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붙은 폐가위로 푸른 빛이 솟아오르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포위하던 포도대장과 포졸들은 꺼진 횃불을 들고 서둘러 마을로 내려갔고, 솔은 폐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 남은 힘을 다해 쓰러진 선을 끌고 나왔다. 선의 가슴에는 목검에 찔려 흐른 피가 옷을 적셨고, 죽은 듯 의식이 없었다. 솔이 괴로워하며 선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데, 마침 연가가 달려왔다.
“나리!”
연가가 선을 살펴보니, 가슴의 상처가 깊었다.
“어서 나리를 옮겨야 합니다.”
솔은 연가의 말에 울음을 멈추고, 같이 선을 들고 천천히 연가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폐가를 벗어나자, 비가 그치면서 산에는 푸른 동살이 퍼졌다.
이른 새벽, 포도청은 분주했다. 폐가에서 큰 전쟁이라도 치른 것처럼 포도대장이 지친 몸을 이끌고 포졸들과 함께 포도청에 들어서자, 감찰관이 포도대장을 맞이했다.
“포도대장 조갑성은 오라를 받으시오!”
놀란 포도대장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포졸 두 명이 포도대장의 양팔을 잡고 포승줄로 묶었다.
“이거 놔라. 무슨 짓이냐. 내가 지금 마을에 역병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밤새 산속에서 생고생하다 왔거늘!!”
포승줄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는 포도대장에게 감찰관이 말했다.
“흑월각 객주 송만석의 밀무역을 눈감아주고 그 대가를 챙긴 포도대장 조갑성을 의금부로 압송하라.!”
“무, 무슨 말씀입니까? 밀무역이라뇨. 억울합니다.!”
포도대장이 억울함을 말하는 사이, 포도청으로 유향소 김좌수가 끌려와 포도대장 옆에 섰다.
“유향소 좌수 김재수는 흑월각 객주 송만석과 함께 밀무역으로 이득을 취득한 증좌가 있으니 역시 의금부로 압송하라!”
감찰관의 말이 떨어지자, 포졸이 김좌수의 팔을 포승줄로 묶었다.
“모함이오! 누군가 날 모함한 것이오!”
포도대장과 짠 듯이 김좌수도 억울함을 토로하자, 감찰관은 비밀 장부를 두 사람 앞에 보였다.
“이래도 억울하다 할 것인가? 어서 두 사람을 압송하라!”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고 포도대장과 김좌수는 포승줄에 묶인 채 포도청 밖으로 끌려 나갔다.
같은 시각, 흑월각 앞으로 포졸들이 몰려와 송만석을 잡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흑월각 주변 전각과 비밀 사당, 창고를 샅샅이 뒤져도, 송만석은커녕 그 많던 수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흑월각 주변으로 모인 마을 사람들은 빈손으로 나오는 포졸들을 따라 포도청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도착했을 때 마침 포승줄에 묶여 의금부로 향하는 포도대장과 김좌수를 보며 수군거렸다.
“송객주의 비밀 장부가 사실인가 보네.”
“돌석아범 말대로 종사관 나리가 역병에 걸린 게 아니었구먼.”
“그럼, 우리 마을 저주도 풀린 건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포도대장과 김좌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장이 결심한 듯 한마디 했다.
“이제 우리가 박 종사관을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겠나?”
이장의 말에 수군거리던 마을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연가의 집 작은 방에 누워있는 선과 선을 간호하는 솔. 솔은 선의 가슴에 생긴 목검에 찔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빻아 상처 위에 얹고 붕대를 덧댔다. 잠시 후, 연가가 기력을 회복하는 약을 달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는데, 괜찮겠죠?”
솔이 깨어나지 않는 선을 걱정하며 말했다.
“10년의 고통이 사라지고 이제야 비로소 편해지셨으니, 상처만 잘 치료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긴 시간을 고통받으며 지내는 줄 몰랐어요. 그저 나만 생각하며 지낸 시간이 너무 원망스러워요.”
“자책하지 마세요. 나리가 바라는 것은 아씨가 걱정 없이 잘 지내는 것일지도 몰라요.”
솔은 연가의 말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듯, 선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오라버니!”
“나리, 정신이 드세요?”
“그, 그 놈 은 어 찌 되었소?”
“나리 덕분에 무사히 소멸시켰습니다.”
“그, 그 럼 저 주 가 풀린 것이오?”
“네, 나리께 더 이상 붉은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라버니만 회복하면 돼.”
선은 솔을 보고 안심이 되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 후.
연가의 집에서 치료받고 회복한 선과 솔은 마을로 내려와 폐허가 된 이 포졸의 집 앞에 섰다.
“아무도 이 집을 돌보지 않았구나.”
“그러게요. 우리 집도 저리되었겠죠?”
선은 솔의 말을 듣고 이 포졸의 집을 보았다. 역시 아무도 돌보지 않았을 본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걱정 말거라. 오라비가 원래대로 고쳐놓을 것이니.”
솔을 안심시키듯 말했지만, 사실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이 포졸의 집을 지나 한적한 골목을 따라 걸었다. 장터 입구에 도착해 보니, 어느 때보다 더 활기차게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홍월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어두운 기운을 벗어내려는 듯 화려하게 변한 흑월각이 눈에 띄었다.
“오라버니, 보세요. 송객주가 다시 돌아온 걸까요?”
