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트루리아에서 파스케스를 받다
에트루리아는 로마에 참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다. 게다가 사절을 보내 에트루리아 포로를 송환하라고 요청했지만 타르퀴니우스가 거부하고 인질로 잡아두겠다고 하자 분노는 더욱 커졌다. 에트루리아는 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모든 에트루리아 도시는 힘을 모아 로마에 맞서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도시는 동맹에서 제외한다.’
에트루리아는 군대를 이끌고 테베레 강을 건너 피데나이 인근에 진지를 세웠다. 이들은 속임수로 피데나이를 점령했다. 주민들 사이에 난동이 벌어지자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고 로마 영토를 약탈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피데나이에는 충분한 주둔병을 배치했다. 나중에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때 훌륭한 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다음해 초봄 많은 로마인을 무장시키고 동맹으로부터 많은 병력을 지원받은 뒤 에트루리아 영토로 쳐들어갔다. 에트루리아가 여러 도시 병력을 모아 로마군에 맞서러 나오기 전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전 병력을 둘로 나눴다. 그는 로마군의 선두에 서서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로 쳐들어갔다. 라틴 병사로 이뤄진 동맹군의 지휘권은 조카인 에게리우스에게 넘겼다.
“피데나이로 가서 그곳에 있는 에트루리아 주둔병을 모두 몰아내거라.”
라틴 병사로 이뤄진 동맹군은 적을 무시하고 피데나이 근처의 안전하지 않은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했다. 피데나이에 있는 에트루리아 주둔군이 몰래 에트루리아에서 지원군을 받아들인 뒤 적당한 기회를 엿보다가 도시에서 몰려나와 라틴 동맹군 기지를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지에는 보초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 에트루리아 주둔군은 말 먹이를 찾으러 기지에서 나온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타르퀴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베이이 영토를 초토화했고 많은 전리품을 챙겼다. 여러 에트루리아 도시의 지원군이 베이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고 전례 없는 대승을 거뒀다. 로마군은 적의 영토를 휩쓸고 다니며 마음껏 약탈했다. 이들은 많은 포로를 붙잡고 엄청난 전리품을 챙긴 뒤 여름이 끝나갈 무렵 고향으로 돌아갔다.
베이이는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도시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앞에서 영토가 유린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베이이 영토로 세 번이나 쳐들어갔다. 3년 동안 베이이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모두 빼앗아갔다. 베이이 영토 대부분을 초토화시켜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자 군대를 카에레타니로 돌렸다. 이전에 펠라스기 인이 살 때에는 아길라로 불리던 곳이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에는 카에레타니로 이름을 바꿨다. 에트루리아에서 가장 번성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로 발전했다.
카에레타니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대군을 출정시켰다. 그러나 로마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카에레타니 병사들은 도시로 달아났다. 로마군은 그들의 영토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많은 것을 노략질했다. 이들은 전리품을 마차에 실어 의기양양하게 로마로 돌아갔다. 베이이 전쟁에서 원하는 대로 성공을 거둔 타르퀴니우스는 이번에는 피데나이로 쳐들어갔다.
“피데나이에 있는 에트루리아 주둔군을 몰아내자. 에트루리아에게 도시를 넘겨준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로마군과 에트루리아 주둔군 사이에 대규모 야전이 벌어졌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도 이어졌다. 결국 피데나이는 로마에 함락했다. 에트루리아 병사들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사슬에 묶여 감시를 받았다. 반란을 일으킨 일부 피데나이 인은 매질을 당한 귀 공개 처형당했다. 다른 사람은 영원히 추방당했다. 그들의 재산은 압수됐다. 타르퀴니우스는 피데나이에 식민지단 겸 주둔군으로 남게 된 로마인에게 이를 배분됐다.
로마와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전투는 사비니 영토인 에레툼 근처에서 벌어졌다. 사비니 족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에트루리아를 설득해 로마와의 전쟁에 나서도록 했던 것이었다.
“우리도 이번 전쟁에서 로마에 맞서 싸울 것이오.”
사비니 족이 로마와 맺은 6년간 평화 협정의 시한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많은 사비니 도시들이 이전 패배를 설욕하고 싶어 했다. 평화가 이어지는 동안 많은 젊은이들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사비니 족의 시도는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로마군이 나타나자 어떤 사비니 족 도시에서도 에트루리아에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일부 도시만 후한 보상에 현혹돼 원래 약속대로 지원군을 파견했다.
이 전쟁은 그때까지 두 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그래서 로마의 힘을 키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됐다. 로마는 전쟁에서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기뻐했다.
