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월, 악연의 시작

by 한이제이

환한 보름달이 뜬 여름밤, 대청마루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당에는 모깃불이 은은하게 타고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호랑이가 정말 사람을 잡아먹어요?”

“그럼, 그러니까 나라님도 아비에게 호랑이를 잡으라 명하지 않았겠느냐?”

“저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훌륭한 무관이 될 꺼예요.”

“그러려면 글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무예 연습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아비 말 잘 알겠느냐?”

“네.”

아들의 눈은 반짝였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위도총부 부사직 박윤은 호랑이를 잡는 착호갑사로 뽑혀 호랑이를 잡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집에도 가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오로지 호랑이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걷는 박윤과 달리 군졸들과 부사용 송만석은 뒤처져 있었다.

더 이상 무리라는 생각에 송만석은 박윤에게 가서 말했다.

“부사직 나리,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뒤를 보세요. 다들 많이 지쳤습니다.”

송만석의 말에 박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틀 밤을 박윤과 함께 산에서 보낸 군졸들의 지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박윤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느티나무를 발견하고 그 아래서 쉬도록 명했다.


송만석은 지친 군졸들을 이끌고 느티나무 주변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박윤도 무거운 쇠뇌를 잠시 내려놓고 앉아서 쉬었다.

쉬고 있는 군졸들을 보니 호랑이를 잡겠다는 생각만 한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송만석에게 군졸들을 이끌고 하산하라고 명령했다.

“부사용이 이들을 통솔해서 먼저 가게. 나는 조금만 더 둘러보고 바로 감세.”

“하지만 그러다가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혼자 어쩌시려고요? 저라도 옆에 남겠습니다.”

송만석은 박윤과 함께 남고자 했지만, 박윤은 단호했다.

“어차피 오늘도 호랑이를 잡긴 틀렸네. 나도 곧 뒤따라갈 터이니 걱정 말고 먼저 가게”

“그럼, 바로 내려오십시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박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송만석은 군졸들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산 아래로 갔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마을로 내려가던 송만석은 생각했다.

‘호랑이를 혼자 잡고 포상을 독차지하겠다는 겐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지.’

그리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던 군졸에게 말했다.

“난 나리가 걱정되어 다시 가봐야겠네. 여기서부터 자네들끼리 내려가게나.”

“네, 그럼 부사용 나리도 조심하십쇼. 저희 먼저 내려가 기다리겠습니다.”

한 군졸의 말에 송만석은 오던 길을 되돌아 산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군졸들은 아래로 내려갔다.

혼자 남은 박윤은 느티나무에 기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잠시만 쉬고 일어나려는데,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박윤.

그리고 그런 박윤을 깨우는 여자의 목소리에 눈이 번뜩 떠졌다.

“여기서 이리 주무시면 큰일 납니다.”

소리 나는 곳을 보니 단정한 쪽머리에 소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아, 네.”

“오늘 밤은 신월이라 불길한 기운들이 활개를 치는 날이죠. 어서 마을로 내려가세요.”

“불길한 기운이라뇨? 신월은 또 뭡니까?”

“신월은 달이 모습을 감추는 때를 말합니다. 이런 날 밤 산속은 말 그대로 암흑이죠. 별빛 하나 없는 암흑 속에 악귀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소만, 조심하도록 하지. 헌데 그쪽은 어찌 혼자 산에 있는 것이오?”

“전 대대로 백호신을 모시는 무당입니다. 저기 아래가 제 거처지요.”

“백호신이라…… 난 사람을 헤치는 호랑이를 찾고 있소. 조심히 둘러보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갈 터이니 걱정 마시오.”

“이곳은 밤이 금방 찾아옵니다. 아직 많이 남은 듯하지만 금방 어두워질 겁니다.”

연가는 박윤에게 경고 같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박윤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고 내려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무렵, 어둠이 금방 찾아올 것이라는 연가의 말대로 신월의 밤이 시작된 듯 빛은 사라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천천히 움직이는데 갑자기 주변에 안개가 생기더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조용하던 산속에 크르렁―, 크르렁― 호랑이 소리가 났다.

포기하고 내려가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들려온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드디어 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박윤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걷는데,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호랑이의 모습은 쉽게 박윤에게 보이지 않았다.

안개를 손으로 휘저으며 계속 소리를 쫓아 걷다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고 박윤도 지쳐있을 때, 대나무 숲 사이에 검은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길고 긴 추격의 끝이 보인다고 생각한 박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어깨에 메고 있던 쇠뇌를 풀어 검은 형체의 짐승을 향해 겨눴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대나무 숲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휘익~~ 불더니 짙은 안개가 박윤을 감쌌고, 검은 짐승의 형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고 앞을 보았다.

그랬더니 어두웠던 시야에서 검은 형체의 짐승이 희미하게 보였다.

박윤의 사정거리에 들어온 검은 짐승.

너무 긴장한 탓에 쇠뇌를 잡은 손이 저리고 땀이 찼다.

