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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낮의 바다 Aug 04. 2020

영어를 배우는 기쁨과 슬픔 1

영국어학원의 '캐시'로 찾은 제2의 자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스타트업 여행사에서 근무하면서, 영어로 곧잘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한국에서 아무리 잘해봤자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적어도 반년 이상은 살다오고, 길게는 석사까지 따고 온 동료들 사이에서 내 실력은 댈 것이 못됐다. 나는 이 회사의 유일한 비유학파였다. 그래서 영국어학원에 등록했다.


'캐시'는 내가 요즘 본명 다음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이다. 직장인이라는 자아 못지않게 학생이라는 자아가 큰 요즘의 나는 본업을 마치고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어느 정도의 직업적 효능감과 떳떳하게 들이밀 수 있는 명함을 제공하는 나의 직업 말고도, 영어를 배우는 일은 요즘 또 다른 '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영어 구사능력이 필요한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나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꽤나 좋아하고 영어를 배우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다.


모두가 지적하는 언어에 위계가 있다는 사실과, 외국인이 처음 배우기에는 끔찍하리만큼 어렵고 줏대 없는 띄어쓰기를 차치하더라도 내가 한국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밈으로도 소비될 만큼 '그거 있잖아, 내가 그것 때문에 그랬어'라고 말해도 사회적으로 '알아 들어야만 하는' 이 언어는 언어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과 힘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보여준다. 나의 또 다른 영어 선생이 알려준 예시로는 요리 과정을 말로만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어에서 의성어, 의태어가 아닌 적확한 단어와 동사를 사용해서 요리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이렇게 분명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하는 현대 한국어의 발화 방식은 범죄를 범죄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나쁜 짓', '철없는' 등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영어를 배우는 일은 어떨까.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되고 나서 내가 느낀 첫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이 언어는 나를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가능한 어른으로 대우해 줘! 그동안 젊은 여성 한국어 발화자로서 얼마나 언어를 '공손하고', '예쁘고', '눈치 있게' 말하라는 압박을 받아왔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저 '공손하게'라는 표현을 정확하게 대치할 수 있는 영단어는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Politely'와 'Respectfully'는 위계가 반영되지 않은 표현이다. 심지어 한국 사회의 많은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답변은 정답처럼 정해져 있었다.


영어 학원에서 글을 쓰고 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을 때 선생님과 나눈 대화는 꽤 충격적이었다. 쭉 읽기에는 다소 글이 프라이빗하다고 느낀 나는 선생에게 물었다. 'Do I have to read it all?' (나 이거 다 읽어야 해?). 한국어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지나온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답은 자명하다. 읽으라면, 읽어야 한다. 하지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You don't have to read it if you don't want to, but since you wrote it, why don't you share it to the class?' (네가 원하지 않으면 읽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왕 썼으니, 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건 어떨까?).


다양한 학생들과의 소통 기회를 위해 자리를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리를 옮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학생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옮기세요-'에서 끝나는 한국어와는 달리, 그는 이렇게 말했다, 'Cathy, I know that's your seat, but could you move?' (캐시, 그 자리가 네 자리라는 건 알아, 하지만 움직여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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