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놀이터-무수책방. 240317
알록달록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문이 제일 먼저 반기는 이곳, 무수책방!
입구의 흰 벽에는, 두 그루의 나무와 그 사이로 햇살이 또로록 떨어지며 나무 아래의 작은 생물들에게도 따스함이 흩뿌려지는 모양의 로고, 그리고 '무수책방'이라고 돋을 새겨진 간판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모양의 이 간판만으로도 장소에 대한 설렘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의 시선과 서가가 먼저 맞닿는 구조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유통의 흐름이 여느 대형 서점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독립서점의 성격상, 운영자의 개성과 취향과 고유한 규칙이 공간에 드러나 있다. 그곳만의 독특한 큐레이션을 짐작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마치 산타할아버지의 해묵은 판도라 상자를 열어보는 것 같다.
이곳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어떤 새로움이 이곳의 인상으로 남을까?
오늘 나는 여기에서 어떤 책을 가져가게 될까? 아니, 오늘은 어떤 책이 나를 선택하게 될까?
의도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이 나를 어떤 식으로 안내할지, 모든 것들이 설레고 조심스러워진다.
서가 앞에서의 나의 동공은 물의 흐름같이 유유히 움직인다.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선 무수한 회로들이 지극히 단순한 정보를 주고받느라 쫑알쫑알 시끄럽다.
책방에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한 나는 철저히 배제된다.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택하는 시간이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핵심은, 마치 내 집 거실과 같은 익숙함이다. 벽과 창가를 에둘러 구성된 서가는 익숙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중앙의 소파와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서가에 꽂힌 책들이 풍기는 느슨함이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서가도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정돈된 느낌이지만, 모든 칸을 채우지 않고 비워둔 서가도 적당한 헐렁함이 있어서, 시선의 흐름을 편안하게 해 준다.
이곳의 서가는 뭔가 철학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 한 칸 한 칸의 공간을 책이라는 한 종의 무기물로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게도 양보하고 여백에게도 내어주는 여유로움이 있다.
손글씨로 단정하게 쓰인 책날개의 메모들을 보면서, 이곳의 책을 다루는 운영자의 정성을 엿본다.
글을 쓰는 작가와, 책을 만드는 편집자와, 유통의 최전방에서 책과 수요자들을 맺어주는 책방 운영자의 마음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공간에 어울릴 만한 책들을 선별하고 서가에 배열하는 책방지기는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해 준다.
내가 '오늘의 책'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찬스도 어쩌면 그런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시간과, '책'이라는 구체적인 목적물이 만나서 나만의 '특별한 것'이 되는 이치가 새삼 특별하다.
다른 독립 서점과 확연히 구별되는 무수 책방만의 특징은, 국내 희곡 대본 단편집이 수십 권 구비되어 있어서 주 1회 이곳에서 희곡 읽기를 주최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심과 참여 의지가 있다면, 눈여겨볼 만한 곳이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느린 시선으로 서가를 두 바퀴 정도 훑어본 다음, 신중하게 고른 오늘의 책은 그렇게 또 특별함으로 남는다. 스스로를 타이르는 듯 일상의 화두를 던져준다.
바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 멈추라고 제동을 걸어주는 듯한, 느림의 미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