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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Dec 06. 2020

영화 <이장> 지금 우리가 선 자리

경기씨네 영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본 글은 영화 <이장>(정승오, 2019)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피로한 이장행 끝에 되돌아가는 얼굴들. 영화의 엔딩, 귀경하는 오남매의 얼굴 위 그늘이 짙다. 단순히 1박 2일 소동이 피곤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신산한 무언가가 이들의 마음속에 무겁게 침잠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장>은 가부장제를 향해 보기 좋게 한 방 날릴 것처럼 예고했지만 정작 영화에 관류하는 의식은 기실 희망보다는 냉정한 현실 직시에 가깝다. 오남매의 마지막 표정에 활기가 아닌 응달이 깔린 이유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 글은 영화의 아쉬운 설정과 전개 뒤로 드리워진 불쾌한 소양감에 관해 고민하고 탐색한 나름의 결과물이다.


<이장>은 짧은 러닝타임에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번갈아 제시한다. 혜영(장리우) 부의 묘 이장을 서사의 큰 줄기로 하되 큰아버지 관택(유순웅)-옥남(강선숙) 부부와 오남매, 동민(강민준)과 윤화(송희준)의 이야기를 곁가지로 삽입해 영화를 전개한다. 영화 속 차례차례 자리 잡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장>은 친족 내 젠더화 된 권력 관계가 현시점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형상으로 존재하는지 스케치한다. 캐릭터 설정 의도 역시 비슷한 맥락 아래 있다. 영화의 어른들은 현재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용 혹은 저항하는 몇몇 유형을 그대로 본뜬 결과물이다. 극의 초반부 가부장제의 화신 관택과 진보적 여성 인권 운동가 혜연(윤금선아)간 대립에서 알 수 있듯이 <이장>은 친족 공동체 내 젠더 가치를 둘러싼 수구와 변화 사이 갈등을 투명하게 현시한다.


판형에 가까운 여러 캐릭터가 동시다발로 등장하다 보니 <이장> 속 인물과 각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의 심도는 얕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컨대 영화는 혜영(장리우) 캐릭터를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장녀, 경력 단절에 맞닥뜨린 싱글맘의 전형으로 만드는 단계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에게 개인의 내밀한 역사와 굴곡 치는 정념까지는 물리지 못했다. 다른 인물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관택과 옥남, 오남매와 윤화는 영화의 주제 관념에 겉도는 설정과 사연만 안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무리한 욕심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한명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씨네21>, 1250호)는 우혜경 평론가의 지적은 <이장>의 한계를 적확히 설명한다. <이장>은 스크린 바깥 군상의 표본을 추출하여 스케치하는 단계까지 성공했지만 딱 거기서 멈추어버린 셈이다. 너무나 투명한 설정과 화법은 솔직할지언정 깊은 울림을 자아내지는 못하다.



동민의 특수성

그런데 동민은 다르다. 영화 속 성인 인물들이 투명하고 얕은 캐릭터임에 비해 동민은 애매한 위상을 점한다. 무엇이라 딱 잘라 정의하기에 모호한 캐릭터. 바로 이 점이 동민을 <이장>의 특별한 캐릭터로 만든다. 극 중 유일한 어린이 동민은 보기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제할 수 있다. 겉으로 판단하기에 동민은 혜영이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혜영에게 이따금 부모의 고단함을 일깨우는 어린 자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에 심오한 추리는 필요 없다. 영화의 피부로 드러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이장>에서 동민이 단순한 어린이 역할로 그친다기엔 영화의 대우가 각별하다. 영화는 오프닝 신을 포함하여 곳곳에 동민의 시점을 제공하거나 동민을 부각하는 컷 편집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장>은 동민에게는 다른 함의를 부여하고 싶었을까?


