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유럽으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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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 온 나는 목동에서 1년 정도 다시 영어 강사 일을 했다. 그리고 2010년엔 나의 첫 번째 조카 동엽이 태어났다. 동엽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의 고향 집 분위기는 적막만 가득했었다. 서른 중반을 넘겨버린 장남인 나는 결혼 생각도 없이 부조리한 현실과 불운한 운명만 탓하며 푸념과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차남은 집안 사정은 도외시 한 체 연기라는 뜬구름만 쫓아다니고 있었으며, 정년퇴직한 아버지는 늘 그래왔듯 수년 째 집안일에 손 한번 보태는 일 없이 권위와 특권만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된 집안일은 물론 평생을 독서실·옷가게 등의 생업을 홀로 병행해 왔던 연로한 어머니의 몸은 당연히도 안에서부터 차츰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낙 없는 그 분의 마음 속엔 알게 모르게 울화와 우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고생해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들이 나이를 먹어서도 제 역할을 못하고 방황만 하고 있었으니 그 서운함과 안쓰러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나마 둘째인 딸내미가 지방의 국립의대를 마치고 난 후 결혼해서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교육학 박사를 밟고 있었으니 그게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었으리라. 지금도 석양이 질 무렵이면 아파트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바깥만 내다보던 어머니의 뒷 모습이 눈 앞에 선연한데, 어쩌면 나는 그때 어머니의 감춰진 우울감을 예감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하고 살가움이라곤 눈꼽의 때만큼도 없던 나는 단 한 번도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한번 엄마에게 건네 본 적이 없었다. 전형적인 가부장인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서먹서먹해서 부모님과 내가 함께 집에 있을 때는 정말이지 무겁고 갑갑한 공기만 실내에 가득했었다.
그러던 차에 거짓말처럼 조카 동엽이 태어났다. 독일 유학 중인 남편도 없이 만삭의 몸을 이끌고 강의실과 병원 등을 오가며 학업과 일을 병행했던 여장부 동생이 9월의 어느 날, 기적 같은 새 생명을 우리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다. 첫 조카는 그 존재만으로 우리 집안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았다. 미소가 사라졌던 집 안엔 갓난 아기의 재롱으로 식구들의 웃음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고, 하나뿐인 외손주 육아를 독박 쓰듯 하느라 힘이 들기도 했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엔 뿌듯함과 행복감이 가득해졌다. 난 아직도 당시 내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던 갓난 조카의 숨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 아이의 작은 심장이 마치 내 심장의 일부이기라도 되는 양 나는 차마 그 아기를 내 품에서 떼어 놓기 조차 두렵고 조심스러웠었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고 혈육이라는 것이 과연 나에겐 어떤 의미인 건지를 나의 첫 번째 조카를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슴 깊이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엽이 우릴 찾아오기 전, 홀로 베란다에 서서 석양을 내다보곤 하던 엄마는 무슨 생각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다시 베란다에 서서 그 순간의 분위기를 곱씹어 보았다.
‘매일 뜨고 지는 해인데 노을은 왜 저리도 아름다운가?’,
‘매일 사는 삶인데 어쩌면 이리도 같고 또 다른가?’
이곳은 우리가 매일 살아야할 세상이기에 더 없이 아름다워야 할 일이었다. 설령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론 늘 함께할 가족이기에 더 없이 소중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사회와 나라를 원망하며 가장 조심스레 다뤄야 할 가족들의 가슴에 독한 말로 비수를 꽂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식구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겼다. 나는 수시로 식구들에게, 특히 나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어머니에게 나의 진심을 곡해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좌절과 울분을, 불운을 거듭하며 고생스럽기만 한 나의 팔자와 운명에 대한 슬픔을, 나를 무시하고 상처 줬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를 터트렸다. 진솔하게 속을 터놓고 대화 나눌 상대가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그저 편하기만 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난 그런 식으로 하소연하듯 넋두리를 해가며 그들을 결국 욕받이로 만들며 내 가슴 속에 쌓여 온 울화를 해소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의 마음엔 생채기가 쌓였을 터이고, 나의 독설로 할퀴고 또 찢긴 어머니의 가슴엔 깊은 상처와 흉터가 남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자식의 울분과 고통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인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하지만 당신 본인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난 자식의 고뇌와 슬픔을 대신 감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방황하며 끝 모를 방랑을 합리화할 구실과 논리를 만들어 내는, 이미 다 컸지만 여전히 철없어 보이는 자식의 눈물을 대신 삼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깊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끝없이 스스로를 학대하고 파괴하는 자식의 안쓰러운 폭주를 자신의 몸이라도 내던져 막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표현이 서툴러 제대로 된 내색조차 못했지만, 분신 같은 당신의 자식이 자신의 희생과 사랑으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속으로 한 없이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결국 갑갑하기만 한 강의실에서 하늘 멀리 사라져 가는 비행기들을 올려다보며 또 다시 가족들을 뒤로 하고 혼자만의 방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서울로, 군대를 제대한 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IT업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느라 졸업을 미뤄뒀던 대학을 뒤늦게 졸업한 후 다시 중국으로, 늘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났던 나는 우리 식구들의 보물 같은 첫 조카 동엽이 태어난 다음 해인 2011년 겨울, 발트의 소국 에스토니아 유학길에 올랐다. 나의 끝 모를 편력의 뿌리인 마음 속 결여를 채워 줄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결핍감은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채워줄 수 없었던, 오롯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감내하고 메꿔야 할 일종의 부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