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 발굴 조사 현장에 가다>
고대지는 성토를 높인 곳으로 성벽이 꺾이는 구간에 만든다고 한다. 자연능선이 아닌 직접 쌓아서 올린 성벽인 것이다. 몽촌토성에는 총 3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문, 남문, 동문이다. 성 밖에는 성내천이 몽촌토성의 동쪽과 북쪽을 감싸고 흐르면서 자연 해자의 기능을 했다고 한다. 성벽은 나무틀 안에 흙을 붓고 다져 올리는 판축으로 축조했으며, 현재 남쪽과 북쪽, 동쪽에 각각 성문자리가 남아있다.
(*판축법은 한성백제박물관에 실물크기 모형을 잘 만들어 놓았다.)
현재는 산책길로 잘 포장이 되어있지만, 삼국시대 도로가 발견되었고, 길게 이어진 길은 풍납토성과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는 흙으로 도로를 만들었지만, 백제는 인위적으로 포장한 도로 즉 구획식 포장도로라고 한다. 북문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격자모양으로 구획한 삼국시대 대형 포장도로, 물을 모으고 저장하는 목곽집수지, 건물지 등 중요한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이제, 직접 발굴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집자리에서 발견된 기와 혹은 그릇 조각들을 시대별로 분류해 놓았다. 중요한 유물은 국가유산청에서 가져가지만 자잘한 유물들은 이렇게 모아놓고, 직접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유물을 직접 만져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중에도 유약을 바른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런 토기는 중국 토기라고 한다. 또 한성백제 유물 가운데는 사비시대 백제의 토기도 발굴되었는데,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몰아내고 이곳에서 대규모 축하 행사를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발굴 현장으로 직접 내려가는 것은 일반 관람객은 할 수 없지만, 우리는 특별관람객이라 발굴 현장으로 직접 내려가 볼 수 있다. 이 답사의 목적이기도 하다.
발굴 현장은 언듯 보면 집을 짓고 있나 싶지만, 조심스럽게 진흙을 퍼서 자루에 담고 계셨다. 이렇게 조금씩 자루에 담으면 그 자루에 담긴 흙을 채에 걸러 유물을 찾는다고 한다. 이때 발견된 유물들은 동물뼈가 많고 그중에 말머리뼈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 '궁'자가 찍힌 항아리, 얼굴모양을 새긴 토기 뚜껑 등 백제 한성도읍기 유물이 다수 출토 되었고, 중국, 왜(일본), 가야 등 주변 나라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뒤 일정 시기 동안 몽촌토성에 주둔하였음을 나타내는 고구려 유구와 유물, 백제 성왕이 한강 유역을 탈환했을 때 백제군이 몽촌토성에 다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고구려시대 땅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고구려층에서는 고구려 목간도 발견되었고, 목재 쟁기도 완전체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보통은 손잡이 부분만 발견된다. 발견된 위치는 벽 쪽이었는데, 사용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례, 제사 등 행사를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중요 시설을 묻고 그 위에 다른 시설을 지을 때 중요한 물건을 같이 매장하는 것)
그리고 백제가 만들어 놓은 도로와 집수지를 고구려가 집수지로 사용한 후 그 위를 덮어서 광장으로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굴현장에서 나와 성벽 발굴 현장으로 이동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일반 관람객은 출입할 수없고, 또 언덕이라서 조심조심 담당 학예사님을 따라 들어갔다.
성벽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여러 단층들을 흰색으로 칠해 놓은 것이다.
판축기법의 흔적으로 수평은 흙을 수직은 나무판을 댄 흔적이고, 동그란 부분은 나무를 박은 흔적이라고 한다.
아직도 발굴은 진행 중이다.
조심조심 발굴 현장에서 나와 처음 보았던 목책(아닐 수도 있는)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멀리 서울역사편찬원 건물이 보였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동문지에 도착하면 답사는 마무리가 된다.
유적과 유물은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던 그 시대로 가는 중요한 단서이다. 이런 단서가 많이 발굴되고 복원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도시화가 되고 도로가 생기면서 찾는 것은 더 어려워졌고, 그래서 이런 장소들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번 답사는 이렇게 발굴되도록 노력한 전문가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