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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꽃피는 Jun 10. 2020

시험관 1차 성공은 로또라던데?




난임부부가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크게 나누면 육체적 어려움, 정신적 어려움, 경제적 어려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 육체적 어려움


엄마가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굳게 결심하고 난임치료를 시작하지만, 사실 시험관 시술을 통해 아기를 가지는 일은 쉽지 않다. 티비를 보면 많은 연예인들이 쌍둥이, 세쌍둥이를 난임클리닉을 통해 갖고서 출연한다. 주위 사람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도 병원을 가기만 하면 아주 쉽게 다둥이 부모가 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보건복지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난임 클리닉 시험관 성공 1위가 2017년 기준으로 35% 이다. 세 커플이 시도하면 그 중 한 커플만 성공하는 것이다. 난임 치료 중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 시험관 시술인데도 말이다.   


"될 때까지 하면 성공하기 마련이야!"


첫 번째 시술 실패, 두 번째 시술에서  10주에 유산, 그리고 삼차 시도를 통해 쌍둥이 엄마가 된 친구는 아무 일도 아닌 양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 줄로만 믿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아니더라. 나는 겨우 한차례 시도했을 뿐이었지만, 정말로 쉬운 시술이 아니더라.


우선 과배란을 유도하는 행위 자체가, 호르몬으로 여성의 몸을 폭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라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작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부작용을 심하게 겪는 분들은 현기증, 구토, 복수, 흉수까지 차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난임부부들은 이 부분을 모르고 시작한다. 알더라도, "부모가 되기 위해 그 정도 고통"쯤은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생각하지만,  한 두 번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잇달아 실패하고, 기약없는 희망 고문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그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진다.


과배란으로 인한 불편감과 부작용은 인공수정을 할 때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니, 다음 얘기로 넘어가자. 먹어야 하는 수많은 약들과, 맞아야 하는 수많은 주사들. 대부분의 여성들이 비의료인인 만큼, 자기 몸에 스스로 주사를 놔야 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상 의료인을 통해 주사를 맞을 때도, 주사 바늘이 내 몸을 찌를 때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내가 내 몸에 주사바늘을 찔러 넣어야 한다니! 


다행히, 막상 겪어보니 자가주사 자체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진 않았다. 병원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고, 또 현장에서 실습하게 하고, 동영상 강좌까지 챙겨주셔서, 지독히도 재주가 없는 나도 별 어려움 없이 내 배에 주사바늘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주사기에 약을 넣고 공기를 빼다가 주사바늘 한두 개 부러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하루에 4가지 이상의 주사를 맞는 날도 있을 만큼, 맞아야 하는 주사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이쯤 되면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변한다. 이 모든 고통과 불편함을 감내했는데, 이번 달에도 기다리던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뭐 그런 생각들. 고날에프, 한바이알, 오비드렐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갖가지 주사제들. 각각 특징과 용도가 다른 만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용량만큼 주사해야 하는데, 이를 착각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의 고통스러웠던 모든 과정이 허사로 돌아가버리기도 하기에 알람을 맞춰놓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사를 놓아야 했다. 


난임시술 과정에서의 육체적 고통에는 질정 삽입도 한몫했다. 늘 지켜야만 하고 은밀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주입받았던 내 질에 스스로 손가락을 두 마디 이상 쑤셔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불편함과 불쾌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유달리 거부감이 컸는지 모르겠지만, 질정 삽입 후 30분 이상 누워서 잘 흡수되도록 기다려야 하는 과정도 지겨웠고,  유분기 섞인 질정 분비물이 종일 질질 흘러내려 더러워지는 경험은 절대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시험관 시술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과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난자채취 과정이다. 대기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면서 제대로 허리도 못 펴고 주위의 부축을 받아 기어 나오다시피 하는 환자들을  보았다. 모두 난자 채취를 하고 나온 환자들이었다.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채취 후 내가 안정을 취하고 누워있는 동안도, 시술실에서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래서 요즘엔 수면마취를 하고 채취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난자채취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한 후, 잔뜩 겁을 먹고 수면마취하겠다고 강짜를 부렸으나, 노련하신 간호과장님께 한방에 제압당했다. 수면마취는 채취할 난자가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말하시는데, 대놓고 몇 개나 채취하겠다고 수면마취 하느냐는 말보다 더 뼈 때리는 말에 지나가다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과잉진료일 것이 뻔했고, 간호과장님 말씀처럼 국소마취가 올바른 수순인 것은 지금도 인정한다. 다행히, 부작용이 그러하듯, 고통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달라서 나의 경우는 (간호과장님 말대로)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난자 채취 후 병원에서 챙겨준 간식


