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발트3국

발트유럽으로(1)

by 레테

[1]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돈? 가족? 일? 세상엔 정말 너무도 많은 소중한 것들이 있다. 건강 역시 그 중에 하나이리라.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기 몇 달 전, 나는 약간의 ‘풍’을 겪었었다. 다른 말로 하면 뇌졸중. 의사들 말로는 '지나가는 풍(Transient stroke)'이라 했다. 요즘 뉴스를 보면 20-3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뇌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데, 당시 내 나이는 속된 말로 3땡, 즉 3학년 3반이었다. 아무튼 건강 상의 문제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었고, 10년 넘게 피워왔던 담배도 자연스레 끊었다. 우리나라에 IMF의 광풍이 몰아쳤던 1997-8년 미국에 살 때는 독한 담배를 하루 3갑 가까이 피기도 했지만, 그 날 이후로 무슨 연유에선지 담배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연을 말하자면 이렇다. 한 겨울 일요일 이른 아침, 학원으로 출근하던 여자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갑자기 엄청난 돌풍이 몰아쳤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세차고 차가운 바람에 화들짝 놀란 나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부랴부랴 따뜻한 집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못다 잔 잠을 청했다. 엄청난 고통이 몰아친 건 잠에서 깨고 난 직후였다. 어찌나 아프고 고통스럽던지 나는 두 주먹으로 머리를 세차게 내리쳐가며 소리 내 울었다. 그리고 차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할 수는 없어서 일을 하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 친구는 당연히 무슨 영문인지 몰라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그리고 퇴근 후 곧장 나에게로 달려온 그녀는 밤새 나의 머리를 마사지 하며 힘들어 했던 나를 간호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고통은 좀 가라앉았고, 어찌나 세게 내리쳤던지 내 머리엔 주먹만 한 혹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 날로 즉시 난 학원 원장이 소개해 준 한의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풍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머리에 침도 맞았고 지어준 약도 복용했다. 그리고 의사인 여동생의 조언에 따라 중국 병원에 가서 머리 엑스레이도 찍었다. 중국 병원의 엑스레이 결과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나는 몰라보게 기력을 잃었고, 더 이상 일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 학원 일을 그만 두고 개인적인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소중한 것이 늘 그렇듯, 행복은 더 빨리 사라진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타이밍은 어긋나며, 사랑은 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세상은 인연과 사랑을 말하지만, 모든 이에게 허락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잔인한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어리석고 설익은 영혼에게 되돌릴 수 없고 또 잡을 수도 없는 소중한 뭔가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준다. 그랬다.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속 좁은 열등감이었고, 배려 없음이었고, 불성실함이었다. 쉬는 날 밥 해주러 오겠다는 것도 귀찮아 마다했고, 지나가는 뇌졸중 증세로 죽을 뻔 한 고통을 겪을 때 한달음에 달려 와 밤새 간호해줬는데도 제대로 된 고마움조차 표현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헤어지자고 한 것도, 크게 싸웠던 것도 아니었다.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여자 친구에게 난 참 배은망덕하고 염치없는 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진정한 사랑이나 깊은 연애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속으론 늘 소울메이트를 찾고 싶다고 소망하면서도 바로 가까이에 있는 보석을 외면한 체, 철 없고 나태하고 이기적인 연애 놀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동북 지방 유람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사오긴 했지만 우리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 인연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 보였다. 연락은 더 뜸해졌고, 나이도 차서 이제 결혼을 고민해야 했던 그녀는 바늘 없는 나침반처럼 배회하며 미지의 길을 찾고 있었던 불안한 남자 친구 탓에 결국 허무한 시간의 재만 손에 쥐었으리라. 그렇게 우린 어느 순간 멀어졌다.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주고받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한 순간에 건강을 잃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야 비로소 그토록 갈구했던 러시아 땅을 먼 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수분하로 향하는 도정에 올랐다. 그리고 나의 사랑과 인연들이 시들해져 가던 즈음, 하얼빈으로 향하는 밤 기차 안에서 갓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새로운 인연의 꽃봉오리들을 보았다. 만주의 밤하늘을 비추는 수 많은 별들 아래서, 얼어붙은 만주 땅을 솜이불처럼 뒤덮었던 하얀 눈 위에서, 그리고 수 많은 사연들을 싣고 달렸던 야간 열차 안에서.

언젠간 그간의 방랑기를 책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하기 어림잡아 10년도 더 전인 2009년 새해에, 나는 만주의 그 어딘가에서 익숙했던 일들과 인연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내 안의 감춰진 별을 찾아 본격적인 편력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2]


하얼빈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일제시대 안중근 의사가 메이지 유신의 상징이자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살해한 곳으로 유명하다. 안중근 의사는 지금까지도 한국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당시 사건은 아시아내 항일 운동의 기세를 뒤바꾸어 놓을 정도로, 제국주의의 수탈로부터 핍박받던 약소민족 민중들의 마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하얼빈을 방문해 좋았던 점은 그 곳에서 러시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부 건물의 서구적 건축 양식이라든지, 상점 간판에 쓰여 있는 러시아 키릴 문자라든지 하는 풍경들이 그래서 나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다.

