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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싱 Oct 13. 2021

나를 잃어버린 죄

네, 이놈!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대단히 무던한 편도 아니지만

불필요하게 까탈스럽지도 않은 편.


튀는 것도 싫지만

묻히는 것도 달갑진 않은.


적당히 행복한 것도 같지만

매일이 불행한 것 같기도 한.


오늘은 내가 참 좋은 것 같은 날도 있지만

한없이 아무것도 아닌 내가 한심한 날이 더 많은.


그래서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리가 없고 결국 나 조차도 모르는

그런 애매모호 뜨듯 미지근 정적이면서도 스펙터클한 우리는

그러니까 이십 년에 가까운, 살아온 기간의 반에 가까운 시간을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버렸다.


직장이라는 곳은

괜스레 튀면 찍히고, 묻어가자니 쟤는 뭐하는 애니 소리를 듣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당연히 그래서는 안되고, 어쨌거나 뭐라도 하자니 욕이나 얻어먹는 일이 절반에 가까운 일들을 하는 곳이라

무난하면서도 '엣지'있고 친근한 듯하면서 '알고 보면 카리스마'도 있어야 하며 털털한 듯하면서도 필요할 땐 짠 하고 '세련미 장착한 파워'도 어느 쯤은 보여줘야 하는- 인기 금토드라마에 나올법한 매력 넘치는 에티튜드 정도는 갖춰줘야 '야 너 사회생활 쫌 하는구나' 정도의 소리를 들을 곳이라.

얼척없이 나이브하게 굴다가는 이도 저도,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열심히 했는데 남은 건 뭔지 늘 골똘히 생각해도 답 안 나오는 그런 직이 될 뿐이다.


C는 사실 셋 중 가장 제때 승진하고 누구든 그녀의 태도를 흠잡는 이는 없을만한 티튜드를 갖추곤 했는데 심지어 어느 정도냐면 퇴사한 지금도 회식하는 중이라며 나오라는 연락을 종종 받을 정도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네네. 저야 잘 지내죠 하하하. 네? 지금요? 하하하 아 저 그러니까 지금은 좀 애들 밥을 차려줘야 해서... 네? 이 근처 노래방이라고요? 아.. 하하하 아 그럼.. 음.. 남편 오면 연락을 다시..."


S 미쳤냐? 그렇게 이 갈고 희퇴(희망퇴직)해놓고 걔네 회식 때 네가 가긴 왜 가~

C 몰라... 정신 차리고 보니까 나 마이크 들고 있더라고... ㅠㅠ

S 너 제발 거절 좀 해! 아 진짜 얘를 누가 말리냐...

J C언니 회사 다닐 때두 절대 거절 못했잖아요. 언니 퇴사했다는 사실을 잊었구만!

S 내 말이...! 얘는 왜 이러냐 도대체 아직까지~   

C 언니 근데... 담엔 언니랑 같이 나오래...     

S 미친~! 그러니까 걔네는 아직도 우리를 물로 보는 거라구!


위에서 찍어 누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고

잘되면 전략 덕, 못되면 디자인 탓의 주역인 한낱 일개 디자이너들이라 자처하는 S와 C는 국내 미술대학으로는 가장 실력 있다는 4년제 인서울 모대학을 졸업한 꿈 많고 패기 넘치는 젊은 언니들이었다.


S 너 오 부장이 또 어깨에 손 올리고 그래도 가만있었던 거 아냐?

C 아냐 아냐 언니.. 이제 어깨에 손은 안 올려. 근데 막, 막- 웃는 얼굴이 여전히 예쁘네요 C책임... 막 이러면서 느끼하게 쳐다봐!

S 아이고~ 미소천사 C책임, 또 웃다 왔네 웃다 왔어!

C 아오 나 진짜 안 웃을라 그랬는데... 자꾸 웃음이 나.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데.. 계속 웃게 돼. 나 이상해 정말. 걔네 앞에만 서면 입꼬리가 위를 향해 정지된 느낌이야!

J 언니 이제 C책임 아닌데... 그냥 C씨인데... ㅋㅋㅋㅋㅋ

C 내 말이. 자꾸 그렇게 부르니까 나 순간 퇴사한 거 깜박하구 막-!

J 그럴만두하죠 언니. 우리가 몇 년을 일했어! 주부보다 설설 기는 직장인이 더 익숙한 인생이었는데 ㅋㅋㅋ 이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냐구...