박윤은 겨눴던 쇠뇌를 잠시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주변으로 반딧불이 모여들더니 초록빛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빛 덕분에 좀 더 선명하게 검은 짐승이 박윤의 눈에 들어왔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쇠뇌를 잡은 박윤은 앞에 보이는 검은 짐승을 향해 활을 겨눴다.

천천히 밤안개가 걷히면서 검은 짐승 주변으로 박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듯 초록의 반딧불 빛이 모였다 사라졌다.

그러자 그토록 잡고 싶었던 호랑이, 그것도 평생 한 번 만날까 싶은 동물의 최상위 포식자 검은 호랑이의 뒷모습이 박윤의 눈에 들어왔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신기한 일이 연속으로 박윤에게 일어나자 꿈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흑범은 박윤이 뒤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공격 자세를 하고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박윤이 흑범이 보고 있는 것의 시선을 따라 보니, 흰색 도포를 입은 신선 백호가 은은한 빛을 내며, 하늘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두운 신월의 밤이 시작되었지만, 신선 주변의 밝은 빛이 어두운 기운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누르는 것처럼 박윤은 느꼈다.


그런데 자세를 한껏 낮추고 공격을 준비하는 흑범이 그 신선을 노린다는 것을 알았다.

박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쇠뇌를 고쳐 잡고 흑범을 향해 겨눴다.

자신을 공격 하려고 숨어있는 흑범을 본 것인지 못 본 것인지 백호신 천천히 대나무 줄기를 밟으며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휘어진 대나무 줄기는 신선이 땅에 발을 대자, 마치 알아서 받쳐준 것처럼 천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때 빠른 속도로 백호신에게 달려드는 흑범의 우렁찬 소리에 박윤은 그만 쇠뇌의 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잘못 발사된 쇠뇌의 화살은 빠르게 흑범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고, 흑범의 꼬리에 명중했다.

백호신은 달려드는 흑범을 보고 밝은 빛의 기로 흑범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흑범은 몸통을 움직일 수 없었고, 잘린 자기의 꼬리가 백호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았다. 분통해하며 겨우 고개를 돌려 화살이 날아온 곳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박윤과 눈이 마주쳤다. 두려움을 느낀 박윤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박윤의 코를 자극했다.

“뭐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 박윤은 자기 집 마당에 서 있었다. 박윤을 반기며 뛰어나오는 어린 남자아이와 돌이 지난 듯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서 있는 박윤의 부인.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남자아이는 박윤에게 달려와 안겼다.

“꿈인가? 내가 꿈을 꾼 건가?”

박윤은 안도하며 남자아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아버지, 호랑이는 잡으셨어요?”

“뭐? 호랑이?”

순간 주변이 다시 대나무숲으로 변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낀 박윤은 바로 앞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니 놈이 감히…… 크르릉――”

흑범이 박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에 찬 눈빛이지만 기세등등한 모습은 없고, 잘린 꼬리 때문인지 비틀거렸다. 남은 힘을 다해 박윤을 공격하려 앞발을 들어 올린 흑범, 그 키가 박윤보다 더 컸고 위협적이었다.

박윤이 다리가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백호신이 강한 장풍을 일으켜 흑범을 날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송만석은 먼저 박윤에게 달려가 부축했다. 박윤이 정신차리고 누군지 보는데, 송만석이었다.

“부사용, 자네가 여길 어떻게…… ”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 흑범은 뭐예요?”

송만석의 눈에 백호신은 보이지 않았다. 박윤은 저주에 걸릴 수 있다는 연가의 경고가 떠올랐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세. 자세한 얘기는 마을에 가서 해 줌세.”

“아니 눈앞에 보물을 놓치시렵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쇼. 제가 저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이보게, 따라가면 위험하네.”

흑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대나무 숲 사이로 사라지자, 송만석은 박윤의 경고도 무시하고 흑범의 꼬리에서 흐른 피가 붉은 선으로 이어지는 곳을 따라갔다.


송만석이 흑범을 따라 사라지자, 백호가 다가왔다.

그리고 박윤에게 흑범의 꼬리를 건넸다.

“붉은 조각, 꼬리, 네 일가에 씌워진 저주를 풀 열쇠이니라.”

백호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던 박윤은 꼬리를 받고 쓰러졌고, 붉은 조각이 박윤의 옷에, 화살촉에 스며들었다.

백호는 쓰러진 박윤을 한 손으로 번쩍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월의 밤이 지나고 대나무 숲에 동살이 펴졌다.


송만석은 흑범이 남긴 핏자국을 따라 걷다가 낡은 폐가를 발견했다. 조심조심 폐가 안을 들여다본 송만석은 죽은 듯 누운 흑범을 보았다.

‘저 호랑이만 잡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 ’

송만석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든 흑범과 눈이 마주친 송만석,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져 꼼짝할 수 없었다.

“니 놈의 눈에는 욕망이 가득하구나. 내가 그 욕망을 채워주마.”

송만석은 홀린 듯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흑범의 잘린 꼬리에서 흐른 피가 송만석의 다리를 타고 눈을 통해 송만석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송만석은 생전 겪어보지 못한 통증에 괴로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