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엘프의 땅

에스토니아에서(1)

by 레테

[1]

에스토니아는 다른 서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9월에 새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우선 탈린에서 3개월 정도 러시아어 연수를 받기로 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덴마크의 도시라는 뜻으로, 도시 이름 자체가 에스트 원주민에 대한 덴마크의 오랜 지배를 상징하는 역사적 흔적이다. 에스토니아 국민의 약 20프로는 러시아인인데 이들은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 도시인 나르바에 주로 거주한다. 통상적으로 국경 도시들은 대개 치안이 불안하고 범죄율이 높은데 안타깝게도 나르바는 세계에서 에이즈 발병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에 한 곳이다. 그리고 에스토니아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육 도시 타르투와는 달리 수도 탈린에도 역시 많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데,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어서인지 이 지역에서는 언어가 유사한 핀란드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를 비롯해 영어, 라트비아어 등이 폭넓게 통용된다. 그래서 탈린은 다양한 언어를 공부하고 연습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나는 겨울이 한창일 때 덴마크 코펜하겐을 경유해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탈린에 도착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가장 싼 티켓을 구입했고, 이로 인해 에스토니아까지의 비행은 총 이동 시간이 하루를 훌쩍 넘기는 멀고도 긴 여정이 되고 말았다. 에스토니아도 그렇고 비슷한 위도의 유럽 지역은 통상 겨울이 10월경에 시작돼서 길게는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지는 데 내가 탈린에 도착했을 당시는 1월이었기 때문에 추위가 한창이었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이 매일 무릎 이상 쌓이던 때였다. 뭐 지금이야 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눈에 띄었던 LG티비와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보였던 기아인지 현대인지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우리나라 자동차회사 판매점을 보고 왠지 모를 자부심에 어깨가 으쓱해졌던 기억이 있다. 외국을 다니다 보면 K-POP과 한국 기업들 덕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경우가 많다. 덕분에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져서 여러모로 한류 덕을 많이 본다. 가끔 종교나 정치가 고춧가루를 뿌리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하기 얼마 전 탈린에선 한국의 만민중앙교회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해서 에스토니아의 한국에 대한 인상이 조금 안 좋아졌던 때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자칭 지도층을 자임하는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문화·스포츠인과 기업인들이 고생해서 올려놓은 한국의 위상을 더 이상 깎아먹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나대지 말고 그냥 가만히만 있어주는 게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찌됐든 공항을 나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미리 연락 해둔 하숙집으로 곧장 향했다. 하숙집 주인은 한국 나이로 치면 아마도 20살인가 21살인가 되었던 마리라는 이름의 탈린대학에 다녔던 친구였는데, 그녀는 당시 부모님과 따로 살면서 남자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화장실과 욕실을 같이 쓰며 방 하나를 얻어 타르투로 이동하기 전까지 몇 달간을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선 흔하지 않지만 유럽 지역에선 동거가 워낙 보편화되어 있고 연애와 성생활을 자연스레 즐기기 때문에,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던 나는 그런 유럽인들의 자유와 개방성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2]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엔 구시가, 일명 올드타운(Old town)이 있다. 탈린에도 역시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역사지구가 있는데,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탈린 올드타운의 고풍스런 성곽과 성벽을 지나가노라면 한자동맹 시절의 중세 유럽으로 돌아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로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곳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톰페아 요새의 거대한 성채 안에선 독일·스웨덴·덴마크의 영향을 받은 고딕 양식의 교회들과 중세 상인들의 집합거주지였던 길드 건물들은 물론 러시아풍의 건축물과 사원까지 두루 돌아볼 수 있고, 톰페아 언덕 정상에선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올드타운은 물론 발트해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탈린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수많은 백조들이었다. 발트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보면 해안가와 루살카 동상이 있는 공원 등지에서 하얀 백조 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녀석들은 성질이 몹시 사납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때는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방심했다가는 날카로운 이빨에 손가락이 물리기 일쑤고, 날개를 펴고 몸을 곧추 세우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크기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탈린에 거주하는 동안 발트해안을 따라 산책하거나 얼어붙은 바다 위를 거닐면서, 신비로운 눈안개 속을 유영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하얀 백조들을 넋 잃고 바라보곤 했다. 특별히 하얀색을 딱 집어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도 하얀 풍경이 주는 일종의 정화감이랄까, 아무튼 마음속까지 깨끗이 씻기고 맑아지는 것 같은 순수한 기분 탓에 나는 그곳의 눈과 백조를 무척 사랑했다. 지금은 10년도 훌쩍 넘게 지난 먼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그곳의 백조들과 하얀 바다는 여전히 잘 있을까? 혹시 이기적인 인간들의 횡포로 인해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을까? 뜨거워진 지구 온도로 인해 발트해는 더 이상 그때처럼 단단히 얼어붙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그곳이 그리워진다. 옅은 안개와 차가운 바람 속에 가리어졌던 하얀 백조와 하얀 눈과 하얀 바다가..


https://youtu.be/yJ95nRPeSTI?si=Ye2O9ppJGFQ0gV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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