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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03. 2020

6. 툴루스 호스틸리우스(7)

끊이지 않는 전쟁과 암살



툴루스는 겨울을 보낸 뒤 봄이 되자마자 다시 군대를 이끌고 피데나이를 공격하러 갔다. 피데나이는 이번에는 어떤 동맹 도시에서도 지원을 받지 않았다. 대신 여러 곳에서 용병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용병에 의존한 채 용기를 내어 성 밖으로 나갔다. 이들은 전투에서 많은 로마인을 베었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더 많은 병력을 잃고는 다시 도시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갔다.


툴루스는 목책과 해자로 성을 포위해 피데나이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었다. 결국 피데나이는 툴루스의 요구 조건에 따라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툴루스는 피데나이를 점령하고 반역의 주모자를 모두 처형했다. 나머지는 석방했다. 그들에게는 이전처럼 모든 재산을 그대로 보유하게 허락했고, 이전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게 했다.


툴루스는 로마로 돌아가 신에게 전리품을 바치는 행진과 감사의 희생제례를 거행했다. 그로서는 두 번째 거행한 개선식이었다.


피데나이와의 전쟁이 끝난 뒤 사비니 족에게서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 사비니 족과 라틴인이 다함께 숭배하는 성소가 있었다. 최고의 경배 속에 보존되는 곳이었으며, 페로니아 여신(숲의 여신)에게 바쳐진 곳이었다.


일부는 여신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안토포로스(꽃의 여신)라고 번역하고, 다른 사람은 필로스테파노스(화관의 여신), 또 다른 사람은 페르세포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데메테르 여신의 딸이며 지옥을 다스리는 하데스 신의 부인)라고 번역한다.


정해진 축제일이 되면 여러 도시에서 많은 사람이 성소에 모이곤 했다. 대다수는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맹세를 했다. 축제 기간 동안 장사를 하려는 상인, 공예인, 농부도 모였다. 이곳에서는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보다 성대한 장터가 펼쳐졌다.


축제에 매우 중요한 로마인이 참석했다가 사비니 족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는 돈을 빼앗겼다. 이와 관련해 로마가 사절을 파견했지만 사비니 족은 배상을 거부했다. 붙잡은 사람들을 풀어주지도 않았다. 사비니 족은 거꾸로  "신성한 성소를 만들어 사비니의 도망자들을 받아들였다"며 로마를 비난했다.


두 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이 일 때문이었다. 양측은 대군을 이끌고 야전에서 맞붙었다. 양측은 동등한 실력으로 밤이 될 때까지 싸웠다. 아무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했다. 양측은 이후 며칠 동안 부상자와 사망자 수를 계산했다. 다시 맞대결하는 위험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두 나라 모두 진지를 걷고 철수했다.


그해에는 더 이상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양측은 병력을 더 늘려 이듬해 다시 전쟁에 나서 에레툼 근처에서 만났다. 로마에서 50㎞ 정도 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두 도시는 다시 격돌했다. 오랫동안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 툴루스는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뒤 이렇게 맹세했다.


“오늘 사비니 족을 물리친다면 사투르누스 신과 옵스 신을 모시는 축제를 거행하겠습니다.”


툴루스는 살리이를 두 배로 늘렸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완전하게 무장한 채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특정한 전통 노래를 부르는 귀족 가문의 청년들이었다.


툴루스가 맹세한 뒤 로마군은 신념에 가득 찼다. 마치 지친 병사들에게 새 병력이 충원되기라도 한 것처럼 오후 늦게 적선을 돌파해 사비니군의 첫 번째 대열을 패주시켰다.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진지까지 쫓아갔다. 진지 주변에서 많은 적을 베었고, 그곳에 밤새 머물면서 적의 진지를 모두 부숴 결국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군은 사비니 족 영토를 마음껏 약탈했다. 아무도 영토를 지키러 나오지 않자 로마군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승리 덕분에 툴루스는 세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 머지않아 사비니 족이 사절을 보냈다. 로마는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먼저 사비니 족에게 사로잡힌 포로와 탈주자를 돌려받았다. 원로원은 사비니 족이 농부들에게서 빼앗아간 가축, 짐 싣는 동물, 다른 재산의 피해를 특정 금액으로 산정한 뒤 사비니 족에게 물어달라고 했다. 사비니 족은 이런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로 하고, 신전에 기둥을 세워 휴전 조약 조건을 새겼다.


하지만 로마군이 라틴의 다른 도시들과 장기화될 것 같은 전쟁의 기운에 휩싸이자마자 사비니 족은 로마와 맺은 맹세, 조약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렸다.


사비니 족은 물어준 돈의 여러 배를 로마에서 받아낼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공격에 나섰다. 처음에는 적은 병력으로 비밀리에 로마를 약탈했다. 나중에는 많은 병력을 모아 공개적으로 싸움을 걸었다. 첫 시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됐다. 로마에서는 농부들을 구하러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사비니 족은 로마군을 무시했고, 로마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사비니 족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도시의 병력을 한곳에 모았다. 이들은 또 라틴 도시들에게도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나라들과는 동맹이나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데 실패했다. 툴루스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한 뒤 라틴 도시들과 휴전하고는 사비니 족에 맞서 싸우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툴루스는 로마의 전 병력을 소집했다. 알바를 합병한 덕분에 로마군의 병력을 배로 늘어났다. 그는 다른 동맹에도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사비니 족은 이미 군대를 모은 상태였다. 두 군대는 근처까지 접근해 실바 말리티오사(악당의 숲)이라는 곳에 진지를 차렸다. 두 군대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았다.

