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만주에서 모스크바로

동토의 광야(4)

by 레테

[6]


발트해의 소국이자 유럽의 IT강국인 에스토니아 그리고 그 나라의 제 2도시이자 도시 전체가 거대한 대학 캠퍼스인 타르투에서 대학원을 다녔던 나는 2013년 4월에 학회 참석 차 항공편을 이용해 러시아의 이슬람 문화 수도 카잔을 방문했다. 그리고 카잔에서 침대칸이 있는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다시 에스토니아로 돌아왔다.

침대칸이 있는 열차를 타고 처음 장거리 여행을 했던 건 중국에서 북경 올림픽이 열렸던 다음 해인 2009년 한 겨울이었는데, 당시 나는 북경의 한국 입시 학원과 학교에서 약 3년 간 영어를 지도하고 난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오랫동안 꿈꿔 왔지만 끝내 가 보지 못했던 러시아 땅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중국의 춘절 시즌을 즈음해 중국과 극동 러시아의 접경 도시인 수분하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나는 우선 북경에서 하얼빈까지 장거리 열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며칠을 묵은 후 다시 열차를 타고 옛적 대부여의 고도이자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즉 지금의 목단강으로 이동한 후, 다시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고 나서야 마침내 고대했던 중·러 국경도시인 수분하에 이르렀다.

아, 그런데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첫째로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했던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잠깐 동안의 병치레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옹졸하고 진정스럽지 못했던 나의 성정으로 인해 소중한 인연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 우연히 목격한 드넓은 만주 벌판의 눈부신 설경과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은 아름다운 별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주는 영어 혹은 러시아어로는 만추리아(Manchuria/Маньчжурия)라고 불리우며, 역사적으로는 중국·몽골·러시아 그리고 한국 사이에 있었던 광활한 대지를, 그리고 현재는 중국의 동북 3성인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이 위치한 지역을 가리킨다. 만추리아는 만주어로 ‘문수보살의 땅’을 의미하는데, 만주어는 중국어와는 달리 우리나라와 함께 우랄-알타이어의 부여-한(韓) 어족에 속한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대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한민족 국가들이 문화를 꽃피우며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던 곳이고, 중국 한족이 의도적으로 낮추어 불렀지만 사실상 대부분의 중국 왕조를 지배해왔던 동이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땅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당시 관계가 많이 소원해져 있었던 여자 친구가 동북 지역 여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늦은 시각에 홀로 북경역으로 향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시즌이었기에, 역 안은 이미 어둠이 짙었지만 각자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고작 몇 시간 가는 고향길이 힘들다고 푸념하지만, 땅덩어리가 워낙 큰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수 십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씩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게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처음 타보는 침대 열차에 설레기도 했고, 혼자 하는 여행인지라 적적하기도 해서 캔맥주 두 개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야간 열차에 올랐다. 창가 자리 쪽을 예약했는데 열차가 출발한 지 몇 시간 뒤 자정을 넘기자 객차 안이 일시에 취침 소등되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아 미리 준비해 온 캔맥주를 조용히 꺼내 한 모금씩 마시며 아무런 인사도 건네지 않으며 말 없이 지나가는 바깥 풍경들의 표정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풍경들엔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저 안엔 사람도 살고, 동물도 살고, 식물도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저들은 과연 어떤 사연과 비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일까? 어떤 꿈을 꾸며 지금을 버티고, 어떤 기억들을 더듬어 과거를 추억하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알 수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얀 눈으로 뒤덮인 땅은 하늘에서 달과 별들이 뿌리는 빛을 반사해 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티 없이 맑은 밤하늘에 수 없이 박힌 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을 비추고 반사하며 마치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것 마냥 거대한 거미줄처럼 빛나고 있었다.

내가 언제 별들을 이토록 선명하게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언제 별들에 대해 이토록 경이로운 느낌을 가져 본적이 있었던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이 더 ‘센치’해졌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창가 쪽에선 갓 스무 살이 넘은 것 같은 젊은 남녀가 핸드폰 조명을 켜 두고 조그만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고향 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난 인연이리라. 나는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로부터 들키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대지의 눈도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빛을 머금은 풍경은 초저녁처럼 밝았다. 그리고 그 풍경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 없는 풍경이 마치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느꼈다.


“먼 길을 돌아왔노라.”고.

“잘 찾아왔노라.”고.

그리고 ‘다 잘 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참고로 에스토니아어는 핀-우그르계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 한국어가 속한 우랄-알타이 어족의 한 갈래이다. 유럽 연합 내에서 이 어족에 포함되는 국가는 에스토니아 외에 핀란드, 헝가리뿐이다. 유럽의 범위를 그리스도교를 기준으로 삼는 통념에서 벗어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범유럽 지역까지 확대하면 터키 역시 교착어라는 공통성을 가진 이 어족에 포함된다. 그리고 심지어 핀란드-에스토니아의 핀족과 헝가리의 마자르족 그리고 터키인의 4분의 1 가량에게서는 몽골반점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만추리아, 시베리아, 코리아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접미사 ‘-리아’는 라틴어 접미사 ‘-ia'에 연원을 두며, 카자흐스탄의 ‘-스탄’처럼 ‘장소나 영토’를 의미하는 여성형 어미이다. 즉 만추리아는 만주인의 땅, 코리아는 고려인의 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https://youtu.be/uhLLvkX_P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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