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주의 씨앗이 심어지다.

by 한이제이

박윤이 눈을 떠보니 작은 방 안이었다. 그리고 방문이 열리면서 산에서 보았던 무당 연가가 들어왔다. 온몸이 물에 젖은 이불 솜처럼 무거운 탓에 천천히 일어나 앉은 박윤은 자기의 손목에 오색실 매듭의 팔찌를 보았다.

“그 오방색 팔찌를 절대 풀면 안 됩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살을 맞았거나 저주에 걸렸을 때 누르는 데 효과가 있으니까요.”

“혹 내가 어떻게 여길 왔는지 아시오?”

“제가 신당에서 기도드리고 있는데, 방울 울리는 소리가 나서 나와보니까 나리께서는 문 앞에 쓰러져 계셨어요. 행색을 보니 크게 외상은 없었으나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죠.”

“고맙소. 근데 저주라니… 혹 내가 만난 흑범 때문인 거요?”

“만난 것만으로 저주에 걸리진 않아요. 만약 그놈의 흔적이 나리께 닿았다면 그래서 저주에 걸린 것이겠지요. 우선 댁으로 돌아가 계세요. 당분간 외부인은 만나지 마시고요. 또다시 신월이 오기 전에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가던 박윤은 뒤따라 나오는 연가에게 물었다.

“이렇게 절 구해주셨는데,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요. 저는 오위도총부 부사직 박윤이오.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로 선출되어 호랑이를 잡으러 산에 왔지요. 혹 제가 무언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뇨. 나리 옆에는 쇠뇌와 화살통만 놓여있었습니다.”

‘그것도 환영이었단 말인가? 분명 흑범의 꼬리를 받았는데……’

연가의 싸리문에 쳐놓은 금줄의 방울이 박윤의 손이 닿자 울리기 시작했다.

“저는 연가라 하옵니다. 산에서 말했듯 백호신을 모시고 있죠. 이제 날이 밝았으니, 그놈은 당분간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연가가 싸리문을 열자, 방울 소리는 멈췄고, 박윤은 천천히 마을 가는 방향으로 내려갔다. 연가는 박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싸리문을 닫고 신당으로 들어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에서야 집으로 들어온 박윤은 대문이 열리자, 마당을 쓸고 있던 돌석아범이 놀란 표정으로 마을 맞았다.

“아이고, 나리.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돌석아범의 놀란 목소리에 부엌에서 뛰어나온 성주댁도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호랑이한테 홀리기라도 하셨남유? 워째 넋 빠진 얼굴이세유.”

성주댁을 뒤따라 나온 유씨부인은 박윤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말했다.

“조용하시게. 나리는 좀 쉬면 괜찮을 것이니, 이상한 소문 나지 않게 입조심하고.”

돌석아범과 성주댁은 서로 눈짓으로 입조심하라는 손짓을 했다.


박윤은 방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피 묻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깔아놓은 이불 위에 그대로 누워 깊은 잠에 빠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박윤의 아내 유씨부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잠이 들었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흙이 묻은 버선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손목에 붉은 오방색 팔찌를 보았다. 웬 팔찌인가 싶어 풀어서 머리맡에 잘 두고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이때,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석아범이 대문을 열자, 군졸 서너 명이 들어와 유씨부인을 보고 목례를 하고 말했다.

“부사직 나리는 산에서 오셨습니까?”

유씨부인은 박윤의 옷을 행주치마로 감싸고 말했다.

“좀 전에 오셔서 지금 쉬고 있습니다. 근데, 호랑이는 잡으셨나요?”

“호랑이는커녕, 짐승 소리만 듣다 저흰 먼저 내려왔죠. 부사용이 나리를 찾으러 간다고 하셨는데, 같이 오셨나 해서요.”

옆에 있던 군졸도 한마디 했다.

“네, 저희만 먼저 내려와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부사직 나리가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유씨부인은 이들을 빨리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좀 쉬셔야 하니, 깨시면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네, 그럼 저흰 부사용이 왔는지 집으로 가보겠습니다.”

군졸들은 유씨부인에게 목례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돌석아범이 대문을 잠그자

부엌으로 간 유씨부인은 밥 짓는 성주댁에게 말했다.

“자네는 선이랑 솔이 데리고 장터에 가서 애들이 좋아하는 풍물패 놀이 구경하고 오게나.”

“알겠구먼유. 근디 마님 혼자 괜찮겠어유?”

“걱정말게. 나리는 하룻밤 쉬고 나면 좋아질 것이니. 그리고 절대 밖에 이상한 소문 나지 않게 말조심하시고.”

유씨부인은 사랑채와 별채에 있는 선과 솔을 불렀다.