나는 총 9개의 난자를 채취했다. 생물학적 나이 만 44세, 난소 나이 46세 이상으로 나와 상태가 좋지 않으리라 예상한 것에 비해 괜찮은 성과였다. 그렇게 치면 대충 9번 정도 바늘로 찔렸던 건가. 따끔따끔하긴 했고, 그때마다 누워있던 침대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긴 했지만, 생리통과 비교해본다면 이건 아픈 것도 아니었다.


난자 채취 후 유산방지 주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공포의 근육주사, 슈게스트 주사와 링거를 2시간 가량 맞으며 안정을 취했다. 슈게스트 주사는 맞을 때도 아프고, 맞은 후에도 아프다는 얘기가 정말 많았는데 이 주사마저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마취가 덜 풀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슈게스트 주사를 맞았지만 아프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내가 다닌 병원의 의료진들의 스킬이 능숙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는 스타일은 아니냐고?  전혀 아니다! 생리가 시작하면, 최소 하루 이상 출근을 안 하는 사람이고, 감기만 걸려도 드러눕는 엄살쟁이가 바로 나란 사람이다. 


천만다행히 모두에게 가장 큰 육체적 고통을 주는 난자 채취와 슈게스트 주사는 나에게 큰 고통 거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난자 채취한 그날 저녁, 엄마에게 낚여서 꼭 참석할 필요가 없었던 친척 식사 모임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진짜 육체적 고통은 배아이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 아파 죽을 것 같아!"


소리 지르며,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울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복수 증상, 아랫배 쪽 통증 등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일상 생활 내내 불편함과 고통 사이의 감각에 24시간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시술한 날, 선배 언니와 약속이 있었다.  미혼인 언니를 붙들고 시술 전 과정에서의 고통과 불편함을 하소연하다가 질문을 받았다.


"시술 과정에서 애 아빠가 하는 일은 뭐야?"


그랬다. 난임치료를 받는 "부부"라고 하지만, 사실은 "여성"만 시술 대상이 되는 게 아닌가. 남성의 정자에 문제가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결국은 문제 없는 여성까지 함께 이 고통스러운 전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난임치료 과정의 진짜 고통인 두 번째 정신적 어려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된다. "함께" 치료를 받는데, 사실은 함께가 아니라는 것.



2. 정신적 어려움



난임으로 힘겨워하는 부부에게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거드면서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부분은 얘기에서 제외하도록 하자. 시어머니나 친정 엄마가 손주 좀 보자고 하셔도, 뭐 .... 나는 그러려니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다. 속으로야 '안 생기는 걸 어떻게 해요?'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야, 예민한 사람들이면 그런 말 때문에도 진짜 스트레스 받아. 너 진짜 착하구나!"


