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lt
아무도 나의 잘못이라고 비난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죄책감은 아무리 씻어내도 씻겨지지가 않는다.
나의 30대를 가득 채웠던 난임치료와 암치료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나의 30대는 우울증이 걸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운이 없어도 운이 없을까 싶을 정도로 절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가끔 친구를 만나면 자기들의 속상한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다가 "너는 뭐 힘든 일 없어?"라는 질문에 속으로 '정말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 네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볼래?'라고 생각하지만 애써 웃으며 "나야 똑같지 뭐."라고 말해버린다.
다들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슬픈 존재라고 생각하듯 시어머니는 내게 "나는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고...."라며 끝말을 흐리시곤 했다. 셋째 아들과 결혼하자마자 그 해에 첫 손주를 떡하니 안겨주신 어머니는 그것이 결혼해서 가장 잘한 일이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하셨다. 아버님의 형님인 큰 아버님은 딸만 여섯을 내리 낳은 장손이셨다. 어렵사리 내 남편보다 몇 살이나 어린 아들을 늦으막이 보셨기 때문에 떡하니 한 번에 아들을 안겨주신 어머니는 꽤나 뿌듯하셨나 보다.
27살에 결혼한 어린 신부에게 "너희 피임하니?"라며 같이 산지가 얼마인데 아직 애기 소식이 없냐고 하시던 시어머니였다. 철부지 어린 신부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와 반대로 우리 친정과 외가는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아 첫째를 결혼 후 7~8년 만에 낳는 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외갓집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딩크로 사는 이모네 부부도 있었으니 내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물론 젊은 나에게 그런 일이 반복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찌감치 난임병원을 수소문해 다녔다. 여리여리 50kg도 하지 않던 어린 신부는 각종 호르몬 부작용을 겪으며 살이 15kg 이상 찌고, 생리 불규칙과 생리 전 증후군을 겪으며 매달, 매년 임신 실패를 겪으며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행동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병원을 다닐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신부는 배와 엉덩이 피멍이 들어가며 몸이 상한지도 모르고 호르몬 주사를 맞아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시술로 임신을 하지 못했고 우연한 자연임신 2번과 임신 6주 만에 유산을 겪으며 마음과 몸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나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들은 이미 출산을 했고, 늦게 결혼한 남편친구들은 속도위반을 자신 있게 하며 우리를 추월해 갔다. 축복해 줄 마음의 여유조차 잃어가던 때 아버지는 담도암을 진단받으셨고 가족들은 집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 간병을 도맡게 했다. 그러던 도중 나는 암진단을 받았고,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이틀 후 눈을 감으셨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죄책감이 존재한다. 외동아들과 결혼해 아이를 낳지 못한 며느리로서의 죄책감
아버지 간병을 하다가 암에 걸려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끝까지 챙기지 못한 죄책감
두 번의 짧은 임신 중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아무도 나에게 내 잘못이라고 비난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가 오랫동안 자신을 비난해 왔었다.
겉으로는 애를 못 낳는 게 무슨 죄야?라고 하면서도 나는 나를 여전히 원망한다. 남편은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유산을 하고 돌아오던 날 울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빠를 모시고 매일 병원 가는 게 귀찮고 힘들게 느껴져 투덜투덜 해대던 나에게 남편은 "어차피 할거 기분 좋게 해 줘."라던 말이 맞았다. 간병 같지도 않은 간병을 해놓고 나만 힘들게 시킨다고 생색내던 내 어리석음이 여전히 부끄럽다. 암진단을 받고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나를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셨다. 그리고 이틀뒤 주무시며 돌아가셨다.
나는 왜 후회할 일들만 가득한지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지만 아직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