솔은 송만석을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커졌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는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이 아직도 송 객주요?”
“에이, 송 객주는 무슨. 그자의 재산은 몰수됐고,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네.”
“어쩌다 그리됐는지 아시오?”
솔은 일주일 사이에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계속 물었다.
“비밀 장분지 뭔지가 감찰관 손에 들어가서 포도대장이랑 김좌수가 모두 송 객주와 연결되어 의금부로 압송됐다는 얘기만 들었소.”
사내는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다는 듯 바삐 장터 안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서두르자. 오라비는 집에 들렀다가 포도청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구나.”
두 사람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본가에 가까워질수록 선과 솔은 골목을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지 착각에 빠졌다. 폐허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담장은 원래대로 복원되었고, 불에 탄 흔적이 가득했던 대문은 튼튼하게 다시 만들어져있었다. 놀란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며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머뭇거리는데, 마침 대문이 열리고 돌석아범이 나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했던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섞여서 눈물을 글썽이던 돌석아범이 말했다.
“아이고, 나리, 아씨. 고생 많으셨구먼유. 어여 들어오세유.”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들어와 보면 알아유.”
두 사람이 돌석아범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장의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정신없이 집을 고치고 있었다.
“다들 여기 좀 보세유. 나리께서 오셨슈.”
돌석아범의 말에 부엌에서 성주댁이 나와 솔을 보고는 울며 와락 안았다.
“아이고, 아씨. 얼마나 고생이셨어유.”
솔이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선은 이장과 마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언제 이렇게 다 손을 보셨습니까.”
“내가 도편수 밑에서 집 짓기 십수 년이니 영 엉터리는 아닐껄세.”
선은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지내다가 도움을 받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열려있던 대문으로 포졸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종사관 나리, 포도청에서 급히 오라십니다.”
“솔아, 여길 좀 부탁하마.”
“걱정 말고 다녀와.”
선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포졸과 함께 포도청으로 향했다.
포도청 앞마당에 가마니로 덮인 시신 한 구가 놓여있었다. 선이 포도청으로 들어오자, 감찰관이 선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비밀 장부를 내게 보낸 박 종사관인가?”
“네, 그렇습니다.”
“자네 덕분에 밀무역 조직뿐만 아니라 관련된 포도대장과 김좌수도 처벌을 받게 되었네.”
선은 감찰관의 말보다 놓인 시신에 더 신경이 쓰였다.
“조만간 자네 앞으로 교지가 도착할 것이니, 그때는 관복을 입고 오시게. 내가 지금 급히 부른 이유는 이 시신이 누구인지 확인차 불렀네.”
감찰관의 손짓에 포졸 한 명이 가마니를 들추었다. 가죽만 남아있는 남자의 시신이었다.
“누군지 알겠나? 포졸들 말은 흑월각 객주라고 하는데, 확실히 아는 자가 없어서 말이지.”
선은 한눈에 송만석임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가죽만 남았다면 악귀가 기를 흡수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놈은 소멸했다고 했는데, 이렇게 만든 또 다른 악귀가 있는 것인가?’
“맞습니다. 흑월각 객주 송만석입니다.”
이 모든 저주가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선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마 몰래 배를 타고 도망치려다 변을 당한 것 같더군. 오늘 새벽에 강 주변을 수색하다가 발견됐지.”
“다른 수하들은 없었습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송 객주만 물에 빠진 게 아닌지 짐작되긴 하지만 어쨌든 사건은 여기서 마무리할 것이네. 자네는 내일부터 새로운 포도대장이 임명될 때까지 여길 지켜주게나.”
선에게는 10년 같은 일주일이었다. 드디어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마음 한쪽이 불안함으로 채워졌다. 수시로 괴롭힌 가슴 통증도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환청과 환영도 사라졌는데, 송만석의 마지막은 통쾌함이 아닌 무거운 돌덩어리를 선에게 던져주었다.
본가로 돌아오니 솔이 집수리를 마친 마을 사람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 연가도 있었다.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선은 불안함은 잠시 접어두고, 사람들 틈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탁주를 나눠마셨다.
상현달이 밤하늘에 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성주댁과 솔이도 마지막 그릇 정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고, 선은 연가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송객주의 시신을 확인하고 왔소.”
“왠지 나리 표정이 어둡다 했어요.”
“그놈이 확실히 소멸한 것이 맞소?”
“네, 제가 확인했어요.”
“송객주의 시신이 악귀에게 기를 뺏겼을 때 그 시신들과 같았소.”
“그래서 다른 악귀가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신 거구요?”
선의 마음을 연가가 알아채자, 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송객주와 흑범이 연결되어 있던 거라 미리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해도 흑범의 숙주였던 송객주에게도 그 화가 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 한쪽이 불안한지 모르겠소.”
“10년의 고통이 일주일 새 말끔해지진 않겠지요. 걱정 마시고 이제 나리의 삶을 사세요.”
선은 연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대문 앞에서 연가를 보내고 사랑채로 들어온 선은 성주댁이 미리 펴놓은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반딧불이 수만 마리가 빛을 내며 집 마당에 가득했다. 그리고 마당에 펴 놓은 평상에 박윤과 어린 선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 호랑이는 잡으셨어요?”
“물론이지. 이 아비가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걱정 말거라.”
박윤은 어린 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린 선도 박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