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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Sep 08. 2020

작은 배역도 결코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 영화

[영화의 단상] 영화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2019) 리뷰

이 글은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매의 여름밤>의 주 무대는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이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다고 추정되는) 2층짜리 주택의 형상은 마치 아름드리나무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도 언제까지 있을 것만 같은 아름드리나무처럼 이 집 또한 흘러가는 시간을 묵묵히 헤아릴 것 같다. 밝은 담갈빛을 띤 목재 몰딩과 옥색과 흰색이 체크를 이루는 바닥 장판과 우직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투박한 구식 오디오는 이 집의 오래됨을 그대로 현시한다. 집 안에 켜켜이 스민 세월의 흔적은 집의 원래 주인 할아버지에게도 고스란히 배어있다.


영화 속 할아버지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대사량은 턱없이 적고 카메라가 그를 좇는 일도 별로 없다. 영화 초반부 옥주(최정운)네 가족이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조차 그는 일사병으로 인해 병원에 있었다. 아빠(양흥주)가 그를 모시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그는 두 손주를 향해 별다른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병약하고 노쇠한 캐릭터’ 설정을 차치하더라도 이로 인해 할아버지는 그가 오랜 시간 살았을 집이 자리한 배경(후경)의 위치로 물러난다.


이토록 과묵하고 정적인 할아버지와 집은 아빠와 그의 차량 다마스와 각각 쌍개념을 이룬다. 선뜻 포개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항은 비가시적이지만 마음 한편에서 짐작으로 느껴지는 기시감을 이룬다. 기본적으로 아빠와 다마스는 영화 주인공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존재다. 영화 중반부 아빠가 ‘짝퉁 나이키 운동화’를 다마스에 가득 싣고 한여름 좌판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별다른 서사가 없는 이 짧은 쇼트는 아빠가 가족의 생활을 위해 나름의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금 후에 나오는 원단 가게 장면도 다르지 않다. 


이외에도 오프닝 이사 시퀀스, 장례식 이후 귀가 씬 속 아빠가 운전하는 다마스는 주인공의 성장을 은유한다.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써 차량과 운전자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옥주가 과거, 유년, 일상으로부터 이별하고 이후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연장하며 앞에서 언급한 두 장면의 카메라가 다마스의 뒤를 잡으며 트래킹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된다. 오프닝 이사와 장례 이후 귀가 장면은 다마스 바로 앞에서 다마스와 그 안의 옥주 가족을 주시한다. 탑승자(옥주)의 시선과 배치되는 해당 카메라는 옥주의 미래를 섣불리 예고하지 않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처럼 사건 이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런 과정에서 한 뼘씩 자라는 성장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집’과 ‘아빠:다마스’가 디제시스 내에서 꼭 등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빠가 동분서주하게 운전하는 행위로 치환된 책임감 있는 중년 부모가 후에 날긋한 집으로 표현된 사려 깊은 노년 부모가 될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공영방송 드라마 덕분이건 실제 개인의 경험 덕분이건 간에 비근한 사실임은 틀림없다.


영화가 그러한 암시를 조금 더 직접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거실에서 단잠을 자는 동주(박승준)를 본 아빠의 얼굴에 장난기가 감돈다. “학교에 늦겠다”며 동주를 급히 깨우니 동주는 “왜 이제 깨우냐며” 투정을 부린다. 이내 오늘이 방학임을 깨달은 동주는 아빠의 장난을 웃어넘기고 다시금 잠을 청한다. 사실 이 장난은 아빠가 동주만한 나이일 때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친 장난이었다. 한가로운 장난이 대를 이어 반복하는 것처럼 ‘동주가 아빠만한 나이’가 되면 다마스를 끌고 ‘짝퉁 나이키 운동화’를 팔던 아빠는 조용한 후경의 위치로 물러설 것이다.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렇다고 ‘나이가 들면 예전만큼의 역할을 못 해 퇴장하기 마련’이 <남매의 여름밤>을 관류하는 의식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동주에게 텃밭의 작물을 거두는 법을 알려주거나 옥주-동주 남매의 싸움에 불쑥 나타나 둘의 감정을 달래주기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뒤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가족을 돌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소싯적처럼 활발하게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쇠잔한 할아버지 역시 지금의 아빠가 그러하듯이 가족을 지탱했고 더불어 개인의 역사를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구식 오디오의 발산하는 풍부한 성량으로 음악을 즐기기도 하는 여유도 보이지 않은가!)


옥주가 희읍하는 마지막 씬은 가족을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에게 헌정하는 애도이다. 영화가 디제시스 전반에 걸쳐 조용히 자기 자리를 채워준 캐릭터에게, 영화 디제시스 한참 전부터 가족을 지탱하고 인물들의 성장을 도운 부모에게 바치는 애도의 표현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이처럼 주인공 옥주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물들까지 따스한 시선으로 살뜰히 챙기는 휴머니즘 드라마다.

45회(2019)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24회(2019)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8회(2020)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49회(2020)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밝은미래상 수상작




감독: 윤단비

출연: 최정운, 양흥주, 박현영, 박승준 등

장르: 성장 영화

수상: 45회(2019)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24회(2019)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8회(2020)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49회(2020)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밝은미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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