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 머핀 / 페이스 갤러리 / 현대카드 스토리지
안녕하세요. 이남일 도슨트입니다.
어제 한남동에서 미팅을 마친 뒤 잠시 시간이 남아 근처 갤러리 몇 곳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해외 전시 이야기를 자주 전하다 보니 서울의 전시는 상대적으로 덜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지금 이 도시에서도 충분히 깊이 있는 전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 갤러리 투어를 한 번 열어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정이 맞지 않더라도 이 글이 한남동을 찾으실 때 작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남동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운 미술 흐름을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수준 높은 전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 다니며 보기 좋은 동선이 만들어집니다.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어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서울 미술의 방향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이건용 페이스 갤러리
먼저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용 개인전 《Body as Thought(사상으로서의 몸)》입니다.
한국 행위미술과 실험미술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작가이지만, 이번 전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후기 작업보다 초기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가 어떤 기반 위에서 지금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는지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용의 핵심 개념은 ‘바디스케이프(Bodyscape)’입니다. Body와 Landscape를 합친 말로, 풍경을 눈으로 재현하는 대신 신체의 움직임 자체를 화면에 남기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몸이 지나간 자리, 움직임의 흔적을 기록합니다.
전시는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며 1970년대에 시도된 작업과 아카이브가 함께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두에 섰던 작가가 어떤 고민과 질문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확장해 왔는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특히 오프닝 당시 남겨진 작업의 흔적이 갤러리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바라볼수록 이 전시가 결과보다 과정에 가까운 전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행위예술은 순간적으로 끝나는 장르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긴 시간 축적된 사유와 태도가 존재합니다.
제가 진행하는 해외 투어 역시 여행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수많은 선택과 고민이 있습니다. 작가의 기록 노트를 바라보며 그런 점에서 묘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좋은 결과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시간 위에 놓이게 됩니다.
■ 리만 머핀 《Muted Rhythm》- 성낙희 이소정 한진
리만 머핀에서 열리고 있는 《Muted Rhythm》은 전혀 다른 결의 전시입니다.
성낙희, 이소정, 한진 세 작가의 작업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형태와 반복, 그리고 화면 안에서 만들어지는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조용한 움직임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낙희의 작업은 물감을 흩뿌리고 여러 번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을 떠올리게 합니다.
표현은 절제되어 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면 안에 축적된 시간이 보입니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과 런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참여했던 이력 역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이소정은 동양화 기반 위에 한지와 먹을 겹겹이 쌓아 올립니다. 흰 벽 위에 놓인 작품은 그림이면서 동시에 공간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그림과 설치 둘 다 되는 작품,
한진은 색과 형태의 관계를 탐구하며 소리를 그림으로 만드는 작가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가 떠오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칸딘스키가 말했던 감각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세 작가의 개성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공간 안에서 균형 있게 놓여 있습니다.
오래 머물지 않아도 좋지만, 잠시 걸음을 늦추면 충분히 여운이 남는 전시입니다. 계절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지금, 조용히 들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도날드 저드 가구전 - 현대카드 스토리지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열리고 있는 도널드 저드 가구 전시는 또 다른 방향에서 흥미롭습니다.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가가 디자인한 가구를 직접 볼 수 있는데, 화려함 대신 단순한 구조와 비례에 집중한 작품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제작된 가구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에게 가구는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질서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편안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곧 기능보다 개념을 우선했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역시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 정리하면서,
최근 외국계 갤러리들이 국내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흐름도 눈에 띕니다. 해외 미술관을 다니다 보면
이제 한국 작가의 작품이 주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한류의 확산과 함께 한국 미술 역시 분명한 존재감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남동에서 지금 볼 만한 전시는 어디일까요.
행위예술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 갤러리의 이건용 전시를,
추상 회화를 차분하게 감상하고 싶다면 리만 머핀을,
미니멀리즘 디자인과 공간 개념에 관심 있다면 현대카드 스토리지를 추천드립니다.
세 곳 모두 서로 가까워 천천히 걸으며 이어 보기에도 좋습니다.
좋은 전시는 결국 직접 마주할 때 가장 또렷하게 남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먼저 보고, 지금의 흐름 속에서 의미 있게 다가오는 전시들을 차분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울을 걷다가 문득 전시가 보고 싶어지는 날, 한남동부터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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