오히려 이 얘기를 들은 친구가 하는 말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저런 얘기를 듣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똑같은 시술을 받아도,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이나 약에 대한 민감성 등이 다르듯, 동일한 처지에서 동일한 주위의 오지랖을 경험하더라도 수용자에 따라 느끼는 힘겨움도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 주변 사람들의 재촉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타고난 둔감함으로 거의 받지 않았으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 






차라리 "함께 난임치료를 받는데, 왜 혼자만 치료를 받는 것 같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시험관 시술이 진행되는 과정 내내,  남편은 장기 출장으로 집에 없었다. 약을 하루에 몇 번 챙겨 먹는지, 주사를 몇 대나 맞고 있는지, 내가 겪은 이 모든 과정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남편이 남의 편이라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신적으로도 그 과정에서 나는 혼자였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아기를 간절하게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멘탈 관리는 비교적 쉬웠다. 난임극복 시도를 하는 6년 내내 나의 태도는 "아기가 생기면 좋겠지만, 안 생겨도 괜찮아요."라는 식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간절하게 원하기에, 미적지근한 태도로 병원을 다녔을 뿐이었다. 혹은,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상처받을 일도, 힘들어할 일도 없을 거라고 미리 방어막을 쳐 놓은 것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결혼하면서 할머니께서 기르시던 화분 몇 개가 나와 같이 이사를 왔었다. 분갈이도 해주고, 영양제도 줘야하지만 할 줄을 몰라 그냥 물 주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화초들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잘 자라다못해 봄에도 꽃을 피운 게발선인장


그런데,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화분들마저 죽이면, 

나란 인간은 생명을 기르는 일과는 무관한 

불모(infertility)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


그래서 은근히 화초들의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것.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보면, 정신적으로 철벽 방어까지는 아니었겠지. 





사실, 가장 큰 고통은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반복되는 실패로 겪는 고통이 아닐까. 


인생에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마는, 솔직히 우리 대부분은 부모님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면서 크게 힘든 일을 겪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실패"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한 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을 노력으로 얻지 못하는 일도 그닥 경험한 적이 없는 젊은 부부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자.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 반복된 실패.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성공했을 시 얻게 될 커다란 기쁨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끝 없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는 절망감, 이 고통이 가장 큰 정신적 어려움 아니겠는가.



한 발자국 물러서자.


어찌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삶의 선택에 대해서도 열어놔야 견딜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이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확장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우리 부부는, 아기가 아니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억지로라도 스스로에게 되뇌자.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겪어본 나의 경험으로도 그러하더라.


시술의 성공에, 안정된 심리가 미치는 영향력은 정말 크다. 마음을 편하게 갖자.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기를 가져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내"가 아기를 만나는 것이다!



3.  경제적 어려움



난임치료 과정을 얘기할 때 다들  얘기하기를 꺼려하지만, 이건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정부 지원금의 혜택의 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전체 지출 비용을 생각한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각 과정의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나갈 때마다, 처방전이 없이 병원에서 구입하라고 권유했던 비보험 약 값을 결제할 때마다, 정말로 돈으로 애를 하나하나 빚어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맘카페에도 빚을 내서 난임시술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흔하게 나오는 걸 보면, 경제적 어려움은 정말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의 경우 대략 300만 원가량의 비용을 지출한 것 같다.  한 번 만에 성공한다면, 감당할 만한 액수이지만, 이 과정을 7~8 차례 이상 시도한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돈이 없다면 그전 단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나의 경우는 어떠했냐고?


7편 말미에 약간의 스포일링을 했던 것처럼, 나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달려나가야만 하는 난임치료 과정을 단 한차례로 끝을 낼 수 있었다. 


사실 7편까지 글을 쓸 때, 이미 성공이라는 결과지는 받아놓은 상태였다. 나처럼 문제거리가 많은 46세 비만 여성도 시험관 1차에 성공했으니, 여러분들도 힘내라는 메시지 하나를 전달하고 싶어서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쏟아지는 응원과 공감의 메시지 때문에, 마지막 편을 쓸 수가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아기집 보이면 임밍아웃 해야지.

심장소리 들으면 써야지.