“너희는 성주댁 따라 풍물패 놀이 구경하고 오렴. 어미가 성주댁한테 돈을 좀 주었으니 맛난 것도 사달라고 하구.”

신나 하는 솔이와 다르게 심각한 표정으로 선이 말했다.

“아버지가 오신 것 같은데, 솔이만 갔다 오라고 하시고, 저는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 곁에 있겠습니다.”

열 살짜리 선은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로 유씨부인에게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씨부인은 성주댁에게 말했다.

“솔이를 잘 데리고 갔다오게. 선이는 아버지 곁을 지킨다 하니.”

다섯 살 솔이는 오라비 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나랑 같이 가. 성주댁이랑 가면 재미없어.”

솔이의 투정에 선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솔아, 둘이 갔다 오면 오라비가 전에 말했던 거기 데리고 갈게. 알았지?”

“진짜? 약속했다. 그럼 나 갔다 올게~”

솔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성주댁의 손을 잡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유씨부인이 말했다.

“선아, 아버지는 지금 주무시는 것 같으니, 니가 아버지 곁에 있어 줄 수 있겠니?”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선이 박윤이 있는 사랑채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엌 아궁이에 행주치마에서 꺼낸 박윤의 피가 묻은 옷을 넣었다. 아궁이의 불이 확 타오르면서 박윤의 도포가 불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늦은 오후, 텅 빈 마당에 비가 요란스럽게 내렸다. 박윤의 곁을 지키던 어린 선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아버지 옆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박윤과 선이 잠든 방 안에는 요란한 빗소리가 가득했다.

비가 그치고, 솔이와 성주댁은 장터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성주댁은 부엌에서 유씨부인에게 타다만 옷 조각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이게 아궁이에 있었슈.”

성주댁이 보여준 옷 조각은 낮에 아궁이에 넣은 박윤의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피가 묻은 부분만 불에 타지 않고 검게 그을린 채 남아있었다. 유씨부인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자, 창문 밖에서 그림자 하나가 서성였고, 크르릉-- 낮은 동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하지만 잠에 빠진 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누워만 있던 박윤이 그 소리에 반응하듯 갑자기 경기하며 눈알이 뒤집히고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의 소리에 놀란 선은 몸이 경직되어 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버지!”

경기를 멈춘 박윤은 천천히 눈을 떠 선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어린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선은 방에 놓여있던 물수건으로 박윤의 입을 닦았다.

“아버지.”

“선아… 아버지 마… 말 잘 듣거라.”

박윤은 마지막 기운을 짜내듯 겨우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빛이 바뀌더니 한마디 했다.

“저 문갑에서 아버지 단검을 꺼내오거라.”

“네? 단검이요?”

선은 박윤의 말에 방안 문갑의 서랍에서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작은 단검을 찾았다. 그리고 단검을 박윤에게 보여주자, 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은 박윤에게 단검을 건넸다. 단검을 건네받은 박윤은 차갑고 무서운 말투로 말했다.

“니 아버지 목숨은 내가 가져간다. 넌 내 물건을 찾아라. 안 그러면 다른 가족도 모두 죽을 것이다.”

말이 끝나자, 박윤은 단검을 뽑아 스스로 자결했다. 그리고 박윤의 피가 선의 얼굴에 튀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 박 윤을 지켜보던 선은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박윤에게서 빠져나온 검은 형체가 쓰러진 선에게 다가가 선의 심장에 붉은 조각을 심어놓고 창밖으로 쓱― 나갔다. 방 안에서 들린 이상한 소리에 방으로 들어온 유씨부인은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소스라치듯 놀라 약사발을 떨어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 부인……”

박윤은 마지막 힘을 다해 유씨부인을 불렀다.

“네, 저 여깄어요.”

유씨부인은 피가 흐르는 박윤의 목을 옆에 있던 물수건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선을 지켜주시오. 부인께는 며… 면목이 없소…”

마지막 숨을 토하듯 한 마디 남기고 박윤은 눈을 감았다.

유씨부인이 절규하며 박윤을 끌어안자, 성주댁과 돌석아범이 황급이 달려와 방안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성주댁은 선을 돌석아범의 등에 업혔다.

“어여 의원으로 가유.”

돌석아범은 선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마님, 이게 뭔 일이래유. 마님, 정신차리셔유.”

성주댁은 혼절한 유씨부인을 깨우려고 계속 흔들었다.


검은 형체는 박윤의 집에서 나와 빠르게 마을 골목을 지나고, 장터를 지나 송만석의 오래된 집 대문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리고 이장의 집에서 박윤의 집이 어딘지 물어보려던 연가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검은 형체의 이동이 느껴졌다. 밝은 달빛은 순간 먹구름에 가려졌고, 다시 소나기가 내릴 듯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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