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신월, 마지막 선택

by 한이제이

폐가의 썩은 나무 벽에서 거의 다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솔이 안심하며 마지막 발을 빼려는 순간, 눈앞에 그림자가 보였다.

“오라비에게 가려는 것이냐?”

송만석의 차가운 목소리에 솔은 나오려던 그 상태 그대로 온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송만석이었지만, 송만석이 아니라는 것은 솔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때, 문 앞을 지키던 송만석의 수하 둘이 와서 솔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솔은 송만석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솔은 붉은 조각 목걸이 때문인지 송만석 뒤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실체를 마주한 솔은 두려움에 잠식된 채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다시 폐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연가의 집에서 뛰쳐나온 선은 한 손에 흑범의 꼬리를 든 체 솔이 있는 폐가를 향해 달렸다.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거친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기도 했지만 다친 줄 모르고 계속 달렸다.

“여기 네놈이 찾는 물건 가져왔다.”

어두운 폐가에 도착한 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 거친 숨을 내쉬며 흑범의 검은 꼬리를 들고 말했다. 그러자 목각인형처럼 굳어있는 송만석의 몸에서 빠져나온 흑범이 선의 손에 들린 꼬리를 빼앗은 뒤 잘린 꼬리에 붙이고는 붉은빛을 뿜으며 주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 솔도, 송만석도 불에 휩싸이고 말았다.

솔을 구하려고 다가가던 선은 악귀가 된 흑범의 붉은 눈과 마주치자, 온몸이 돌덩이가 된 듯 꼼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죄책감과 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절망에 빠진 선의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몰려들면서 선을 감쌌다.

‘내가 다 망쳤어.’

자책하며 흑범이 공격해도 방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선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선의 콧속으로 익숙한 향냄새가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연가의 작은 방안이었고, 연가가 꺼진 향을 다시 피우고 있었다.

“나리가 밤새 잘 버텨주신 덕분에 준비를 마쳤습니다.”

“악몽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지만, 솔이 보였소. 그리고 그놈이 꼬리를 되찾아 악귀가 되는 것도 보았소.”

“악몽과 환영이 혼재된 듯합니다.”

“솔이 걱정되오. 언제까지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오?”

“가장 어두워지는 해시가 돼야 그놈이 인간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옵니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소멸시켜야 해요.”

“해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작업이 남았어요. 저와 함께 신당으로 가시죠.”

선은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목검을 챙겨 신당으로 갔다.


신당에 들어서자, 결계로 봉인된 백자단지가 선의 눈에 들어왔다.

선이 그 앞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연가가 단지 옆에 놓인 방울을 흔들며 한 손으로 깨진 뚜껑을 봉인한 부적을 걷어냈다. 그리고 깨진 뚜껑을 열자 미세하게 단지가 요동치면서 붉은빛이 뿜어졌다.

“나리께서 이 단지 안에 손을 넣으시면 주인을 찾듯 알아서 나리 몸속으로 흡수될 것입니다.”

연가의 말에 선은 가슴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놈은 모르는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것이오?”

“나리껜 송구하지만, 그놈에게 뺏기지 않고 소멸시킬 유일한 방법이지요.”

선은 가슴 통증을 참으며 손을 천천히 단지 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단지 안에서 뭔가 선의 손을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았고, 선의 손끝에 기분 나쁜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읔――”

선의 짧은 비명과 함께 검은 꼬리가 마치 검은 뱀처럼 선의 손과 팔을 감으며 단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선이 단지에서 손을 빼자 단지는 깨졌고, 검은 꼬리는 선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선의 가슴에서 붉은빛이 번져 나오면서 꼬리를 휘감았고, 선의 핏줄을 타고 가슴속 붉은빛으로 흡수되었다. 그 옆에서 연가는 쉴 새 없이 주문을 외며 방울을 흔들었고, 선은 불에 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쓰러져 몸을 뒹굴었다. 붉은빛은 선의 온몸으로 펴졌고, 선의 눈빛이 붉게 변했다.

