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뜨려는 마음을 고기 한 근의 무게로 가만히 눌러주는 것처럼 비가 내린다. 까슬까슬한 햇살이 돌아다니는 날이었다면 내 마음이, 잘못 들어선 일방통행로처럼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조용히 내리는 비 사이로, 정갈하게 갈아서 천천히 내린 커피 향이 엉켜 든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커피 향은 날카롭지 않은 피아노곡 하고도 잘 어울린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 어린 날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긴장감도 좋고, 우산을 받치고 자유롭지 못한 한 손으로 뭔가를 하려고 해도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부산스러워지는 손놀림도 좋다.
타려는 버스가 오기라도 할라치면 더 바빠지고 마는 그 허둥댐마저도 나쁘지 않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의식하면서 비좁은 버스에 올라탄 순간의 짧은 안도감. 그것마저도.
버스에서 내릴 때는 우산을 펼쳐 들기 전, 잠깐이라도 생짜로 맞아야 하는 그 빗방울에, 목덜미가 서늘해져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대부분의 날씨가, 어쩌다 한 번 햇빛이 나고 맑은 게 아니고, 어쩌다 한 번 비가 내리는지라, 그 어쩌다 한 번이 자못 신선하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의 부침개 공식처럼,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라는 익숙한 공식이 있다.
왜 굳이 비 오는 날에?
왜 하필 수요일이지?
많고 많은 꽃 중에 굳이 빨간 장미를?
개연성이라곤 1도 없는 이 법칙이, 괜스레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한 주의 딱 중간쯤인 수요일, 여유가 필요할 즈음, 때마침 비가 오는데, 분위기를 갈아탈 구실을 굳이 찾자고 들면 안 될 것도 없지. 비가 오면 나름 차분해지고 게다가 수요일이니 적당히 맘의 여유가 있고, 또 감정적으로 우중충한 잿빛 날씨를 희석해 줄 만한 것으로 쨍한 빨강이 나름 효과적이지. 암!
세상 멋있는 감동적인 말을 다 놔두고, "오다가 주웠어."라며 무심하게 건네는 빨간 장미라고 한들 그 어찌 아니 좋을쏘냐. 한 다발이 아닌 한 송이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