기형아 검사만 통과하고 써야지....등등


막상 임신에 성공했지만, 나 자신이 희망의 아이콘이 되기에는 너무나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았다. 사실 지금도 조심스럽다. 노산 중에서도 초노산인데, 과연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다독여주시는 분들에게... 나 혼자의 성공 소식을 알리는 것이 또 다른 배신감과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마지막 편을 올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까닭을 이렇게 변명처럼 늘어놓아본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어느덧 임신 8개월에 이르렀다. 정말 감사하게도, 다른 임산부들이 겪는 자잘한 이벤트 한번 없이 무사히 하루하루 잘 보내고 있다. 



46세 시험관 신선배아 이식 1차 만에 임신 성공



과배란 과정에서도 부작용은 거의 없었고, 난자 채취 과정도 아프지 않았다. 모두 9개의 난자가 채취되었고, 담당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난자의 상태도 공난자 없이 모두 우수한 편이라고 하셨다. 난자 채취 후의 부작용도 거의 없는 편이었고, 9개의 난자 중 무려 6개가 수정 되었다. 



보통 3일 배양 이식 또는 5일 배양 이식을 하는데, 나는 애매하게 4일 배양 배아를 이식했다. 일반적으로는 3일 배양을 많이 하지만, 난자의 개수가 많아 좀 더 선별과정을 거쳐야 할 때는 5일 배양까지 간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가장 우수한 아이들을 이식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배양 3일째 되는 날에 이식 스케쥴을 잡아놓고 최종적으로 다시 조정을 했다. 5일 배양 이식을 하는 것은 담당 선생님의 휴가로 인해 불가능했기에, 4일 배양 후 이식이라는 흔치 않은 스케쥴로 진행하게 되었다. 시술대 위에 누워있는 나에게, 이식 배아 둘 모두 우수한 상태의 배아라고 말씀해 주셔서 기대감이 점점 더 커져갔다.


4일 이식 신선배아


나머지 수정란 4개는 5일 배양 이후 냉동 시키는 과정에서 하나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신선배아 이식이 성공률이 30% 중후반대인 것에 비해, 몸 밖에서 오랜 기간 생존 후 냉동 과정까지 거친 냉동배아는 수퍼울트라짱특급배아이기 때문에 성공률이 무려 50% 중반까지 나온다. 우리 부부는 어차피 1차에 성공하는 것은 로또 당첨되는 것과 같으니, 확률이 좀 더 높은 냉동배아 1개에 운명을 걸자고 얘기했다. 나도, 이번 차수에는 실패하고 냉동배아 이식에서는 성공할 거라는 예감을 가졌었다.



이식 후, 하복부 통증과 여러 가지 "증상놀이"를 겪을 때도, 이것이 임신 초기 증상인지, 아니면 시험관 시술 후 흔하게 겪는 일반적인 증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시술 전 과정에 성적을 매긴다면, 꽤나 괜찮은 점수를 줄 법한 성과가 보였고, 은근히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둔한 인간이 맞긴 한가 보다. 다른 분들의 경우, 참지 못하고 계속 피검 전에 임테기로 검사하고 초조해하고 안달하는데, 피검 당일날 아침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갔다. 당일날 아침에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고 임테기로 검사를 했는데, 테스트기 유통기한이 1년은 족히 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둔한 내 눈에 두 줄로 여겨지는 뭔가가 보였다. 



이 날도 남편은 출장으로 곁에 없었고, 메신저로 사진을 보내니, 기껏 돌아온 답변은


"축하합니다"


남의 일 같은 건조한 인사였다. 


내가 그러했듯, 남편도 실감 나지 않는 일인 듯했다. 영화에서 보듯이 기뻐 날뛰거나 감격해하는 그런 극적인 장면은 없었다.




병원에 가서 피부터 뽑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기한 후에야 진료실에 들어갈 수있었다. 물론 귀가하여 전화로 결과를 통보받을 수도 있었지만, 피검 수치에 따라서 추가 처방이 필요할 수도 있기에 2시간 대기를 선택했다.


