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친구들의 다양한 반찬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학창 시절이었다. 워킹맘이었던 나의 도시락은 늘 소시지, 동그랑땡, 너비아니, 3분 짜장과 카레가 대부분이었다.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매번 똑같은 그 반찬들이 참 싫었다. 보온 도시락에 베인 카레냄새는 며칠이고 지워지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급식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엄마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는 엄마는 돈이 들어도 급식소식이 그렇게 기뻤다고 한다. 도시락을 쌀 필요가 없어진 엄마의 아침은 편해졌다.
매일 아침 나를 깨워주는 건 아빠였다. 가장 먼저 출근하는 엄마와 아빠가 식사를 하시고 나를 깨워서 밥을 챙겨주는 건 아빠의 몫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새벽출근을 하던 엄마를 대신해 머리를 묶어 준 것도 아빠였다. 우리 아빠는 말수가 적으셨지만 상당히 자상하신 편이셨다.
그래서인지 고생하는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중학생 때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인문계를 갈 실력은 됐지만 아빠는 나는 실업계에 진학하길 원하셨다. 언니처럼 여상을 나와 은행원이 되는 게 형편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셨다. 굳이 대학까지 나와야 하냐며 반대를 하셨다.
친구들이 실업계 지원을 많이 해서 나도 딱히 인문계를 가야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그런 말을 하니 왠지 서운해졌고 반앙심이 들었다. 그래서 인문계를 가겠다고 했다.
수월하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식탁 위에 달력을 찢은 종이 하나가 보였다. 아빠의 손글씨가 적힌 편지였다. "반대해서 미안하다. 입학 축하한다" 그리고 삼만 원이 올려져 있었다. 내심 반대한 게 마음에 쓰이셨나 보다. 말수는 없으셨지만 마음이 여린 아빠였다.
반대로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에 인색하신 분이었다. 내가 남긴 밥은 아빠의 몫이었고, 버스를 타도 늘 아빠한테 기대서 잤다. 잠이든 나를 엎어주는 것도 아빠의 몫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빠가 일이 없어지고 엄마 혼자 생계를 이어갔는데 아빠는 출근한 엄마를 대신해 장을 보거나 집안 청소를 하는 등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TV리모컨 건전지 하나 갈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꽉 찬 청소기 먼지통을 어떻게 비우는지, 집에 고장 난 것들을 어떻게 수리하는지 하나도 몰라서 한동안 우리를 부르는 일이 잦았다. 집안 전등을 모두 LED 등으로 바꾸고 나서야 귀찮은 일이 줄어들었다.
엄마한테 불려 갔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엄마는 도대체 집안일을 왜 그렇게 못해? 너무 아빠가 다 해준 거 아냐?'라고 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나는 대신 돈을 잘 벌잖아. 그게 내 특기야'
그렇다. 엄마는 아빠를 대신해 돈을 열심히 버셨다. 하지만 그 돈은 엄마를 위해 쓰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대학은 뭐 하러 보내냐고 했던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벌어서 나를 4년제 대학교를 학자금 대출 하나없이 졸업시키셨다.
어린 시절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답답했고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셔야 할 만큼 닳고 닳아버린 연골은 우리 가정을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했다는 증표이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는 신세가 되어버려 서글픈 우리 엄마의 든든한 두다리가 되어드리고자 나는 오늘도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