이때, 연가가 재빨리 만들어놓은 부적을 선의 가슴에 붙이고 오방색 매듭으로 만든 결계의 나무 목걸이를 선에게 걸어주었다. 그러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선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고, 눈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선은 식은땀을 흘린 채 기절했다.

“이제 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연가는 기절한 선을 보며 누군가에게 조용히 말했다.

“10년을 준비한 일이다. 실수 없이 마무리하거라.”

“네.”

선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목소리는 연가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한나절이 지나고 오후가 되었지만, 마을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장이 집마다 돌아다니며 역병이 돌고 있으니, 문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탓에 마을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길 꺼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이 역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시끌벅적하던 장터도 문을 닫았고, 흑월각도 문을 닫았다. 분주한 곳은 오로지 포도청밖에 없었다.

포도청 마당에서 포도대장의 지휘하에 포졸들은 활과 횃불을 챙기고 있었다.

“해가 지면 바로 출발할 것이니 빠짐없이 챙기거라.”

“넵!”

포졸들은 일사불란하게 활과 횃불을 나눠 들었다.


신월이 시작된 산속은 암흑 그 자체였다. 준비를 마친 선은 연가에게 받은 금줄로 결계가 쳐진 긴 나무상자를 받아서 흰 보자기로 감싼 뒤 가슴 쪽으로 둘러멨다. 그리고 목검은 허리 뒤쪽에 숨겼고, 만약을 대비해 쇠뇌를 어깨에 둘러멨다. 연가는 흑범의 피가 묻은 박윤의 옷조각과 흑범의 향주머니를 다른 무구와 함께 흰 보자기에 싸서 등에 멨다.

선이 먼저 연가의 집 싸리문을 열고 나가자, 결계의 방울들이 요란하게 울렸고, 선의 눈앞에 붉은 실처럼 보이는 긴 줄이 나타났다.


폐가 입구를 지키는 수하는 보이지 않고, 폐가 안에서 송만석이 묶여있는 솔이와 둘이 있었다.

“오라버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넌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 못 하겠지만, 니 오라비에게 저주를 건 사람은 바로 부사직 나리시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말도 안 돼!”

“오늘 밤이 지나면 다 알게 되겠지. 니가 살아있다면.”

솔은 송만석에게 말을 걸면서도 그 뒤에 보이는 검은 형체에 신경이 쓰였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구세요?”

“그 목걸이 때문에 너도 내 뒤에 다른 존재가 보이나 보구나.”

“제 오라버니처럼 저주에 걸리신 거예요?”

“이놈은 선택한 거다. 재물 욕심 때문에.”

솔은 순간 달라진 송만석의 목소리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선은 붉은 줄을 따라가면서 폐가 안의 환영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묶여있는 솔의 모습이 선의 가슴 통증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당산나무 앞에 도착한 선과 연가는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 나리 혼자 가셔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찾은 물건을 소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내가 실패하더라도 연무당이 그놈을 꼭 소멸시켜 주시오.”

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은 다시 붉은 줄을 따라 폐가로 향했다.

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연가는 가져온 물건을 당산나무 앞 제단 위에 펼쳐놓았다.


연가와 헤어져 혼자된 선은 가슴 통증이 더 심해졌지만, 솔을 생각하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뛰기 시작했다. 그런 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붉은 줄은 더 선명하게 선을 폐가로 이끌었다. 하지만 암흑이 된 산속을 붉은 줄 하나만 보고 달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선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달리다가 오래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또 일어나 달리다가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혀 피가 났다. 그렇게 폐가에 가까워질 때쯤 갑자기 멈춰서 얼굴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리고 이미 한번 겪은 것 같은 악몽이 떠올라 폐가가 눈앞에 보였지만 두려움이 선의 발목을 잡았다. 망설이며 멈칫하던 그때, 환영으로 보았던 솔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선은 결심한 듯 크게 심호흡하고, 천천히 붉은 줄이 끝나는 폐가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돌담은 무너진 지 오래고, 대문의 흔적은 잡초들로 찾을 수 없었다. 선은 조심스럽게 붉은빛이 나는 폐가의 창고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안에 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피며 문을 열자,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송만석과 그 옆에 묶인 채 서 있는 솔이 보였다.