다른 관점에서 동민은 기혼 여성의 모성애를 숭상하기 위해 지정되는 소년성 짙은 남성의 이미지를 현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해석에서 동민은 가정 내 마땅한 책임에서 도피하는 남성상을 어린아이의 외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자니 승락(곽민규)이 거슬린다. 무책임한 태도의 인물형은 성인 승락으로 충분하다. 굳이 동민을 끌어다 비약을 감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장>이 영화를 꾸리는 방식이 투명하다는 점을 환기한다면 후자의 해석은 어린 동민에게 무리한 상징성을 대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동민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일면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한쪽의 설명만을 내세우기엔 온전하지가 않다. 혜영의 어린 자식으로만 보기엔 의미심장한 단서가 많고 동민을 남성성의 한 유형으로 판단하기엔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동민을 ‘어린 남성’으로 보면 어떨까. 정확히는 ‘미래 세대의 남성’ 말이다. 가족 영화 속 제일 어린아이들을 미래 세대로 규정하는 것까지는 큰 무리가 아니다. 영화는 동민의 구체적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동민이 초등학생이라는 점과 동민으로 분한 강민준 배우의 실제 나이를 고려한다면 대략 초등학교 3학년~4학년 전후에 걸쳐있지 않을까 추론할 뿐이다. 열 살 언저리의 나이를 사춘기가 시작된 청소년으로 보기엔 이르다. 그렇다고 유년이라고 칭하기엔 과분하다. 유년기를 빠져나왔으나 청소년에 도달하지는 못한 나이. 그 경계의 영역이 동민의 캐릭터를 함축한다. 동민이 자리한, 유년에서 벗어나 소년으로 진입하는 지대에서 영화를 들여다본다면, 미래 세대 남성으로서 영화와 현실을 잇는 동민의 존재 의의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창 성장 중인 동민의 앞날에 다양한 사회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동민은 상급 학교를 거치며 여러 방면의 배움을 터득할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성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도 있을 것이다. 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전통적 남성 젠더 관념이 동민에게 접근한다. 영화는 의도적인 장면 배치를 통해 동민의 젠더 습득 과정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교실 오프닝 신은 악동의 등장을 예고한다. 동민은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반 친구들에게 어깃장을 놓고 담임선생님 앞에서 서슴없이 욕을 내뱉는다. 이러한 첫 등장은 동민이 한참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 말썽꾸러기임을 알린다. 또한, 방금까지 혜영에게 떼를 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셋째 이모 금희(공민정)와 장난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동민이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동민에게 아직 전통적 남성성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로서 동민의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는 큰아버지 관택과 동민을 비교한다. 관택과 옥남의 첫 등장 신을 상기해보자. 백숙 준비에 여념이 없는 옥남과 달리 관택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담배를 문다. 옥남이 관택에게 남매들이 오는 중인지 물어보지만, 관택은 답이 없다. 옥남이 소리 높여 되물어도 관택은 그런 옥남에게 시선 한 번, 말 한마디 주지 않고 방 안으로 퇴장한다. 옥남은 그런 관택의 행동에 이미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내가 벙어리랑 사는 것인지, 산 송장이랑 사는 것인지”라며 혀를 찬다. 이 장면 직후 영화가 비추는 얼굴은 동민이다. 이전 신의 과묵한 관택과 달리 동민은 금희와 수다를 떠느라 바쁘다. 영화는 금옥(이선희)의 입을 빌려 “쟤(동민)는 언제 말 안 해? 어떻게 쉬지도 않고 계속 말하지?”라며 관택과 동민의 이질적인 성향을 재차 강조한다. 노년의 관택과 소년의 동민을 대비하는 편집은 간결하지만, 영화의 전체 흐름에서 의미 있는 비교 포인트를 점한다. 이 컷 편집은 현재의 동민이‘남자는 과묵해야 한다’는 불문율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린다.


