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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Sep 08. 2020

쓸모 있는 질문과 쓸모없는 질문 <메기>

[영화는 왓챠지-9월 1주]영화 <메기> (이옥섭, 2018)

이 글은 영화 <메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메기>(이옥섭, 2018)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질문과 믿음, 의심이다. “믿음을 검으로, 의심을 방패”로 삼은 채 질문을 주고받으며 <메기>는 전진한다. 나름의 신념으로 사건을 판단하는 인물들의 고민은 꽤나 진중하지만 정작 사건의 중핵을 겨냥하지는 못한다.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한참 주변을 경유하다가 요점을 찌르는 질문을 겨우 꺼내었을 때 진실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반면 겉도는 질문만 반복한다면 사건의 핵심은 어느새 이야기 바깥 저편으로 밀려난다.


"<메기>의 사직서 씬이 생산하는 웃음은 실상 어이없어 웃는 양천대소에 가깝다."


영화의 첫 번째 주요사건인 ‘SEX-ray’ 에피소드는 후자에 해당한다. “병원 사람들의 탐정 놀이”가 X-ray 사진 속 피사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주인공 윤영(이주영)과 성원(구교환)도 이 소란에 가담한다. 이들은 X-ray 사진을 허리에 맞대보며 피사체가 자신들의 몸이라고 지레 확신한다. 믿음이 성립하고 나서 윤영과 성원의 다음 행보는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그들은 도망치는 방법을 골똘히 고민한다. 바로 여기서 ‘辭職書’, ‘사직서’, ‘GOOD BYE’가 쓰인 세 가지 유형의 사직서를 놓고 신중하게 토의하는 터무니없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 장면이 생산하는 웃음은 마냥 말초적인 희락보다는 실상 어이없어 웃는 양천대소에 가깝다. SEX-ray 토막극에서 ‘누가 몰래 촬영했는가’라는 질문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과 범인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는 한, 인물들의 의심과 질문은 부유한다. 성원이 X-ray 사진을 살펴보는 장면부터 부원장(문소리)과 윤영의 기 싸움까지, 인물들은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견해만 내뱉고 그 말은 쓸모없이 흩어진다. 진상 규명이 아닌 의심을 굳히기 위한 수단으로 질문이 반복될 때 실속 있는 담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징악을 향한 궤적을 벗어나 엉뚱한 곳에 열을 쏟는 양상은 영화 바깥세상의 작태와 흡사하다. 사직서 씬이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오발(誤發)된 질문과 의심이 그득한 세태가 얼마나 한심한지 꼬집기 위함일 것이다. 오직 메기(목소리 천우희)만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안타까워 한다.


다행히 영화는 윤영에게 두번의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 말미 윤영은 성원의 과거 데이트폭력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그에게 직접 묻는다. 러닝타임 절반 가까이 지속되던 의심은 윤영의 질문으로 손쉽게 해갈된다. 이때 성원의 자리에 싱크홀이 만들어지고 성원은 화면에서 사라진다. 드디어 사건의 주요 심부를 꿰뚫는 유용한 질문이 등장했을 때 영화는 싱크홀을 투입하여 더 이상의 비화(祕話)를 차단한다. 많은 이들이 마지막 싱크홀의 개입에 찬사를 보냈다. 그 찬사들이 대개 공통으로 거론하는 요인은 카타르시스다. 만일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느꼈을 답답함을 엔딩의 싱크홀이 대신 해결해 통쾌함을 선사한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범죄가 발생하면 흔히 붙좇는 이야기들이 있다. 기실 우리에게 익숙한 레퍼토리는 꼬리를 물고 들려오는 악인의 뒷이야기 전달이다. ‘평소 행실이 어떻고, 주변인의 평판은 어떠하고, 원한 관계가 있었는지…’ 구태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보도된다. <메기>는 스스로 억지력을 동원해 기성 사회가 관습처럼 생산하고 있는 내러티브를 거부한다. 더 이상 성원의 자리를 제공하지 않을뿐더러 혹시나 윤영이 괜한 질문을 할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성원의 폭력 행사에 얽힌 뒷이야기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용한 질문-진상 규명-필벌은 <메기>가 바라는 서사의 올바른 계제이다.


"관객은 그런 메기의 전지적 시점을 공유한다."


영화 속 유일하게 문제의 근원을 감지하는 존재는 메기다. 관객은 그런 메기의 내레이션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전지적 시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스크린 밖의 우리는 <메기> 속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의 믿음과 의심이 목적지를 잃고 떠돌듯 우리의 태도는 진실을 직시하는데 어수룩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전능한 물고기 해설자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메기의 설명과 전지적 시점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일단 메기를 통해 연습해보라고. 그다음에는 윤영이 그랬듯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진실에 접근하라고. 쓸모없는 질문과 이야기가 범람하면 유용한 질문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메기>는 권한다. 전능한 메기는 못될지라도 엽렵한 사람이 되어보자고.




<메기>

감독: 이옥섭

출연: 이주영, 구교환, 문소리 등

수상: 7회 들꽃영화상(2020) 극영화 감독상, 23회 부산국제영화제(2018) 시민평론가상, 44회 서울독립영화제(2018) 관객상

시청 가능 플랫폼: 왓챠,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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