“솔아!”

지쳐있던 솔은 선을 보고 반가움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여기 찾는 물건을 가져왔으니 내 누이를 풀어주시오!”

송만석은 움직임이 없고, 대신 흑범이 송만석의 몸에서 빠져나와 선을 보았다. 붉은 흑범의 눈빛이 악몽에서 본 그것과 같다는 생각에 선은 두려웠지만, 애써 감추며 매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결계로 묶인 나무상자를 보였다.

“누이를 내 쪽으로 보내면 결계를 풀고 너에게 이 물건을 줄 것이다.”

선이 든 나무상자에는 연가가 미리 흑범의 붉은 조각과 함께 가짜 꼬리를 넣어둔 덕분에 흑범을 속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선의 정신은 점점 흑범에게 잠식되는 듯 흐릿해지고 있었다. 송만석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흑범은 솔이를 선에게 보냈다.


같은 시각, 폐가 주변으로 횃불을 든 포졸들이 폐가를 포위하듯 숲에 숨었다. 그리고 다른 포졸들은 기름이 묻은 솜뭉치를 화살 끝에 붙여놓은 것을 들고 포도대장의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포도대장은 송만석이 빠져나오기로 한 뒷문 쪽에 포졸을 배치하고, 명했다.

“송 객주가 여기로 빠져나오면 화살에 불을 붙여 폐가 쪽으로 쏘거라. 그럼, 그것을 신호로 알고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

“네!”

“정신 바짝 차리거라. 실수하면 큰 사달이 날 터이니.”

“넵!”

포도대장은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폐가 앞 풀숲으로 가서 다른 포졸들과 함께 몸을 숨겼다.


선은 손을 뻗어 앞으로 걸어오는 솔이를 잡았다. 그리고 나무상자의 결계를 풀고 흑범 앞으로 던지고는 솔의 묶인 손을 풀어주었다. 이제 송만석과 완전히 분리된 그 흑범을 소멸시키고 솔이와 함께 이 폐가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흑범이 먼저 나무상자의 꼬리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니 놈이 날 속여!!”

흑범의 분노가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고, 살기의 붉은빛이 나무 벽에 불을 붙였다. 제정신을 차린 송만석은 미리 봐둔 뒷문으로 빠져나갔고, 선은 솔이를 창고 밖으로 밀어서 내보냈다.


폐가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포도대장은 불이 붙은 창고를 보고 포졸의 신호로 착각해 숨어있던 포졸들에게 명령했다.

“발사하라!!”

포졸들은 일사불란하게 미리 준비한 횃불을 이용해 화살 끝에 불을 붙여 폐가로 발사했다.

솔이는 선을 찾기 위해 다시 들어가려고 했지만, 이미 창고 문까지 불이 번져서 들어갈 수 없었다.


연가는 당산나무 앞에서 흑범의 저주에 걸린 물건을 미리 준비한 화로에 넣고 주문을 외우며 하나씩 태우고 있었다.


창고 안이 불에 휩싸였지만, 선은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흑범의 분노를 흡수하고 있었다. 선의 의지는 점점 약해졌고, 흑범은 강한 힘을 가진 선을 완전히 갖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니 놈을 가져야겠다.”

“그, 그렇게는, 안, 될, 것, 이다.!”

선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허리 뒤쪽에 넣어둔 목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목검은 스스로 푸른빛을 뿜으며 선의 손이 저절로 가슴으로 향했다.

“무, 무슨 짓이냐!”

“아, 버, 지 복수! 그리고 어, 머니 와, 마 부장의 복수다!!”

선은 힘들게 말하고는 두 손으로 목검을 잡고 자기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목검의 푸른빛이 창고의 불을 잠재우고, 흑범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푸른빛에 서서히 잠식되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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