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싱 Sep 07. 2021

희망퇴직의 '희망'은 그 '희망'이 아니예요

반쯤의 후련함과 나머지 반의 반쯤의 자조(自助), 그리고 또 남은 반쯤의 알 수 없는 미련으로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이태원 낯선 골목의 낯선 와인맛은 그렇게 적절히 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모두 담아내거나, 혹은 씻어내거나 했다. 희망퇴직(이하 희퇴)을 확정한 3인과 하지 못해 슬픈 1인, 그리고 이미 회사를 떠난 또 1인 그렇게 다섯은 지나간 옛날 일과 현재의 무엇들을 안주삼아 깊어가는 밤을 잊었다.


C  오늘 그래서 IPL 계좌를 만들러 은행엘 갔어. S언니랑 같이 갔지. 적어야 할 서류가 왜 그렇게 많은 거야 도대체.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일단 적으라는 건 다 적었어. 그렇게 열심히 싸인을 하고 있는데,

우리 상담해주던 그 창구 언니가 혀를 차기 시작하는 거야. 아니 그래- 회사를 관두구 어쩌려구?   

S 완전 황당.

C '애두 키우구... 살림도 하구... 일단 준다 할 때 땡기려고요.' 

J 정말 그렇게 말했어?

C 어. 알게 뭐야.

S 근데 문제는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된 거야. 생판 언제 봤다고. 생각 잘해야 된다, 애 더 크면 필요한 건 엄마가 아니라 돈이다, 그래도 금융계가 젤 나은데 어딜 가는 거냐...

J ㅋㅋㅋ 완전 오지랖이네

C 아, 그때부터 갑자기 싸인이 꼬이기 시작하는 거야. 심지어 정말 아 나 진짜 이거 하는 거 맞아? 갑자기 막 그런 생각까지 드는 거지-

S 얜 그러더라구. 내가 빨리 하고 나가자 안 했으면 그 자리에서 종이 찢을 뻔 ㅋㅋㅋ

일동 ㅋㅋㅋㅋㅋ

K ...누님들 안나가면 안요...?


어느새 불콰해져버린 K씨가 원점을 맴돌고 있었다.

아마도 희퇴를 하고 싶냐, 고려하지 않고 있냐를 따진다면 일등으로 신청서를 들고 줄을 섰을 K다.

하지만 애 둘인 외벌이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고, 그 가랑이를 잡는 게 '회사'가 아닌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이었다는 것은 조금은 슬픈 일이었다. 같이 끝까지 남아보자는 그의 애원은 '나도 데려가면 안돼요?' 하는 말에 더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S 에휴, K야. 일단 좀만 참아봐. 사람은 새로 들어올거구, 한바탕 물갈이되고 나면 남은 사람들 다니기 좀 나을지도 몰라.

J 언니, 지금 K씨 귀에 그 얘기 절대 안 들릴 거 같애.

C 그래 언니. 솔직해지자. 우리도 만약 K처럼 가장이었다면 이렇게 못 나간다?! 우리 진짜 도망치는 거잖아.

S 그건 맞는 말이지...

L 맞아요... 언니들은 결혼하고 남편에 애들이라도 있죠...


우리 중 제일 어려서 늘 이쁨 받는,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마냥 귀엽지만은 많은 곧 마흔일뿐인 L이 말했다. 예쁘니까 괜찮다는 언니들의 진심이 사실상 조금의 위로 그 이상이 될 수 있을 리는 만무한 게 사실이긴 했다. 한잔 한잔 기울일수록 그저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만으로 가득해졌을 뿐이니까.


J 그래도 결국 통장은 잘 만들고 나온 거지?


복직 후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 속에 세상 빠른 속도로 '변함없는' 회사에 지쳐버린 나머지 둘과 달리 아직 육휴에 몸담고 있는, 그저 얼마 남지 않은 복직을 두려워만 하던, 그 와중에 희퇴 공지가 떠 그 기회를 덥석 문 J가 말했다.

 

J 나 오늘 되게 재밌는 사실 한 가지를 알았어.

일동 ?

J 우리 육휴 끝나고 복직하면 6개월 뒤에 육휴비 나머지 받잖아. 근데 어쨌거나 복직 전에 희퇴를 해버리면 그걸 못 받잖아. 근데 그게 계산해보면 꽤 큰돈이란 말이지? 못해도 6-700은 될 거 같은데. 애들 영어학원비 일년반치야.