이렇듯 영화 초반부의 동민은 성 역할에 얽매이기 전 어린아이 자체이지만, <이장>의 스토리를 거치며 동민의 근저에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가 다가온다. 변화의 기점은 동민이 관택의 집에 남겨졌을 때다. 네 자매가 승락을 찾으러 떠난 사이 관택의 집에서 자던 동민이 일어난다. 단잠에서 막 깬 동민은 평소처럼 엄마를 찾는다. 그런데 동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가 아니다. 동민은 아마도 관택 집안의 선대 가장들이었을 네 노인 남성의 얼굴을 사진으로 마주한다. 이 신에서 카메라는 먼저 동민의 시점으로 사진들을 바라보고 다시 자몽한 기운으로 사진을 보는 동민의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동민의 응시와 동민의 얼굴이 연접한 편집은 그가 이전과 다른 환경에 놓여 있음을 새삼 일깨운다. 동민이 잠에서 깬 장소는 가깝게는 네 자매와 함께 있던 차에서, 멀게는 아버지의 부재로 엄마에게 의지하며 살던 배경과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혜영의 차 안이 투덕거리면서도 서로의 안부를 다정히 묻던 혈육의 정으로 채워진 공간이었다면 관택의 집은 냉엄한 수직적 권력 구조가 지배하는 곳이다. 동민의 가정이 여성 가장 혜영의 노동과 돌봄으로 지탱되던 곳이었다면 관택의 집은 두터운 고목 같은 가부장제의 규율 아래 예속된 공간이다. 지금 동민은 강력한 부계 권위가 존속하는 현장에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가부장제와 동떨어진 삶을 살던 동민은 남성 중심 질서가 공고한 장소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이러한 얄궂은 설정은 동민이 성장하며 수없이 경험할 남성 중심 문화 습득의 첫 신호탄인 셈이다.


<이장>은 유사한 상황에 상징적 변수를 두어 관택의 집을 거치기 전후 동민의 태도를 비교한다. 영화 초반부, 차에서 자매들을 기다리는 동안 동민과 혜영이 말다툼한다. 차 뒷자리로 가라는 혜영의 말에 동민은 돈을 요구하거나 말꼬리를 붙잡으며 혜영의 화를 돋운다. 이때 동민의 성미는 유난스러울 만큼 이악스럽다. 이제 영화를 뒤로 돌려 <이장>이 직조한 비슷한 상황으로 이동해보자. 관택이 폐가에서 동민을 찾는 순간이다. 관택은 동민을 발견하고 도망치는 동민을 잡아 들쳐 멘다. 허우적대며 저항하는 동민. 자신을 내려놓은 큰할아버지의 배를 한 대 친다. 관택은 짐짓 매서운 눈으로 동민을 내려다본다. 동민의 치기는 이내 관택의 권위에 짓눌린다. 관택이 동민에게 “괜찮다”며 달래는 모습도 있지만, 이 신 전체에서 강하게 감지되는 기류는 결코 혈육의 정이 아니다. 견고한 친족 내 위계질서가 두 남자 사이를 웃돈다. 동민의 눈으로 올려다보는 관택의 엄한 표정과 바로 이어 관택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동민의 겁먹은 표정을 이어 붙인 편집은 부계 혈통 사이의 권력 관계를 관객에게 일깨운다. 대사조차 별로 없는 이 신이 매우 서늘한 이유다. 비슷한 상황, 동민의 상반된 태도는 영화 초반 혜영과 동민의 승강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혜영이 어르거나 주의를 주는 방식은 동민의 악동 기질을 설복하는 데 실패했지만, 어쩌면 동민이 처음 대면했을 남성 가부장의 권위는 동민을 빠르게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는 동민의 태도 변화를 대구 형식으로 빚어 미래 세대 남성들의 삶 곳곳에도 가부장제의 영향이 엄습할 것임을 예고한다.



파묘가 될 순 없어

<이장>이 가부장제를 바라보는 씁쓸한 통찰은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영화는 파묘가 아닌 이장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성묘는 혈족을 결속하고 제사는 가족 내 남성의 권위 유지 및 계승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파묘는 반대로 가부장제에 기반한 가족주의와 고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장>은 묘를 드러내고 유골을 화장하고 골분을 수목장하는 과정을 ‘이장’으로 칭할 뿐 파묘라고 언급하는 법이 없다. 화장에 한사코 반대하는 관택이 열불을 내뿜을 때도 ‘파묘’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장이라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어조의 원칙을 도입한다. 이토록 영화가 파묘에서 살짝 빗겨 난 이장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영화는 파묘라는 급진적이지만 명료한 선택을 두고 이장을 고집했을까.


