 가기를 원하는 친구를 모두 데리고 로마로 갔다.


“로마인은 외국인을 받아들여 시민권을 준다고 하더군. 모든 재산을 팔아서 로마로 가야겠어.”


루코모 일행이 야니쿨룸 언덕 근처까지 갔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갑자기 내려오더니 그의 머리에서 모자를 낚아채 날아갔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원을 돌며 날다가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날아와 모자를 다시 그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루코모의 아내 타나퀼은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장면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에트루리아에서 조점으로 유명했던 조상 덕분에 조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떼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왕 자리에 앉을 조짐이군요. 로마에 가시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로마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왕 자리에 앉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해요.”


루코모는 아내로부터 조점을 듣고는 매우 기뻤다. 그는 로마의 성문 근처에 다가가자 신들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아내의 예언이 실현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로마행이 행운으로 넘쳐나도록 도와주십시오.”


루코모는 마르키우스 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에트루리아 사람 루코모입니다. 로마에서 살기 위해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의 재산이 개인에게 허용되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왕과 로마의 처분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공익을 위해 써주시기 바랍니다.”


마르키우스는 루코모를 아주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를 따라온 사람들은 여러 부족과 쿠리아에 분배했다. 루코모는 분배받은 땅에 집을 지었고, 땅을 하사받았다. 여러 가지 일을 다 정리한 뒤 그는 로마 시민이 됐다. 마르키우스는 루코모에서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로마인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가족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야겠군요. 루코모 대신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나서 자란 도시의 이름에서 착안해 성을 타르퀴니우스라고 하겠습니다.”


타르퀴니우스는 아주 짧은 시간에 왕과 친구가 됐다. 그는 왕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을 선물하고, 왕이 전쟁을 하러 갈 때 필요한 장비를 지원했다. 왕을 따라 전쟁에 나서면 보병으로 따라가든 기병으로 따라가든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왕에게 조언이 필요할 경우 가장 현명한 자문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왕이 그를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로마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절한 행동을 보여줘 많은 귀족과도 사이가 좋았다. 정중한 인사, 유쾌한 대화 외에 돈을 아끼지 않는 선의 덕분에 평민에게서도 호평을 받았다. 


타르퀴니우스는 마르키우스 왕이 살아 있는 동안 로마인 중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가 됐다. 왕이 죽은 뒤에는 왕 자리에 오를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타르퀴니우스는 즉위한 뒤 아피올라이와 전쟁을 하게 됐다. 아피올라이는 여러 라틴 도시 중에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도시였다. 아피올라이와 다른 라틴 도시들은 로마 영토로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마르키우스 왕이 죽었으므로 로마와의 평화 조약은 효력을 잃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출정해 라틴 도시들의 영토 중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초토화시켰다. 여러 라틴 도시들이 아피올라니에 지원군을 보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들과 두 번 싸워 두 번 모두 이긴 뒤 아피올라니를 포위했다. 


“한꺼번에 공격하지 말라. 병사들을 나눠 돌아가며 아피올라니를 공격하라.”


아피올라니에는 싸울 수 있는 병사가 거의 남지 않아 조금도 쉴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로마

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피올라니 사람 중 대다수는 전투 중에 살해당했다. 무기를 버린 사람 중 일부는 전리품과 함께 노예로 팔렸다.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은 로마로 끌려가 노예가 됐다. 도시는 파괴됐다.


타르퀴니우스는 도시를 초토화시킨 뒤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른 전쟁에 나서야 했다. 이번에는 크루스투메리움이 상대였다. 이 도시는 원래 라틴 식민지였으며, 로물루스 시대에 로마에 항복한 도시였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가 왕 자리에 오르자 라틴 도시 편을 들면서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크루스투메리움과의 전쟁은 도시를 포위하는 것은 물론 다른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이 도시는 로마군의 위력은 물론 그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도와주겠다던 라틴 도시에서는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 


크루스투메리움은 성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노인들은 물론 귀족들은 성문 밖으로 나가 도시를 타르퀴니우스에게 헌납하면서 빌어야 했다. 


“왕이시여,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주소서.”


타르퀴니우스는 도시로 들어갔다. 그는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다만 반란 주동자 일부에게 영구 추방의 처벌만 내렸을 뿐이었다.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소. 이전처럼 로마 시민권을 계속 갖게 해주겠소. 대신 앞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로마 식민지단을 파견해 이 도시에서 함께 살게 할 것이오.”


크루스투메리움과 똑같은 흉계를 꾸몄던 노멘툼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들은 도적떼를 보내 로마 들판을 약탈하게 했다. 라틴 도시들이 지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우리는 로마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라틴 도시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노멘툼은 혼자서는 로마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그들은 항복의 징표를 들고 도시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콜라티아는 로마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들은 군대를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싸울 때마다 패하는 바람에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래서 성 안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콜라티아는 다른 라틴 도시에 지원병을 파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고, 로마군의 공격은 성벽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콜라티아는 노멘툼이나 크루스투메리움처럼 온건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앞으로 콜라티아는 영원히 무장할 수 없다. 우리가 전쟁 때문에 쓴 비용을 모두 물어내야 한다. 로마 병사를 도시에 주둔시켜 계속 감시하도록 하겠다. 나의 조카인 타르퀴니우스 아룬스에게 도시를 통치할 전권을 부여하겠다.”


아룬스는 아버지 아룬스와 할아버지 데마라투스가 죽은 뒤에 태어났다. 삼촌인 루코모가 이미 할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상속한 탓에 그는 아무 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궁핍한 사람’이라는 뜻인 에게리우스가 됐다. 에게리우스는 로마인이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에게 붙여주는 별명이었다. 아룬스는 삼촌 덕분에 콜라티아를 다스리게 됐고, 이후 그의 모든 후손에게는 콜라티누스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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