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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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탈린을 폭격하려던 독일군은 발트해의 짙은 안개 때문에 폭탄들을 대거 발트의 바다 속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덕분에 아름다운 탈린의 올드타운은 중세시대의 고풍스런 모습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었지만, 평화로웠던 발트의 바다 속은 폭발물들과 폐기물들이 뿜어낸 오염 물질들로 인해 심하게 더럽혀지고 또 위험해졌다.
인류의 역사는 사실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분쟁과 전쟁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유럽은 더 그렇다. 유럽의 역사를 논하는 데 있어 전쟁을 빼 놓고는 거의 아무것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은 피와 살로 얼룩진 처절한 세월을 견뎌왔다.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간헐적인 전쟁과 한자·불교를 매개로 동아시아가 독특한 정체성을 공유하게 된 것처럼, 수도 없이 치뤘던 치열한 전쟁과 내전 덕분에 유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동일 문화권을 구축했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뒤섞이며 유럽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수립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유럽연합이라는 정체(政體)가 등장함으로써 유럽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고민해야 되는 시기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전쟁은 그래서 우리가 가진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또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전쟁은 누가 일으키고, 왜 하는가? 고대의 전쟁은 대체로 영토 확장과 자원 획득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중세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전쟁의 양상은 교리나 이념에 기반을 둔 국가나 블록간의 대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때로는 내부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위정자들이 인위적으로 외부의 적을 가공해낸 후 다양한 포상과 권력을 약속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전쟁의 목적은 결국 권력의 강화였으며, 전쟁을 일으킨 주체는 늘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평범한 국민들이나 양민들은 자발적으로 전쟁을 원했을까? 형제자매와 부모자식들, 친지 및 친구들을 전장에서 잃고, 그들이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장에서 싸우거나 피난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의 팔과 다리, 보금자리와 일터를 잃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바뀐 세상에서 결국 모든 걸 차지한 건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장막 뒤에 숨어있었던 위정자들이었다. 즉 전쟁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상이란 결국 힘없고 평범한 양민인 바로 우리들 자신의 희생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공로와 보상은 대부분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이름만 역사에 기록된다. 고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될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우리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득 될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굳이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위정자들의 선동과 도그마에 우리가 휘둘려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한다. 언어적·심리적·물리적·구조적 폭력 등 우리의 일상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늘 노출되어 있다. 전쟁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이다. 따라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욕을 버려야 한다. 전쟁에 대한 모든 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반대해야 한다. 그럼 우린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선 절대 이룰 수 없는 보다 더 새롭고 좋은 것들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3]
살다보면 우연히도 자주 마주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성씨나 이름도 있으며, 국가나 도시도 있게 마련이다. 개인적인 체험을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내 경우는 특히 그랬다. 그런 걸 인연이라면 인연이라 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내 소설 속 여주인공을 신이란 성과 미란이란 이름으로 형상화했었다. 이 여인은 성스럽고 신앙심이 깊으며 청순하고 순결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운전면허시험장 접수처에서 이상하게도 내 눈길을 확 잡아끄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꽉 들어 찬 필기시험장의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먼저 시험을 마치고 나온 나는 시험장 밖에 붙은 응시자 명단을 본능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신미란이었다. 시험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복도의 수 많은 벤치들 중 하나에 가방을 남겨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녀가 내 가방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점수를 확인한 후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막 떠나려는 버스를 급히 달려가 세우고 올라탔다. 사람들을 헤집고 버스 뒤쪽으로 이동한 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 신미란을 또 다시 발견했다. 나는 슬그머니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흘깃 훔쳐보았다. 성가였다.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긴 망설임 끝에 말을 거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이유는 내 작품 속 환상의 인물을 현실로 데려오기가 겁이 났고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게 우연이라면 참 신기한 우연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연들이 나에겐 몇 차례 더 있었다. 어릴 적 잡지에 실린 사진만 보고 막연하게 동경을 품었던 러시아 여성분을 대학 입학 후 강의실에서 선생님으로 뵌 일, 강남에서 영어 강사를 하던 시절에 가르쳤던 학생을 수년 후 우연히 북경에서 만났던 일, 북경의 한 강의실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하던 나를 우연히 봤던 전학생이 수년 후 에스토니아에 교환 학생으로 와 타르투 대학 기숙사 복도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던 일, 한국의 한 지방대학을 위해 대형 프로젝트 기획안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는데 수개월 후 우연히 모스크바에서 그 프로젝트 관련 교수로 임용 된 동문을 만났던 일 등을 비롯해 인터넷 채팅이 한창 인기를 끌던 무렵에 소위 ‘번개’를 하기로 했던 상대 채팅녀가 알고 보니 미국에서 알고 지냈던 누나였던 어찌 보면 낯부끄러웠던 우연까지 말이다. 물론 나한테만 유별난 경험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살다보면 참 별의별 우연이 다 있었던 것 같다. 우연이라는 것 그리고 인연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참으로 신기하고 예상치 못한 경험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지구가 사실은 그리 큰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세계에 비하면 난 모래사장의 한 올만도 못한 존재겠지만, 나의 영혼은 이 복잡다단한 세상과 우주에서 아주 가깝게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이다.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된 한 종교 지도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논문집 출판 기념 행사가 있기 전날 꿈에 그 종교 지도자가 나와서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넌 누구냐?’고.
난 그 논문집에 소논문을 게재했었고, 그 다음 날 남산 프레스 센터에서 그 논문집의 출판 기념회가 예정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난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 편력의 끝은 어디인가?’
https://youtu.be/c4u0h0XLFbM?si=ciuzI3oBl8WEcCYe