일동 크지, 크지.

J 못 받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몰라 고용부에 전화를 해봤어. 희망퇴직하면 혹시 그 돈은 어떻게 되냐고.

C 그랬더니?

J 받을 수 있대!

S 와, 정말? 짱이다. 어떻게?

J 아니 사실 나도 이상해서... 사직을 당하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희망'퇴직은 본인의 '희망'에 의한 자발적 퇴사인데 가능한 거 맞냐구.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희망퇴직에서 '희망'은 그 '희망'이 아니에요.'

C 그럼??


그랬다.

우린 모두 희망퇴직의 '희망'이 본인의 희망에 의한 퇴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의미인즉슨, 지금은 퇴직하지만 당신에겐 '희망'이 있다. '희망'을 드린다. 그래서 명명된 이름,

'희망퇴직'은 바로 그런 뜻이라는 것.


C 그래서 오늘 은행 언니가 우릴 보고 혀를 찼던 거구나! 우린 당당하게 희망해서 퇴직하는데 저것들 불쌍하다 희망이 없네 그 의미였어! 아흑흑


한바탕 웃었지만 알 수 없는, 조금은 웃픈(웃기고도 슬픈)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희망'을 해서 희망퇴직 기회를 잡았고, 이 회사와 더는 일하기 싫소를 당당히 외치고 나왔건만, 지들이 뭔데 우리한테 희망을 주고 말고를 하냐며 의미 없는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를 반복해보았지만 마음 한 켠에 감춰져 있던 알 수 없는 폐배 의식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한날한시에 퇴사하는 퇴사 동기가 되었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시간 속에 입사했던 '공채'가 아닌 한낱 '경력직'이었고, 그럴싸한 대기업 그룹사 내에 '비(非)공채'라는 타이틀 속에 갇혀버린 십여 년의 시간은 적어도 우리에게만큼은 견딜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룹의 이슈로 회사는 매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곧 버릴 회사의 장래나 그 안의 직원 배려 등은 사실 없는 게 당연한 그룹의 처사는 그래도 고용 안정성이 높고 어쩌면 기존의 네임밸류보다 더 나은 퀄을 보장할지도 모를 타 금융회사로의 흡수가 아닌, 모 m&a 전문 사모펀드에게 회사를 팔아치워버렸다.

그룹은 아마도 남는 장사를 했겠지만 그 안에 남은 우리는 역대급 고용 불안정과 불합리한 처우들에 휘둘리며 사실 '희망'퇴직이 아닌 그 무엇도 불사할 위기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날 아침에 바뀌어버린 ceo와, 후폭풍 같은 예고 없는 변화들.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숱했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불합리함 들을 이젠 정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정점의 구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녔지만 그래도 대학 졸업 후 어쨌거나 자신의 분야에서 일이란 걸 해온 20년차가 가까워지는 직장인들에게 회사를 그만둔다는 건 그래도 조금은 더 견뎌볼까 하는 생각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또 그런 이들이었고.

혹자는 이직을 하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하지만 이제 막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는, 연차는 찰만큼 차 버린, 하지만 남들보다 밀려버린 승진에 어디 가서 명함 한 장 내밀기 참 애매한 또 그런 부류들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을 때까지 남아있었건만, 아마 앞으로 몇 년간 회사는 더 힘들어질 건데, 그래서 어쩌면 진짜 무일푼으로 너네 중 몇에게는 사직을 권고할 수도 있는 날이 정말로 올 수도 있는데, 지금 너네에게 제안하는 이 돈이 대단히 큰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라고 생각될 그런 날이 정말 진짜로 올 수도 있는데. 나가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덥석 물어버린 우리는, 그 퇴직은 우리의 '희망'일까, 그들이 준 '희망'일까.


@diopkin1, 출처 unsplash



그렇게 퇴직을 한지 어느덧 일 년.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빨리 흘렀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딱히 이룬 것은 없다.

주부 '놀이'라 명칭하던 일시적 실직 상태는 빼박 주부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없는 신세가 된 것도 같고 그렇다고 구직 활동을 한 것도 아니지만 온전히 아이 엄마, 혹은 아내만으로는 성이 안차는 '사십대 희망퇴직한 경단녀가 되기는 싫지만 또 그렇다고 애는 키워야하는' 애매한 부류라고나 할까.


로부터의.  

혹은 그 시간으로의 기억 자투리를 여기 기록해고자 한다.





Photo by Scott warman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