“타르퀴니우스 왕에게 화려한 개선식을 수여합니다.”
이 전쟁은 에트루리아의 정신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에트루리아는 모든 도시에서 모은 병력을 전쟁에 내보냈지만 살아 돌아온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상당수는 전투 도중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는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험한 들판에 갇히는 바람에 로마군에 항복했다. 엄청난 재앙을 만난 에트루리아 여러 도시의 지도자들은 현명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총회를 열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고 합니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서는 안 됩니다. 각 도시의 어르신들과 귀족에게 전권을 주어 로마에 보내 평화 조약을 맺도록 합시다.”
타르퀴니우스를 만난 에트루리아 사절단은 이렇게 호소했다.
“자비와 관용을 베푸십시오. 우리와 특정 조건에 따라 평화조약을 맺어도 되고 아니면 우리를 멸절시키고 도시를 넘겨받으려 해도 됩니다. 어쨌든 왕은 우리와 혈연관계라는 걸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시를 넘겨줄 뿐만 아니라 어떤 조건이라도 평화에 만족할 겁니다.”
사절단의 말을 들은 타르퀴니우스는 매우 만족했다.
“내가 어떤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려는지, 어떤 호의를 여러분에게 베풀려는지 잘 들으시오. 에트루리아 인은 단 한 명이라도 죽이거나 고향에서 추방하거나 재산을 빼앗는 방법으로 처벌할 생각이 없소. 각 도시에 주둔군을 보낼 생각도, 조공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소. 여러분이 원래의 법과 옛 정부형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할 방침이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 딱 한 가지는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하오. 여러분에게 주는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오. 여러분 도시의 주권이오. 내가 여러분보다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내가 누릴 권한이오. 물론 여러분의 동의를 바탕으로 이 권한을 얻고 싶소. 돌아가서 여러분 도시에 내 뜻을 전하시오. 여러분이 돌아올 때까지 휴전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리다.”
타르퀴니우스의 대답을 들은 사절단은 로마를 떠났다. 며칠 뒤 그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말만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왕을 장식할 때 사용하고 주권을 나타내는 각종 상징물을 들고 왔다.
이 중에는 황금 왕관, 상아 옥좌, 독수리 장식이 달린 홀, 황금으로 수놓은 자주색 튜니카, 리디아와 페르시아 왕이 입던 것처럼 수놓은 자주색 옷 등이었다. 이 옷은 리디아, 페르시아 왕의 것처럼 장방형이 아니라 반원형이었다. 로마인은 이 곳을 토가라고 부른다.
일부 역사학자에 따르면 에트루리아는 각 도시에서 한 개씩, 총 12개의 도끼를 가져와 타르퀴니우스에게 넘겨줬다. 에트루리아에서 도시의 왕은 도끼를 끝에 매단 막대기 뭉치를 든 릭토르가 늘 따라다니는 게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열두 도시는 연합해서 전쟁을 벌일 때마다 도끼 열두 개를 사령관의 절대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맡기곤 했다. 물론 모든 역사학자가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타르퀴니우스 통치 시기 이전에도 로마의 왕 앞에 도끼 열두 개를 든 사람이 수행했다. 로물루스가 왕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런 관습을 만들었다.’
*역자 주/파스케스(fasces)는 무솔리니가 창안한 파시즘(fascism)의 어원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파스케스를 여러 문장에 사용하고 있다.
에트루리아가 그런 관습을 창안한 민족이고 로물루스가 그들로부터 관습을 받아들였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른 왕의 상징물과 함께 도끼 열두 개가 타르퀴니우스에게 건네졌다는 것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로마인은 권력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다른 나라의 왕들에게 홀과 왕관을 수여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의 상징을 받았지만 바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많은 로마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는 상징들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결정해달라고 했다. 원로원과 시민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그제야 상징들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금왕관을 쓰고, 수놓은 자주색 옷을 입고, 손에 상아 홀을 들고 상아 의자에 앉았다. 도끼와 막대기 뭉치를 든 릭토르 열두 명은 왕이 판결을 내리러 갈 때나 외국에 갈 때에도 항상 따라다녔다.
타르퀴니우스의 뒤를 이은 두 왕도 이 상징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왕정이 폐지된 이후 왕관과 수놓은 옷을 제외한 나머지 상징은 저속하고 남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물건으로 취급됐다. 해마다 선출되는 집정관은 상징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전쟁에서 이겨 돌아올 때, 그리고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을 열 수 있는 영광을 부여받았을 때 집정관은 황금 관을 쓰고 수놓은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