C 어... 맞아. 그리고 그 인간들 취하니까 자꾸 S언니 데리고 오라고... 디자인팀 맏언니 어디 갔냐고.

S 지들 좋을 때만 맏언니 또 나왔구만. 그 맏언니 찍어 누르고 헌신짝 취급할 땐 언제고?

C 언니, 그래두 언니가 진짜 우리팀 정신적 지주였어. 언니 없음 여럿 죽었을 걸?

J 맞아요. 난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정말 언닌 온화 그 자체였어.

S 내가 그래서 이렇게 맘에 병이 들었잖아...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애들 치닥꺼리 한다구.

C 맘에 병은 다 들었지 뭐... 우리 솔직히 자기 색깔 다 드러내고 회사생활 한 사람 누가 있어?

J 저요... ㅋㅋㅋㅋㅋ

C 그래, J 니가 그 점에서는 제일 갑이다!

J 에효, 언니. 갑은 무슨... 입사 한 달도 안된 경력한테 성과 나쁜거 다 뒤집어 씌우려고 한 K과장한테 들이받았다가 내가 몇 년을 찍혔어 ㅋㅋㅋ

S 용감했고 니 말이 다 맞긴 했는데 바른 말했다고 불이익 엄청 당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

J 그때부터 꽝이었는데 내가 거길 왜 그리 오래 버틴 건지 ㅋㅋㅋ

S 아냐, 그래두 일은 정말 잘했어. 너가 해놓고 나온 게 한 두개야?

J 여기 일 못한 사람 누가 있어요 언니. 거긴 성과로 평가받는 데가 아니었을 뿐.

C 그렇지, 맞지.

J 으아아아악! 우리 오늘 또 회사 얘기했어!!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분명

회사가 아닌 나를 위해 하는 짓이다.

회사가 바라는 것처럼, 상무님 이사님 사장님이 비전내림을 하며 때마다 정신교육을 시킨 것처럼

이 한 몸 회사를 위해 바치면 좋으련만 요즘 세상에 누가 회사에 인생을 갖다 바치냐-  하면서도

그런데. 그런데 자꾸 그 정신교육에 물들어간다. 자꾸 그 비전 내림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그들의 꼭두각시가 된다. 짜다면 물을 더 타고 싱겁다 하면 소금을 치고 간이 딱 맞다 해서 한시름 놓을라치면 어느새 이유도 없이 와장창 엎어버리며.다시 끓이라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늘 모르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주는 강력한 부적. 이름하여 '월급'.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온전한 정신 통일로 회사에 충성을 다할 것을 지켜주는 부적이 있다.


그렇게 한 달 한 달 부적을 몸에 새기며 나의 것을 내어주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왜 이 회사에서 그저 네네- 하며 장단을 맞춰주고 있게 되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증상이 심해지면, 그래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 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 거지 나라고 뭐 별거 있다고. 하게 된다.

    

그러니까 회사는 아무 잘못이 없다.

돈 주고 복지 주고 일 년에 며칠쯤은 쉬게도 해주고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꾸 좋은 말씀도 해주고 잘되면 차도 주고 집도 (빌려) 주고 직원 할인도 해주고...

결국 부적과 내림굿에 씌어 나라는 재물을 이젠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끔 되어버린 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꿈을 꾸지 않은 게 아니다.

이 몸은 하루하루 새벽이면 일어나 통근버스에 몸을 싣고 회사에 출근 하루 평균 8~10시간 쯤 시간노예를 해주고 퇴근을 하면 똑같이 1시간 남짓의 지옥철을 타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보살피고 집안 정리를 하고 못다 한 잡일들을 하지만...

아이를 재우면서 책을 읽고, 이른 아침 몇 분이라도 쪼개 글을 쓰고 주말이면 하루쯤은 나를 위한 시간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나를 찾고 찾을수록  공허해지는 아이러니. 그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긴 병. '이걸 해서 뭘 어쩌려구' 병.


뭔가를 해보려고.

다시금 하고 싶던 것을 뒤집고 뒤져 그래 이거야 하고 시작을 하다 보면 어느새 무언가 나의 귓가에 대고 소든 댄다.


"그거 해서 뭐 어쩔 건데...?"


그렇게 무기력 요정한테 다시금 영혼이 팔리고 나면 어느샌가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멍하니 누워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딜레마를 헤어 나올 방법은 당분간은 없어 보였다.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락.

나를 잃어버린 죄의 값.

그것은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Photo by Mitchel Lensin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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