잠시 동아시아 가족드라마를 경유해 답을 고민해보자. <동경 이야기>(오즈 야스지로, 1953)에서 출발해 <객도추한>(허안화, 1990)을 거쳐 <하나 그리고 둘>(2000, 에드워드 양)까지, 지난 세기 동아시아 가족드라마에서 일가친척을 모으는 사건은 가족의 경조사였다. 결혼식에 축복을(<객도추한>, <하나 그리고 둘>), 장례식에 애도를(<동경 이야기>, <하나 그리고 둘>) 표하기 위해 인물들은 한 곳으로 모였다. 결혼식과 장례식의 공통점은 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 당사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신랑·신부의 새로운 앞날에 덕담을 건네거나 고인의 지난 생애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주된 제재는 당사자의 삶이다. 행사 주인공의 인생 여로에 특이점을 장식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선의가 바로 친족 공동체를 모으는 응력이었다.


<이장>에 작용한 응력은 이장에서 파생한다. 이장이 집안의 큰일임은 맞지만, 결혼식 및 장례식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상술한 사례 영화들 속 가족 행사가 생애 주기 속 특이점을 표상했다면 이장은 죽음 이후 남아있는 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를 의미한다. 이장 과정의 중핵은 무덤 주인의 삶이 아니다. 무덤을 어디로, 어떻게 옮길지가 이장의 주된 사안이다. 특히 영화 <이장>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혜영 부의 족적이 아니라 이장 행위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네 자매의 몫이다. 딸들을 박하게 대한 아버지가 정녕 미웠다면 자매들은 화장 후 납골당 안치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오남매의 생활권인 서울 지척 봉안 시설에 아버지를 모시는 합리적인 선택 말이다. 관택의 꼬장꼬장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절충안이라고? 관택의 반대는 영화 표면상 이유일 뿐이다. 금옥과 승락의 대사에 묻어난 것처럼 생부의 유언에 대한 일말의 예의 아니냐고? 자매들은 조금 전(저녁 식사 자리)까지 아버지의 남존여비 행실을 공연히 씹었다. 관택의 반대와 혜영 부의 유언은 참고 사항일 뿐이지 정언명령이 아니다. 더군다나 관택은 이장 과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상태다. 이는 자매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외부의 강제가 미력함에도 네 자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기억의 여러 군데 상흔을 새긴 부계 중심 문화와 단절하길 원하나 적극적 자유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자매들은 이장이라는 숙제를 풀면서 스스로 제동을 걸고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파묘 방법을 포기한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파묘라는 상징적 단절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 그 이유는 관택과 혜영 부로 표면화된 가부장제 기반 가족주의가 자매들에게까지 습속으로 젖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차별 대우에서 처음 겪기 시작했을 남성 중심의 문화가 이들에게도 오랜 시간에 걸쳐 체화되어있다. 이것이 오랜 유습의 고리를 일순간에 파괴하는 통쾌함이 <이장>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부친 묘 개장(改葬) 전 혜영을 제주(祭主)화함으로써 소소한 변화를 응원할 뿐이다.


“유학파도 유교파가 되는 게 한국 시부모” 아마 <이장>에서 제일 노골적인 유머가 아닐까 싶다. 작중 결혼을 앞둔 금희에게 금옥은 시댁의 재정에 의존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금희가 예비 시부모는 개방적인 편이라고 두둔하자 금옥이 앞의 농을 던진다. 간결하고 싱거우며 작정하고 웃음을 유도한 농담이건만 말의 무게가 자못 무겁다. 어쩌면 작품 전반에 기저하지만 미진한 표현에 가려진 영화의 통찰을 직접적으로 담아낸 대사가 아닐까 싶었다. 지금 어느 누구도 가부장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씁쓸한 현주소 말이다. 결국 <이장>의 여정은 가부장제와 그것에 기인한 젠더 권력 불균형을 극복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외형이 변모하더라도 당분간은 유지될 제법 어두운 현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감독: 정승오

출연: 장리우, 이선희, 공민정, 윤금선아, 곽민규, 강민준 등

장르: 가족드라마

수상: 20회(2019) 전주국제영화제 CGV 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 40회(2020)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상(곽민규)

시청가능플랫폼: 유튜브




본 글은 경기콘텐츠진흥원과 씨네21이 주관한 경기씨네영화관 영화 평론 공모전 우수상 입선작입니다. 본 글을 포함한 공모전 당선작들은 《2020 경기인디시네마-경기씨네영화관 사용설명서》 책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글에 좋은 평가를 매겨주신 여러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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