4년 전 인공 수정 시도 후, 다 늙은 나이에 다시 병원을 찾은, 돌아온 탕자 같은 환자라서 시험관 시술 내내 차가운 모습이었던 선생님은, 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임테기로 확인해봤어요?"


유통기한이 지난 테스트기였는데다가, 너무 흐린 두 줄이어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임테기로 검사해 본 것은 사실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축하한다며 임신이라고 말씀하셨다.


1차 피검 결과는 197.


이전 인공수정 때의 처참했던 0.0032  이런 수치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많이 낯설었다.



그래, 난 될 줄 알았어



시술 과정 내내 사로잡혀 있었던 근거 없는 자신감과 희망으로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사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환호할 만큼 기쁘지도 않았고, 뭔가 덤덤했다. 임신이구나... 분명 기분이 좋긴 했는데, 2차 피검도 잘 나와야지, 초기 화학적 유산, 계류 유산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던데, 어쨌건 이제야 한 고비를 넘기긴 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


아침에 피를 뽑은 후, 대기하는 동안, 나는 병원 근처 맛집을 검색하고 있었다. 2시간 동안 슈게스트와 영양 수액을 맞고 나오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 쓰러질 듯 고픈 배를 움켜쥐고 나와서 근처의 5,900원 짜리 한식뷔페에 가서 혼밥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시부모님께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밥 먹고 나와서 친정 엄마에게 1차 피검사 결과는 좋게 나왔다고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내 입장에서는 한 다리 건너는 것이라, 혹시라도 잘못될 수 있으니 안정기에 접어들고 난 뒤에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치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또 자기 부모님이니 이 기쁜 소식을 바로 알려드리고 싶긴 했겠지.


일주일이 더 지나고 2차 피검일이 되었다. 이번 피검 수치는 3023. 혹시나 쌍둥이일까 하는 기대감과 두려움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아기집을 보기 전까지는 피검 수치로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쌍둥이 수치는 아니지 싶었다. 한 번에 둘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노산에 쌍둥이인 경우 평균 출생 주수가 30주 초반일 만큼 아기나 산모 모두에게 무리한 것이 다태아 출산인지라 두려움도 컸었다.


그리고 5주 차, 첫 초음파 보는 날.


무언가가 보인다. 


보통 초음파로 아기집이 보이면 그 때 임신 수첩과 임신확인증이 발급되고, 보건소에서 임산부 등록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나랑 안 맞는 우리 담당쌤..... 한 주 내내 학회 참석으로 휴진이라 다른 선생님에게서 진료를 받았고.... 임신확인증 이야기를 꺼내니 담당샘 오시면 받으라고 하신다. 초음파 사진도 못 받았다. 


내 새끼 6주 차 초음파 사진.... 우리에게 줄 줄 알았는데, 담당샘 차트에 쏙 끼워 넣어버렸다.


결국 처음으로 확보한 사진이 8주 차, 젤리곰 시기라고 부르는 때의 사진이다. 내 눈에는 젤리곰보다 개구리 같아 보인다.  이제야 조금씩 임신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난다.






임신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진짜 마음고생은 이때부터 시작이더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 마음고생이라도 기쁘게 기꺼이 받아들이실 거라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갖지 못한 것이랑, 가졌다가 잃어버리는 것이랑은 다르기에, 시술 과정에서 무덤덤했던 나조차도 하루하루 피 말리며 혹시라도 잘못될까.... 아주 사소한 몸의 상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난임일기는 끝이 났다.


피 말리는 임신일기, 태교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난임으로 고생하는 모든 분들께 46세에도, 이런 형편없는 컨디션이라도 기적이 찾아오니까 좀만 더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희망을 가지시길 기원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그 얘기 하나 전달하고자 먼 길을 왔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위한 참고자료로 몇 개월 째 책상 위에 나와있던 처방전 파일을 이제야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 홀가분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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