다음날 두 군대는 격돌해 오랜 시간동안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는 전투를 이어갔다. 늦은 오후 무렵 사비니 족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마 기병대 앞에서 버틸 수 없게 됐다. 많은 사비니 병사들이 달아나다 살해됐다. 로마인은 죽은 사비니 병사들에게서 전리품을 빼앗았고 진지를 약탈했다. 그들은 사비니 영토 곳곳을 초토화한 이후에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툴루스 재임 기간 동안 로마와 사비니 족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였다.


라틴 도시들은 로마와 갈등을 빚게 됐다. 이들은 알바를 초토화시킨 로마에 지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알바를 파괴하고 15년이 지났을 때 툴루스는 알바의 식민지였던 30개 도시에 사절을 보내 로마의 지시에 따르라고 했다. 로마인은 라틴인에 대한 알바의 주도권은 물론 알바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받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툴루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이 남에게 속한 물것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강탈이고 하나는 선택입니다. 로마인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써서 알바인이 갖고 있던 도시의 지배권을 얻었습니다. 알바인이 로마의 적이 됐을 때 로마는 무력으로 알바를 점령했고, 알바가 도시를 잃었을 때 그들에게 로마의 몫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알바는 무력으로, 동시에 자발적으로 과거 식민지 도시들에게 행사했던 주도권을 로마에 양도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라틴 도시들은 사절단에게 개별적으로 답을 주지 않았다. 이들은 라틴 총회를 페린티눔에서 열어 로마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코라의 안쿠스 푸블리키우스와 총사령관 라비니움의 스푸시우스 베킬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라틴 도시들은 이들에게 평화와 전쟁에 관한 전권을 부여했다.


로마와 친척 도시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전쟁은 5년이나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내전 같았고 옛날 형식대로 치러졌다. 그들은 총력을 투입해 야전을 벌이지 않았다. 큰 비극이나 대학살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도시도 초토화되거나 노예로 전락하는 경험을 겪지 않았다.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혀도 회복할 수 없는 참화를 겪지 않았다. 다만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 서로 영토로 쳐들어가 옥수수를 빼앗아 가축 여물로 삼을 뿐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귀향하면 포로를 교환했다.


일찍이 로물루스 시절에 로마의 식민지였다가 반란을 일으켰던 메둘리아라는 도시가 로마에 포위를 당한 뒤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면서 용서를 구했다. 양측에 다른 참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는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원한을 남기지 않는 조약이 서둘러 체결됐다.


이상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왕 시절에 이룬 업적이다. 그는 전쟁에서의 용기와 위기에서의 지혜 덕분에 이례적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전쟁을 치러야 할 때에도 서두르지 않고 적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세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준비를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툴루스는 32년간 통치한 뒤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집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 모든 집안 식솔이 화염에 사라졌다. 일부에서는 번개가 쳐서 불이 났다고 한다. 그가 신성한 의례를 방기해서 하늘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툴루스의 집권기에 예로부터 이어져온 의례가 없어졌으며, 외국에서 새로운 의례를 도입했다고 주장한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이 재앙이 인간의 배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범인은 툴루스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린 안쿠스 마르키우스였다고 주장한다.


안쿠스는 누마 폼필리우스의 외손자였다. 그는 왕의 피를 물려받았는데도 평범한 민간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에 분노했다.


‘툴루스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왕이 죽으면 이 아이들에게 왕 자리가 돌아갈 거야. 대책이 필요해.’


안쿠스는 이런 생각을 한 끝에 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오랫동안 꾸몄다. 그는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지 세력을 모았다. 그는 툴루스의 친구이면서 가장 가까운 심복이 된 뒤 공격을 시도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기다렸다.


툴루스가 집에서 가까운 친척들에게만 알리고 의례를 거행하던 날이었다. 이날은 비바람이 불고 하늘이 매우 어두웠다. 왕의 집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자리를 떠나버렸다.


안쿠스는 이날을 가장 좋은 기회라고 보고 칼을 옷 안에 숨긴 뒤 지지자들과 함께 왕의 집에 들어갔다. 그는 왕과 아이들은 물론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 집의 여러 장소에 불을 질렀다. 안쿠스는 이런 짓을 저지른 뒤 이런 소문을 냈다.


“번개 때문에 왕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나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것도 신뢰할 만 하거나 믿을 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런 설명을 믿는다.


‘툴루스는 하늘의 판단에 따라 최후를 맞았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런 일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툴루스가 죽은 뒤 로마인이 안쿠스를 로마의 왕으로 선택할지도 불투명했다. 사람들이 안쿠스에게 충성스러웠다고 하더라도 신이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이런 사람을 그냥 내버려뒀다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로마의 부족들이 투표를 실시한 이후에는 신이 상서로운 조짐을 보내 왕국을 새 왕에게 맡긴다는 뜻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신, 정령이 불경하고 부당한 살인의 피를 묻힌 사람에게 제단에 다가와 희생제례를 치르고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게 내버려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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