눈이 녹은 하얼빈 거리는 무척이나 질척거렸는데, 거기다 바람까지 매섭고 시내는 인파와 차량으로 붐볐었다. 늦은 아침 하얼빈 역에 도착한 나는 중국의 유명 여배우 관지림의 사진이 걸려 있는 역 주변 상가 지역을 벗어나 눈이 녹아 지저분해진 거리를 따라 무거운 짐 가방을 끌며 어렵사리 하얼빈 러시아 거리인 중앙대가에 위치한 숙소에 다다랐다.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낯섦이 설렘을 유발하고, 새로움이 호기심을 동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 가보는 곳에선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데서 오는 어색함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이라는 안도감과 자유로움이 공존한다. 숙소에 짐을 푼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가 러시아 거리를 산책했다. 러시아 정교 성당과 유럽식 건물들이 즐비한 중앙대가를 따라 죽 걸으면 송화강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송화강은 동쪽으로 계속 흘러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지역에 이르러 흑수말갈의 본향인 흑룡강(러시아 명칭으로는 아무르강)의 본류와 합류한다. 이 지류는 ‘흑수’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우며, 흑수말갈은 과거 고구려와 발해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국가 구성원이기도 했다.

겨울의 하얼빈은 무엇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빙등제와 빙설제로 유명한데, 굳이 이곳들을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중앙대가 곳곳에 세워지고 장식된 빙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눈요기가 된다. 거기에 알싸하고 청량한 맛이 가득한 하얼빈 맥주를 마시면 목 안까지 상쾌함과 호방함이 더해지는 듯 하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그렇지 않아도 추운 날씨가 강변이라 특히 더 춥게 느껴진다는 거다. 바람만 없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북방의 기개가 송화강의 파도처럼 넘치는 그곳은 바람까지도 잘 벼려진 창끝처럼 매서웠다. 하얼빈에서 며칠을 묵은 후, 나는 곧장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가 있었던 도시 목단강으로 향했다. 목단강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송화강의 가장 큰 지류인 목단강의 명칭이기도 하다. 목단강 지근엔 동북호랑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동북호림원이 있고, 아무래도 한민족의 땅이었던 곳이라 그런지 의복이나 음식 등 지역의 전통 문화에서 한국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게 남아있었다. 특히 이 지역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처럼 ‘단고기’라 부르는 개고기를 즐겨 먹기도 한다. 나는 목단강에서도 며칠을 지내고 난 후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중·러 국경 도시 수분하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분하는 러시아의 국경도시 포그라치니(Пограничный)와 접경하고 있는 인구 6만 남짓의 소도시인데, 이곳에선 흔히 ‘petty trading’이라고 하는 보따리상들의 범국경(cross-border) 거래, 즉 행상이 활발하고, 현재는 신북방 진출의 교두보로서 훈춘-자루비노-부산 루트와 더불어 수분하-블라디보스톡-부산으로 이어지는 중·러·한 범국경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지역 협력과 지역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남북한간 자유로운 왕래와 교역이 가능해지면 이곳을 경유해 북방 대륙으로 나아가는 고속도로가 뚫릴 수도 있어서, 지경학적인 관점에서 특히 개인적으로 눈 여겨 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수분하에 도착해 역시 좋았던 것은 정겨운 러시아 문자와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인 고골의 ‘대장 부리바’로부터 막연하게 시작되었는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러시아 전공자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나는 단 한 번도 러시아 땅을 밟아보지 못했었다. 물론 학업과 생업으로 인해 삶이 고단하고 바빴던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가 석유와 가스로 막대한 부를 축적함에 따라 루블 가치가 고공 상승해서 러시아에서의 생활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유 또한 있었다. 어쨌든 나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러시아의 얼굴을 먼 발치에서라도 보고, 그녀-문화해석학적 관점에서 대지나 국가는 여성 취급한다.-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직접 느껴보기 위해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그 곳, 수분하를 찾았다. 관광을 목적으로 한다면 사실상 방문 가치가 전혀 없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동경해 마지않았던 곳이었고, 비록 중국 땅에서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공기를 최대한 가까이서 들이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엔 러시아, 특히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10여 년 후 내 영혼의 고향이 될 거란 걸 조금도 예상치 못했지만, 사실 상 아무 볼 것도 없는 시골 도시를,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도 엄동설한에 광활한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찾아갔어야 했을 만큼 러시아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뿌리가 깊었다. 그래서 단지 진짜 러시아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여행지로선 그리 특별할 것 없었던 그 곳, 변방의 소도시 수분하를 방문할 가치가 충분했다.


https://youtu.be/0X4SEl3KGUE



이전 05화1장. 만주에서 모스크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